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걷고 싶었다
그린델발트 첫 일정으로 피르스트에 가기로 했다. 곤돌라를 타고 올랐다. 어딜 봐도 아름다워 지루할 틈이 없었다. 녹색 풀밭 위에 나무들이 한 아름씩 무리 지어 있었다. 이어서 쭉쭉 뻗은 침엽수림이 보였다. 마운틴 카트와 트로티 바이크를 타고 미끄러지듯 산을 내려가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중간에 내릴 수 있는 Bort 역에는 근사한 놀이터가 있었다. 세계 최고의 뷰를 자랑하는 놀이터일 것이다.
곧 피르스트에 도착했다. 뷰 포인트에 올라가니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팻말이 붙어있었고,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지 않은 나는 한국 드라마 홍보 현장이 신기했다. 아니 한국 드라마 덕분에 관광지가 홍보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트레킹 코스에 도전하기로 했다. 40분 거리에 있는 바흐알프제 호수를 다녀오면 된다. 형제는 별 호응이 없었지만 그건 예상했던 바이고, 알프스까지 왔으니 하이킹을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
출발한 지 15분이 되지 않아 형제는 내려가자고 했다. 완주하면 조금 전 구경했던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했다. 그래도 형제는 여전히 걷기를 싫어했다. 마침 점심시간도 가까워져, 도시락으로 싸 온 샌드위치와 체리를 내밀었다. 남편은 그걸 벌써 내놓으면 어떻게 하냐고 했지만 못 들은 척했다.
한참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자마자 심심해 1호가 “제발” 내려가자고 했다. 2호는 아빠 등에 업혔다. 남편이 힘들어 보일 때 나도 잠시 2호를 업었다. 아이를 등에 업은 순간부터 그 좋은 풍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포기할까 생각이 들었을 때, 멀지 않은 곳에 눈이 쌓인 땅이 보였다. 올 1월 사하라 사막 남쪽에서 더운 모래바람을 맞았던 형제는 무슨 힘이 생겼는지 전속력으로 달려가서 눈을 밟고 놀았다. 남편이 말했다.
“힘들어서 내려가자는 게 아니라 지루해서 그러는 거야.”
덕분에 다시 알프스에 내 오감을 열 수 있었다. 냉동실 문이 열린 것처럼 이따금 냉기가 운무와 함께 우리를 찾아오는가 하면, 또 한순간 해가 구름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따뜻한 공기가 주변을 감쌌다. 우리는 겉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아래쪽에서 쨍그렁 댕그렁 방울 소리가 울려왔다. 산 아래에 소들이 방울을 달고 있는 모양이다.
시시각각 풍경이 바뀌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펼쳐졌다. 비행기를 탄 것도 아닌데 구름이 내 눈높이에 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산 아래쪽에는 키 큰 나무들이 많았지만 내가 걷는 높은 곳에는 나무 한 그루 없이 앉은뱅이 풀만이 바닥에 붙어 자라고 있었다. 지루하지 않게 노랑, 보라색 들꽃이 피어 있었고 가끔 민들레도 보였다. 그제야 나는 이번 여행에서는 숲 속을 걷지 못할 거란 걸 깨달았다. 아무렴 어떠리. 나는 행복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그린델발트 마을은 모형 같았다. 단순한 형태의 낮은 집들이 자연과 잘 어울렸다. 평화로웠다. 이런 걸 목가적이라고 하는 거구나 싶었다.
눈 밟기 놀이에도 익숙해진 형제는 더는 못 걷겠다고 폭동을 일으킬 기세였다. 돌아가야 하나? 그래도 걸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반대편에서 오는 한 관광객에게 호수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물었더니, 10분이라고 했다. 그 말에 심심해 1호는 “아싸!”를 외치더니 날듯이 뛰었고 우리는 곧 호수에 도착했다. 우리가 해냈다! 특히 심심해 1호의 성장이 눈부시다. 힘들다 하면서도 제 힘으로 하이킹을 해냈다.
여행 책자 속 풍경과는 달랐지만 흐린 날씨에도 바흐알프제는 아름다웠다. 둥그렇게 눈 무늬가 박힌 산을 보니 이상한 나라의 젖소 등짝이 이럴까 싶었다. 사진을 마음껏 찍고 쉬었다. 형제가 호수에 돌을 100개 정도 던지고 난 후 우리는 하산을 시작했다. 호숫가에서 그렇게 잘 놀던 심심해 2호는 더 이상의 보행을 거부했고 아빠에게 내내 업혀서 갔다. 남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을 때 내가 2호를 받아 업었는데, 얼마 걷지 않아 남편에게 다시 반납할지 고민이 되었다. 거의 막바지까지 왔을 때 2호가 잠이 들었기에, 아이가 땅에 떨어질까 걱정된다며 은근슬쩍 남편에게 다시 넘겼다.
12시경 출발했는데 오후 3시가 넘어 돌아왔다. 내려가는 곤돌라에서 형제는 말 한마디 없었다. 풍경에 집중하는 건가 했다. Bort 역에 내려 놀이터에서 놀자는 아빠의 제안에 형제는 극구 사양했다.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그래, 하이킹은 다시는 하지 말자.
형제는 보상으로 새총과 자동차 장난감을 얻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차를 잘못 갈아타는 바람에 출발지인 피르스트 역으로 되돌아오는 해프닝이 있었다. 피곤할 텐데 성격 좋은 우리 가족은 짜증 한 번을 내지 않았다. 샌드위치가 입에 맞지 않아 점심을 거르다시피 한 형제는 저녁으로 나온 소고기 토마토 파스타를 말끔하게 다 비웠다.
자기 전 심심해 2호에게 하루 소감을 유도신문했다. “오늘 산에 올라가서 본 풍경 멋지지 않았어?” 2호의 “안 멋졌어.”라는 답변에 머쓱했다. 오늘 본 풍경을 조용히 머릿속에 그렸다. 가장 뒤에 스크래치가 난 설산, 그 앞에 초록 돌산, 그 아래 계곡의 숲과 집들, 그리고 그 사이를 자유롭게 미끄러져 지나가는 구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