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고행 사이
사실 스물한 살 때 여길 왔었다. 그런데 무슨 저주에라도 걸린 건지 기억이 통째로 날아갔다.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이번에는 눈을 부릅뜨고 정신을 똑바로 챙기리라, 환갑에도 칠순에도 똑똑히 기억하리라 마음먹었다.
9시 30분에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곤돌라 탑승 시각까지 한 시간이나 남아 기념품 가게에서 시간을 때웠다. 남편은 브레이틀링 시계에 관심이 많았다. 하나 사라는 나의 말을 그는 믿지 않았다. 진심이라고 하니 나를 한 대 칠 것 같았다.ㅋㅋㅋ 우리 중 심심해 2호만 선글라스가 없어서 하나 사주려고 몇 개를 써보게 했다. 2호는 호불호가 뚜렷한 편이다. 써보는 족족 들은 답은 “불편해” 혹은 써보기도 전에 “안 멋있어”. 마음에 드는 것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 울음을 으앙 터뜨렸다.
곤돌라를 타면서 예약 시간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다. 아무도 표를 확인하지 않았다. 한 시간을 버린 것을 아까워하며 아이거글래처 역에서 기차로 환승했다. 굴 속을 지나가는 기차였다. 어느 자본가가 20세기 초에 알프스 산 꼭대기까지 구멍을 내겠다는 구상을 했고,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굴을 뚫었다. 10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건재하고 관광객은 넘쳐난다. 지독하고도 탁월한 자본가다.
융프라우요흐에 도착했고 전망대에 올랐다. 남편이 외쳤다.
“어떻게 이걸 기억을 못 할 수가 있어?”
관광객들로 혼잡한 가운데 인간을 넘어서는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심심해 형제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추우니 어서 들어가자고 했다.) 한쪽에는 융프라우요흐와 다른 봉우리들과 얼음 계곡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구름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내 시야 위로는 구름 한 점 없었다. 생명체가 없을 것 같은 곳에 검은 새 몇 마리가 전망대 난간에 앉아있었다. 둥지는 어디에 있을까?
구경을 마치고 붐비는 식당에서 빈자리를 찾아 컵라면 세 개와 도시락으로 싸 온 볶음밥을 펼쳤다. 2호는 입맛이 없는지 누워버렸다. 고산병인가. 얼른 먹고 내려가야겠다 생각하는 사이에 슬로 모션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편의 팔에 걸린 컵라면 하나가 엎어져 1호의 오른쪽 허벅지에 쏟아져 내렸다. 1호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으아악! 뜨거워! 아아악! 아빠 싫어!”
혼잡한 식당이 순간 조용해지고 우리는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다행히 화상의 징후는 없었다. 1호는 맹렬히 울었다. 누군가가 국물을 닦아내라고 행주를 건네주었고, 옆에 앉은 백인 할아버지는 초콜릿 과자를 내밀었다. 본인이 자식 넷을 키웠는데 이럴 때는 주의를 분산시켜야 한다며. 효과는 없었지만 따뜻한 도움에 감사했다.
이 또한 지나갔다. 울음을 그친 1호는 라면을 먹기 시작했고 식당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니 몹시 배가 고파져서 볶음밥을 양껏 먹었다. 다 먹고 나니 살 것 같았다… 가 아니라 본격적인 고산병 증상이 오기 시작했다. 가슴이 뛰고 머리는 쥐어짜는 듯 아프고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 앞에 말없이 누워있는 2호가 혹시 이 정도로 괴로운 건가? 서둘러서 13:47 출발하는 기차를 탔고 나는 바로 잠이 들었다. 내려오는 곤돌라에서 정신이 돌아왔다. 가느다란 계곡 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음이 얼었다 녹았다 하며 땅을 갈라놓아 그 틈으로 물이 흐르는 것이려니 싶었다. 인간이 수로를 만든다면 적당한 직선이겠지만 자연이 만든 물길은 혈관 마냥 섬세했다.
곤돌라에서 2호는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에 숙소를 나올 때는 융프라우 관광 후 멘리헨에 가볼까, 어제 못 간 Bort 놀이터를 다시 갈까 이 궁리 저 궁리했는데 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저녁거리를 사서 얼른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 밤에야 2호는 입을 열었다. 오늘 산에 올라갔을 때 춥고 머리 아프고 졸렸다고. 그래도 어제의 하이킹보다는 나았다고. 아이들 입장에서는 여행이 아니라 고행이구나. 내가 옛날 기억을 지워버린 것은 고행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