[소설 : 핸섬 가이즈]
17. 어른으로 가는 길목
정우와 우빈은 술에 잔뜩 취해서 거실 바닥에 벌러덩 누운 채 잠들어 버렸다. 진한이 그들의 겨드랑이에 수건을 끼워서 질질 끌고 방 한 칸에 몰아넣었다. 방은 제법 후끈했지만, 코 고는 소리가 듣기 싫어 문을 닫아버렸다. 기분 좋게 취한 진한은 민영이 있는 방 앞으로 가서 노크했다.
“똑똑. 자?”
“아니. 잠시만.”
문을 열고 민영이 나왔다.
“다들 자?”
“응. 둘 다 엄청나게 취했네.”
“너는 괜찮아?”
“나는 괜찮아.”
진한의 눈에는 화장을 지운 민영의 얼굴이 더 스무 살 같았다. 더 맑고 청초해 보였다. 진한에게는 둘만의 대화를 하지 못한 채 그냥 잠만 자기엔 이 밤이 너무 아까웠다. 뭔가 할 말이 있었고 해를 넘기고 싶지 않았다. 술의 힘에라도 기대고 싶었다.
“잠깐 나가서 걸을까?”
민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핑크 수면 바지 차림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진한은 거실에 걸려있는 민영의 패딩 점퍼를 챙겨서 건네주었다.
“날씨 엄청 추워.”
“넌 참 세심해. 그래서 좋아.”
진한은 표현을 숨기지 않는 민영이 고마웠다. 뭔가 억누르는 자신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진한은 명랑하고 구김 없는 여자를 좋아했는데 민영이 그랬다. 둘은 해가 바뀌기 20분 전에 밖으로 나갔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어 크리스마스이브 방 탈출 게임을 할 때 처음 손을 잡게 되었고, 오늘 술김에 허리에 손이 가긴 했지만, 여전히 어색한 새내기 커플이었다.
민영이 진한 옆에 붙어서 팔짱을 끼었다.
“어우, 춥다. 해수욕장 쪽으로 걸어가 볼까?”
진한은 바닷가 찬바람과 민영의 적극적인 모습에 술이 확 달아났다. 둘은 물이 빠진 바다를 천천히 걸었다. 민영이 신이 난 강아지처럼 폴짝거리며 뛰었다.
“처음이야. 물 빠진 밤바다 보는 거.”
그녀는 그곳에 발자국을 남기려 깡충깡충 뛰었다.
“발자국 하나 없는 바다에 자국을 내는 거 제법 기분 좋은데?”
둘은 낭만에 취하고 다가온 사랑에 설렜다. 진한이 갑자기 민영에게 말했다.
“우리 둘이 사귀는 거 맞지?”
“후훗. 아마.”
“사실 사귀는 건 처음이라.”
“나도 그래.”
늘 자신만만하던 진한은 급격히 부끄럼을 탔고 민영도 그랬다. 진한이 말을 이어갔다.
“난 사실 집에서 가장이야.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와 동생을 챙겨야 하거든.”
“아.”
“여유가 없어. 연애도 사치지.”
“음.”
“챙겨야 할 장애인 큰아버지도 계시고. 좀 많이 복잡하지?”
“그랬구나.”
“지금도 실감이 잘 안 돼. 이게 사귀는 건지.”
민영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진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진한은 그런 민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도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에 용기 내어 민영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민영은 강아지 눈을 한 채로 진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민영은 진한의 뒤쪽으로 가서 팔을 쭉 벌려 안아주었다. 20cm 정도의 키 차이가 나는 민영이 진한의 넓은 등을 안아주니 진한은 갑자기 울컥했다. 그녀의 볼이 등에 닿을 때면 진한에겐 깊은 위로가 전해졌다.
“너무 애쓰지 마.”
“···.”
“너 아직 스무 살이잖아.”
“···.”
“이제껏 잘해왔을 거고, 잘하고 있어.”
“흠. 아니지. 이제 스물하나야. 1월 1일이거든.”
“정말. 못 살아.”
“내가 좀 낭만이 없지?”
민영이 진한의 등에서 손을 놓고 진한의 옆으로 왔다. 그때였다. 진한은 민영을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
“아니, 난 네가 너무 기특해서.”
민영은 진한의 품속에 폭 파묻혔다. 매사에 정확한 그의 체온, 36.5도가 아닌 것 같았다. 아주 따뜻했다. 열린 점퍼 사이로 파묻힌 민영을 진한은 더 깊숙한 곳에 파묻어 버렸다. 둘은 1월 새벽 한파에도 아주 포근하고 따뜻한 밤의 시간을 보냈다.
우빈은 새해, 1월 초에 입대했다. 여행을 다녀온 후 갑자기 군대에 간다고 말한 우빈에게 정우는 섭섭했다. 그리고 날씨 탓인지, 우빈의 빈자리 탓인지, 진한의 연애 탓인지 정우는 종종 쓸쓸함에 빠졌다.
정우는 우빈이 100일 휴가를 나왔을 때 아이가 입원하는 바람에 보지 못했다. 이후 휴가 때도 번번이 엇갈렸다. 시간은 잘도 흘러 2년이란 시간도 쏜살같이 지나버렸다.
어느 날, 우빈이 정우에게 전화했다.
“형!”
“누구지?”
“뭐야? 내 목소리 잊은 거야?”
“장난친 거야. 언제 제대야?”
“곧 하지.”
“벌써? 빠르네.”
“빠르긴. 여기서는 하루가 일 년 같아.”
“그런가? 군대를 안 가 봐서.”
“진한인 자주 봐?”
“아니, ROTC라 자주 볼 줄 알았는데, 연애하느라 바쁘지 뭐.”
“걔네 제법 오래가네.”
“그러게.”
“나가면 술 한잔해야지?”
“형님이 요즘 바빠요. 군바리 모아서 마셔.”
“말년휴가 안 쓰고 복학하는 건데 이러기야?”
“형님이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서.”
“어디에 신경 쓰는데? 뭔데?”
“많이 알면 다쳐.”
“뭐야? 엇, 혹시 여자?”
“끊는다. 제대하면 전화해.”
정우는 휴대폰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정우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