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포스 무접점 키보드 30g
키보드에 관심이 생긴 계기는 명상을 하며 글쓰기를 시작하면서다. 명상을 하고 글을 쓰면 주변의 소리와 잡생각에 묻혀 있던 내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손이 저절로 움직이며 쓰이는 경험이 매일 계속되니 글 쓰는 재미가 있었다. 잉크에 묻혀 종이에 실제로 쓰인 내 생각들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정리가 되고 생각 디톡스가 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6개월 넘게 명상 글쓰기를 매일 하다 보니,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에 키보드 타건 ASMR이 뜨기 시작했다. 유리알 소리 키보드, 초콜릿 부러트리는 소리 또는 타건감 비교, 무접점 키보드라는 영상 제목들 같이 생소한 단어를 처음 접할 때 이런 세상도 있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키보드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게 됐고 작가들이 쓰는 키보드로 유명한 리얼포스의 30g 무접점 키보드라는 제목의 영상을 만나게 됐다. 지금까지 내가 썼던 키보드는 항상 노트북에 있는 것을 쓰거나 남편이 사용하는 게임용 키보드를 가끔 워드 작업을 위해 만져본 게 전부이다. 그런데 40만 원이나 하는 키보드라니, 나에게는 너무나 비싼 키보드였지만 키보드 세계에선 100만 원이 훌쩍 넘는 커스텀 키보드라는 것도 있으니 누군가에겐 보통 가격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진지하게 작가의 길을 걷고 싶다는 결심을 하며 매일 글을 쓰는 나의 손목과 영감을 위해 40만 원 정도는 좋은 투자가 아닐까 하며 한 달 동안 설득했다. 내가 사는 상파울루에는 리얼포스 키보드를 파는 곳이 없어 지인을 통해 한국에서 지구 반대편까지 이 비싼 키보드를 건네받았다. 키보드를 받아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오는 그 길이 얼마나 설레었는지 모르겠다. 이게 바로 취향이 주는 즐거움인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포장을 뜯고 ASMR로 듣던 ‘또각, 또각’ 소리를 들으며 가벼운 타건감을 느낄 때마다 당장 열 바닥의 글을 쓰고 싶었지만 내가 반복해서 친 건 ‘우와. 뭐냐 이 타건감? 좋다, 좋다 우와와와와와왕와’ 였다.
처음엔 모든 곳의 타건 소리가 같게 느껴졌는데 여러 번 누르다 보니 스페이스바와 백스페이스, 엔터 등 각 자리가 가지고 있는 소리가 다 달랐다. 그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는 스페이스바 소리다. 나에게는 가장 초콜릿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렇게 누르는 곳마다 소리가 다르니 키보드를 쓰는 재미가 있다. 장인은 도구를 따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좋은 도구를 쓰면 즐거운 영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키보드를 구매한 목적은 작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지만 영상 번역 일을 하며 내 손목 건강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기도 하다. 10 분 짜리 영상에는 약 150개의 자막이 있다 1 시간 짜리 영상이라면 800개가 넘는 자막을 번역해야 한다. 글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키보드는 내 건강과 정신을 위해서라도 좋은 투자라고 이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마무리하며….
혹시라도 키보드에 관심이 생겨 공부의 목적이든 취향의 목적이든 구매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처음부터 좋은 것을 사는 것이 돈을 아끼는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정말이다. ‘OOO 제품의 저렴이 버전’이라는 단어에는 함정이 숨겨 있다고 생각한다. ‘저렴이’라는 마케팅 단어와 갖고 싶다는 조급함을 자극시켜 우리를 유혹하지만 사실, 좋은 제품과 저렴이 버전 제품은 다른 제품이다. 결국엔 처음부터 다시 돈을 모아 OOO제품을 사는 우리 모습을 보게 될 확률이 굉장히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