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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66호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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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편집위원회 Feb 24. 2024

집을 찾는 수다회

수습편집위원 아자, 편집위원 야부, 루

일시 : 2022년 7월 21일

장소 : 연세대학교 외솔관 문우방

참석 : 단, 유연, 포슬, 루, 검은, 아자, 야부, H


상영작 : 나의 집은 어디인가 (요나스 포헤르 라스무센, 2021)

  1984년, 아프가니스탄 카불. 원피스를 입고 동네를 활보하며, 장 클로드 반담에 푹 빠져 있는 한 소년, 아민이 있었다. 하지만 내전이 발발하며, 아민을 비롯한 가족들의 ‘집’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민은 두 차례의 밀항 시도 끝에 덴마크에 다다르지만, 브로커가 쥐어준 거짓된 각본으로 살아가기에 지쳐만 간다.

영화는 이 시점에서 시작한다. 마치 심리상담을 하듯, 집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물어온 친구에게 아민은 “어디로 이동하지 않고, 머물러도 된다는 느낌”이라 답한다.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아민은 차마 되짚어 보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꺼내놓는다. 과연 아민의 ‘집’은 어디에 있을까?


* 해당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꼭 영화를 먼저 감상하고 글을 읽어주세요. 영화는 현재(2022년 8월 기준) 왓챠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선(善)의 평범성


단         영화에 힘겨운 사건들이 많이 나오지만 생각해보면 따스한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러시아에서 국경까지 걸어가는 장면에서 특히 그랬어요.

유연      아, 맞아요.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단         일반적인 재난영화에서는 사람들이 자기만 살겠다고 이기적으로 굴고, 심지어.서로 죽이려 들기까지 하는 장면이 자주 묘사되잖아요. 그런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각자도생하지 않고 서로 돕고 의지하며 함께 삶을 지탱해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실제로 사람들은 인간다움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싶었어요.

유연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게, 그 장면(아민과 가족들이 러시아에서 국경까지 걸어가는 장면)에서 아민이 그날 밤 절대 잊히지 않는 사건이 둘 있었다고 했잖아요. 저는 그 두 사건이 끔찍할 것이라고 예상했단 말이에요. 근데 알고 보니 하나는 한 할머니께서 지쳐 쓰러지셔서 다같이 그 할머니를 이고 간 일, 나머지 하나는 동행하던 사람이 한 아이의 불빛 나는 신발로 밀출국 행렬을 들킬 수도 있다며 아이를 위협하자, 주인공의 형이 (신발에서 불빛이 나지 않도록) 아이를 목마 태워 다시 걸어간 일이었던 거예요. 둘 다 마음이 너무 따뜻해지는 사건들이죠. 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흔히 픽션에서는 극한 상황에 몰렸을 때 인간의 본연적 악이 드러난다고 묘사하지만, 오히려 실제로는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포슬      예컨대 어떤 봉쇄된 도시가 있다고 해요. 그 안에서 사람들이 한정된 자원을 독차지하기 위해 욕심 부리고 서로 싸울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이와 관련해서 〈사마에게〉라는 다큐멘터리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루         앗, 저도 그거 봤어요. 너무 좋았어요.

포슬      맞아요. 좋아요. 시리아 내전으로 알레포가 봉쇄된 후 그 안에 남게 된 사람들 이야기거든요. 식량도 부족하고, 매일 폭격이 쏟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진짜 극한의 상황이죠. 그런데 감독의 남편이자 ‘사마’의 아빠인 한 의사가, 알레포의 폐건물에 임시로 병원을 세워 폭격으로 다친 사람들을 하나하나 치료해줘요.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버스를 색칠할 수 있게 하는 등 나름의 즐거움을 함께 찾아가고요. 이런 식으로 이 다큐에는 전쟁 속에서도 사람들이 계속해서 서로 돌봐주는 모습이 많이 나와요. 일반적으로는 재난 상황이 닥치면 무언가를 독점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내러티브가 흔하잖아요. 그런데 이 두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서로 나누고 의지하는 과정에서 진짜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비물질적인 자원이 생산된단 걸 느꼈어요.

2019. 사마에게(원제: For Sama). PBS 프런트라인, 채널 4 뉴스, ITN 프로덕션.



각본 너머의 삶


루         아민이 브로커가 준 각본대로 공항에서 위증을 할 때, 이 각본은 사실이 아니고 실제 가족들은 다 살아있다는 걸 아는 데도 계속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하잖아요. 왜 그랬을까요?

야부      가족이 모두 한순간에 죽고 혼자 남겨지는 그 각본이 충분히 자신의 현실이 될 수 있었고, 또 함께 골목을 뛰어다니거나 배구를 하며 놀던 어떤 친구들에게는 그게 지금 진짜 현실일 거라는 사실을 문득 체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를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지금 이 곳에 다다랐다는 것을 확 실감한 거죠. 그래서 그렇게 엉엉 울지 않았을까요.

아자      가족이 모두 살아남은 건 맞지만, 아민 입장에서는 사실 죽은 것과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까 싶었어요. 가족 모두가 완전한 안전이 확보되는 곳에서 다 함께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 간간히 서로의 소식만 주고 받을 수 있잖아요. 설령 나중에 가족이 모두 함께 살 수 있게 되어도, 이제 와서 사람들에게 가족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기도 쉽지 않을 테고요. 또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서 가족과 연락이 끊기기라도 하면 이제 평생 가족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채 살게 될 수도 있잖아요. 그때의 아민도 이런 수많은 생각에 비참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검은      맞아요. 그리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에 눈물이 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자기 입으로 가족이 죽었다고 말한 순간부터, 그 거짓말이 그림자처럼 계속 따라오게 될 거잖아요. 언어는 힘을 가지니까요. 그와 관련해서 연출이 정말 인상적이었던게, 아민이 공항에서 각본대로 말을 하고 난 직후, 수첩에 다리어로 자신이 했던 말들을 다 적어뒀다고 했잖아요. 그때 적었던 글자들이 살아나 아민을 구성하는 연출이 있었어요. 진실이 아닌 이야기가 진실과 다름없는 무게를 가지면서 앞으로 아민의 모습을 만들어간다는 걸 보여준 것 같아서 너무 슬프고 기억에 남았어요.

포슬      사회학에서 각본이라는 말을 쓸 때가 있잖아요. 사회가 곧 무대라는 메타포를 쓸 때요. 그렇게 각각의 개인이 사회라는 무대의 배우라고 했을 때, 각본은 사회라는 무대가 요구하는 규범이죠.사회가 요구하는 규범, 즉 각본에 맞춰서 자신을 어떻게 적절히 상연하는가가 개개인의 과제고요. 저는 이 영화에서도 그 각본이라는 말이 쓰인 게 인상적이었어요. 아민의 각본은 난민이라는 역할로서의 각본이 되겠죠. 사회에서 요구하는, 그러니까 엄청난 고난을 겪었고 너무나도 불쌍한, 그런 난민의 각본이 있고, 그 각본에 자신의 서사를 끼워맞춰야만 난민으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상황인 거죠. 그런데 아민이 그 각본을 이야기하면서 요구되는 어떤 슬픔이 있었을 것 같아요. 아민은 계속 스스로를 억압하고 속이는 동시에 다른 이들을 의심하고 경계해야 했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놓고 울 수조차 없었을 거예요. 그런 긴장상태와는 달리 각본을 말하던 그 순간에는 지금껏 반추할 수 없었던, 쌓여온 감정들을 갑자기 표현해야만 했겠죠. 그래서 그때 지금까지 쏟아내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다 터져버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표출한 감정은 이 다큐멘터리를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내면서 느낀 슬픔과는 다를 거예요. 진짜 자신의 서사를 어렸을 때부터 쭉 되짚어가면서, ‘이때 내가 이만큼 힘들었고 이런 걸 느꼈구나’를 찬찬히 떠올리는 과정에서 나오는 눈물과 자신에게 요구되는 각본에 따라 ‘잘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만큼은 내가 슬퍼해야겠네’라고 생각해서 터져나온 눈물은 너무 다른 것 같아요.

포슬      거기 말고도 국제경찰들이 와서 난민들의 무릎을 꿇리고 난민 수용소로 끌고 가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그 장면처럼 아민에게 흐릿하게만 남아있는 기억들은 시각적으로도 되게 모호하게, 흑백으로만 그려지더라고요. 삶의 조각조각들, 말로는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 잔상 같은 것들은 카메라 푸티지로 전달되었고요. 좀 이어지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아민이 이야기를 꺼내놓으면서 ‘이 부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이 부분은 기억이 잘 나고, 이건 이제 기억이 없고…’ 이런 말들을 덧붙이잖아요. 초반에 ‘나 이제 다리어 못 읽는데.’라고 민망해하는 장면 같은 거요. 그렇게 중간 중간에 기억이 모호하다고 언급되는 것들은 실제로 아민에게 너무나 무섭고 큰 상처라서, 방어작용으로 그런 망각이 이루어진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사람이 너무 큰 아픔을 겪으면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이 오히려 흐려지기도 하니까요. ‘엄마, 아빠는 전부 죽었고, 누나는 납치당했고...’ 라는 거짓에 상처 받고, 그걸 고향의 언어인 다리어로 적혀두었는데, 지금의 아민은 그걸 잘 읽을 수가 없고… 그런데 이제는 읽을 수조차 없는 그 내용에 기반해서 현재 삶이 완전히 재구성된 거고... 이 거짓된 각본으로 구성된 삶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어서 옛날 애인에게 자신이 말해왔던 과거는 사실 꾸며낸 이야기라면서 겨우 진실을 털어놓기도 했는데, 사이가 나빠지자 ‘내가 너 경찰한테 고발할 거다’ 이런 식으로 도리어 협박을 받기도 하고...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기억들을 직접 선별하잖아요. 그런데 아민의 경우에는, 진짜 기억은 너무 아파서 잊어버렸거나 흐려졌고, 오히려 가짜 기억들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는 것, 그리고 그 기억들이 난민으로서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팠어요.



마주침의 격차


루         포슬님이 방금 말씀해주신 그 장면 전에도 중요한 장면이 있었는데요. 아민이 밀입국을 하려고 작은 배에 탔는데 폭풍이 몰아쳐서 한참을 표류하게 되고, 그러다가 외국 유람선을 만나는 장면, 그것도 다들 인상적으로 보셨을 것 같아요. 

2021. 나의 집은 어디인가(원제: Flee). 네온, 파티시펀트, 커존 아티미셜 아이

H         그때의 유람선은 아민이 탄 작은 배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게 그려지는데, 여기에서 두 집단 간의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어요. 그 높다란 유람선에 탄 사람들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카메라를 드는 행위에서도요. 카메라는 어떤 대상을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렌즈를 거쳐서 간접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물건이잖아요. 난민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카메라를 거쳐 그들을 바라본다는 데서, 유람선 위 사람들이 얼마나 아무 문제의식 없이 타인의 불행한 삶을 관조하는지가 전해져서... 스스로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되더라고요.

루         아민과 가족들은 다른 난민들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배에 그저 말없이 서있기만 했죠. 그리고 그때를 굉장히 모욕적이고 부끄러웠던 순간으로 회상하잖아요. 그 장면이 정말 참담하더라고요. 앞에서 이야기 나눈 것처럼 이 영화에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이 뒤처지는 이들을 기다리고 도와주는, 굉장히 따뜻한 부분들도 많죠. 그런데 사실 그건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끼리 연대한 것이잖아요. 반면 그 노르웨이 유람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눈앞의 난민들이 처한 상황을 전혀 경험해보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런 경험에 처하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겠죠. 대부분은 아예 관심도 없었을 거예요. 물론 그들도 난민을 바로 눈앞에 마주친 순간 굉장히 놀랐을 거예요. 아무도 참담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런데도 그들은 그 순간 자신들을 향해 절박하게 소리치는 난민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거나 주지 못하는 채 그저 사진만 찍잖아요. 상황적 격차가 정말 크게 와닿았어요. 난민의 이주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어떠한 만남이 일어나잖아요. 그런데 저도 ‘난민들이 들어오면 당연히 받아줘야지’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만 생각하고, 실제로 우리가 서로 마주치는 장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상상을 못했던 것 같아요.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서 쫓겨나 생존을 위해 다른 나라에 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하는 상황이 난민들에게는 모욕적이고 부끄러울 수 있는 일일 텐데 그들이 느끼는 이 당연한 감정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보지 못했고요. 그 장면에서의 사람들도 그런 고민의 과정 없이 갑자기 서로를 대면한 거겠죠? 그때 너무나 극명하게 보이는 격차,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그 두 가지가 참 무력하게 느껴지더라고요. 

포슬      저도 그 장면이 참 충격적이었어요. 그 장면에서 작은 배에 탄 난민들이 손을 흔들면서 ‘우리 여기 있어요’ 하고 소리치다가 바다에 뛰어들기 시작하잖아요. ‘당신들의 연민이 없으면 나는 이 바다에 빠져서 죽고야 말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굉장히 과격한 표출이 있어야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품위의 격차가 느껴졌어요. 사람은 지키고 싶은 일정 수준의 품위라는 게 있잖아요. 근데 그 ‘품위’라는 것을 기꺼이 버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난민들, 반면에 그런 사람들과 마주하는 순간에도 품위에 손상을 입을 필요가 전혀 없는 사람들… 품위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난민이라는 타인의 고통은 쉽게 외면해도 되고, 아니, 외면해야 하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많은 생각을 들게 했어요. 난민 문제가 아니어도 상대와 나의 조건적 격차가 극명히 느껴지는 마주침의 상황은 생각보다 쉽게 찾아오잖아요. 그때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은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도움이 필요한 타인이 자기 세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요. 저는 그 ‘잊어버림’이 너무 마음에 걸렸어요. 존재가 망각이라는 위치로 밀려나는 것이…

아자      경찰이 오고 나서 유람선의 승객들은 다시 여가를 즐기러 갔겠죠. 반면 밀항선에 타 있던 사람들은 수용소로 가서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겪게 되고요. 이런 대조적 상황에서 누군가의 생명과 존엄이라는 중요한 문제가 유흥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문제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품위에 관해 말씀해주신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유연      ‘내가 만약에 그 유람선에 있었다면 뭔가 할 수 있었을까’를 고민해보면, 저도 무력감이 드는 것 같아요. ‘내가 만약에 그 배에 탄 사람이었다면, 이들을 전부 태우고 가자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을 태운다고 해도, 그 후에는 어디로 어떻게 데려다 줘야 되지? 어떻게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내가 이들을 책임져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더라고요. 결국 선장은 국제 경찰을 부르는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했죠. 그렇게 경찰이 난민들을 실어 가고 나면 승객들도 마음을 불편하게 한 그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으니 더 이상 자기 책임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거고요. 아까 말씀해 주신 것처럼,  난민들은 부끄러운 모습까지 보여가며 자신의 생존을 호소해야 하는데, 그때 누가 이 상황을 책임져야 하는지 혼란스럽더라고요.

포슬      이 영화를 보며 또 스스로의 위치가 체감된 순간이 있어요. 누나들이 밀입국하는 에피소드요. 컨테이너 박스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데, 사방에 다른 컨테이너 박스가 있어서 모두 꼼짝달싹 못하고, 그렇게 갇힌 채로 밀입국이 이루어지잖아요. 브로커 입장에서는 밀입국을 시키긴 한 거니까 자기는 할 말 없다고 하겠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 비인간적이었잖아요.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에피소드를 보는 순간에도 저는 ‘그래서 누나들은 죽었어, 살았어?’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럼 결국 누나들이 죽은 건 아니네. 다행이다.’ 이런 생각도 하고요. 사실 전혀 다행인 게 아닌데도요. 누나들에게는 도착해서 만난 오빠한테조차 아무 말 못하고 계속 울기만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말이에요. 난민의 서사에서, 그 과정이 어쨌든 간에 여정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그래서 죽었어, 살았어?’라는 것이 너무 놀라웠어요.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싶고요. 그런 극한 상황을 겪은 사람에게도 죽었는지 살았는지의 잣대를 들이밀며 연민 받을 만한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는 게, 전혀 다행인 일이 아닌데도 감히 다행이라고 얘기하게 된다는 게, 제가 그의 이야기를 관망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증거 같았어요. 그게 너무 불안하고 무력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교차되는 정체성


포슬      저는 아민이 가족들에게 커밍아웃 하던 장면도 기억에 많이 남아요.

루         저도 그 부분 제일 좋아해요.

포슬      너무 따숩잖아요. 커밍아웃 했더니 돈 주면서 게이클럽에서 신나게 놀다 오래.

유연      솔직히 형이 ‘네가 여자를 몰라서 그래’ 하면서 성매매 업소에 데려갈 줄 알았어요.

야부      그니까, 그니까.

루         저도 영화를 처음 볼 때는 그랬어요. 오늘도 그 장면에서 다들 긴장하시더라고요. 근데 생각해보면 그 가족이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이 워낙 파란만장하다 보니 가족 구성원 중 누가 동성을 좋아한다는 사실 정도는 뭐 별 거 아닐 수 있겠다 싶었어요.

단         살아있는데 뭐.

루         맞아요. 살아있으면 됐지. 건강하면 됐지. 딱 그거 아닐까. 그리고 저는 형이 그 즈음 괜히 여자친구 있냐고 자꾸 물어보던 것도, 아민에 대해서 이미 눈치 챘지만 부정하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었어요. 형은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고, 그럼에도 동성애자들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거고, 그러니까 막연히 불안했던 거죠. 그래서 아민의 성 지향성을 이미 눈치 챘는데도 괜히, ‘그래도 아민이 이성애자였으면 좋겠다’ 하는 기대를 놓지 못하고 아민의 정상성을 확인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불안감을 안고 있으면서도, 실제 커밍아웃의 상황이 왔을 때는 아민에게 좋은 대답을 해줘야 겠다는 생각에 오래 고민해왔다는 게 느껴지는… 그런 대처를 보여줬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아자      아민의 고향에는 원래 동성애를 뜻하는 단어가 따로 없었다잖아요. 그런 데서 나고 자란 가족들 입장에서 더욱 동성애자가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저도 그 장면에서 아민의 커밍아웃 때문에 힘든 세월을 함께 겪어온 가족이 일순간 붕괴될 거라 예상했고요.

유연      저도요.

아자      지금까지 아민에게는 가족만이 유일한 기둥이었는데 이제 그 가족마저 사라지면 아민이 어떤 걸 붙잡고 살아야 할까 하면서 걱정이 됐어요.

검은      저는 그 장면도 기억에 남아요. 아민이 동성애를 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동시에 약물로 치료가 가능할 거라고도 믿었다는 말을 하잖아요. 그때 아민은 가족을 실망시키지 않는 것을 자신의 성지향성보다 우선시한 게 아닐까 싶어요. 우리 모두가 걱정했던 것처럼 본인이 커밍아웃하는 순간 가족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던 거죠. 하지만 결국 아민은 두 가지 다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아민에게도 전쟁이라는 손쓸 수 없이 거대한 사회적 상황과는 별개로 성 지향성과 관련된 사소하고 사적인 취향들이 있었잖아요. 어린 시절 벽에 붙여놓았던 장 클로드 반담 포스터 같은 거요. 전쟁 상황을 계속 함께 해 온 가족도 물론 자신에게 큰 의미지만, 그런 개인적 취향들이 아민 스스로가 ‘난민’이라는 집합적 정체성에 매몰되지 않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굳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포슬      이건 섹슈얼리티에 대한 얘기는 아니지만, 아민에게 금목걸이를 준 형 에피소드에서요, 그 형과 함께 망명하면서 있었던 일이나 당시에 자신이 느낀 감정은 상세히 기억하고 있으면서 정작 그 형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 하잖아요. 아민은 그 형을 이름을 통해서가 아니라 금목걸이라는 물건을 매개로 기억하고 있구나 싶더라고요. 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아민에게 아빠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걸 감각할 수 있었던 수단이 아빠의 유품인 손목 시계였던 것 같거든요. 그 손목시계를 러시아 경찰에게 빼앗기던 순간이 아마 아민에게는 아버지를 진짜 잃어버린 순간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민과 그 형이 트럭 짐칸에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할 때 형의 손에 자신의 손을 슬쩍 갖다대지만 형이 다시 손을 떼는 장면도 생각나요. 잠깐 나온 장면이라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네요.

아자      기억나요.

포슬      그 거절의 기억이 아민에게 상처일 수도 있겠지만 첫사랑의 기억이기도 한데, 금목걸이라는 물건이 그 기억의 증거로 작용하다보니 그 순간이 잊히지 않고 계속 좋게 마음 속에 간직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손목시계나 형이 준 금목걸이 같은 여러 물건들이 관련된 기억을 간직할 수 있게 하는 매개이자, 그 기억이 진짜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증거가 되어, 이렇게 아민의 증언을 토대로 한 영화가 만들어 질 수 있게 한 거겠죠.



나의 집은 어디인가


루         집의 의미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고 싶어요. 각자가 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집이라 느끼는지 궁금해요. 많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 각자가 인식하는 그 ‘집’의 개념은 결코 같지 않을 것 같아요. 

아자      맞아요.

루         저부터 얘기해도 되나요? 저는 기숙사가 딸린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그때 친구들이 공부하기 싫고 힘들어서 말하는 ‘집에 가고 싶다’에서 ‘집’이 어디일까 싶더라고요.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 잠을 자는 기숙사, 아니면 원가족이 사는 공간, 이 중 어디를 집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어요. 저에게는 ‘집’이랄까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당시 가족과의 갈등이 심해서 본가를 집이라고 느끼지 못했고, 심지어 몸이 많이 아파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을 빙빙 맴돌거나 학교에 계속 붙어있곤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진짜 ‘집’을 찾은 것 같아요. 제가 선택한 파트너와 함께 살거든요. 이제는 집에 대해 가지는 권한들이 굉장히 다양하고 자유로워졌어요. 마음대로 꾸밀 수도 있고 마음대로 더럽힐 수도 있고. 사소해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부분들이 저한테는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져요. 지금의 집을 편안하게 느끼게 하는 데에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고요. 저는 집이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데에 있어서, 정말로 내 한몸을 누일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의 여부도 중요하지만, 같이 지낼 사람과 같이 지낼 공동체를 선택할 수 있는지,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지 같은 요소야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루         아민도 난민 생활을 하며 겪은 상실들을 계속 상처와 트라우마로 가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비교적 생활이 안정된 이후에도 계속 사람을 믿지 못하고요. 그런데도 중간에 ‘난 일, 공부, 남자가 있을 때 공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라고 언급한 것과는 달리 결국에는 자신을 믿어주는 파트너에게 마음을 연다는 점이 좋았어요. 아민이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데에도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해준 가족들에 대한 부채감이 크게 작용했는데, 그런 감정도 사실 이미 지나간 과거에서 비롯된 일이잖아요. 그런데 결국은 그런 과거의 것을 본인 안에서 잘 갈무리하고 현재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충분히 믿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된 거죠. 비록 아민은 오랜 시간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지만 결국은 몸을 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함께 하기로 선택한 사람이 있는 진짜 집을 찾았어요. 이렇게 극한 상황을 경험하고 많은 상처를 가진 사람도 결국 진짜 집을 찾았다는 이 점이 제가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에요.

검은     제게 온전한 ‘집’은 집 전체에서도 저에게 주어진 방 하나뿐이에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집에 누가 같이 있는 게 불편해요. 그래서 고등학교 다닐 때도 일부러 학교에 더 오래 남아있곤 했어요. 거기엔 공부를 계속 해야 된다는 압박감도 물론 있었지만 집에 항상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있고 그들이 내 공간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으면서 침범해 들어오는 게 싫어서… 그게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심지어 집이라고 느끼는 제 방 안에서도 외부에서 들려오는 가족 구성원, 특히 아빠의 행동과 말을 전부 차단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그런 침범들을 차단할 수 있는 곳, 외부로부터 온전히 보호 받을 수 있는 곳을 집이라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다들 ‘집’을 생각하면 공간적인 무언가를 떠올리잖아요.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공간, 내가 속할 수 있는 공간… 그런데 제가 느끼는 ‘집’의 감각들은 순간적이에요. 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걸 안 좋아해요. 그래서 평소에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이라 하더라도 문 밖이나 벽 너머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면 ‘내가 저들을 듣는 것처럼 저들도 나를 들을 수 있겠구나’라는 불안감이 생겨요. 저의 행동들이 누군가에게 목격 당할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굉장히 싫은 것 같아요. 심지어는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갈 때조차 누군가가 지켜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해지기도 해요. 이렇게 타인의 접촉이 없는 순간을 집이라고 느껴서 그런지 저는 더욱 어떤 공간에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기를 추구하는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집에 대한 조건이 충족되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많이 늘리는 거죠. 아민도 덴마크에 정착한 이후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남들에게 들킬까봐 항상 두려워하잖아요. 의도치 않은 때에 타인에게 자신이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목격 당할까봐 긴장하고요. 그런 부분은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아자      저한테는 회귀의 가능성이 중요한 것 같아요. ‘다른 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더라도 결국에는 돌고돌아 다시 집’ 같은 느낌으로… 계속 거기 있어왔고 언제라도 다시 되돌아갈 수 있다는 느낌이 필요해요. 그게 없으면 안정된 기분이 들지 않아요. 떠돌아다니는 것 같고.

유연      루님이 본연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곳, 나의 선택으로 채워나갈 수 있는 곳, 이게 진짜 집 같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저는 대학 기숙사에 들어와서 그런 걸 처음 겪었어요. 저는 내내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특히 아버지가 가정의 화목을 엄청 중시하시고 삶의 이유를 오로지 자식들에게서만 찾으시는 타입이에요.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화목함이 깨지지 않는 걸 너무 중시한 나머지, 많은 규칙들이 있어요. 항상 저녁식사는 가족이 함께 해야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늘 다같이 외식을 해야 해요. 누구 생일에는 꼭 고기 먹고 케이크 먹고 노래방에 가야 하고. 여름방학에는 꼭 가족여행을 가야 하고 거기서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앨범으로 만들어야 하고… 송도 기숙사에서 지내는 요즘도 저는 주말마다 본가에 가요. 단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은 주말이 없어요. 왜냐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에는 꼭 밥을 같이 먹어야 되거든요. 이렇게 20년을 살아 왔어요. 다행히 제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라 이거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았지만, 송도 기숙사라는 집은 확실히 뭔가 다른 느낌이더라고요. 저는 룸메이트랑 되게 잘 맞았거든요. 운이 좋았어요. 우연히 만난 관계인데도 오래 함께 한 것처럼 편안한 느낌도 들고요. 그렇게 저는 기숙사에 와서야 처음으로 저의 모든 시간을 자유롭게 꾸릴 수 있었던 거예요. 편안하게 느끼는 가족 외의 사람과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같이 사는 사람이 나한테 간섭하지 않고... 생각보다 ‘자유’가 집이라는 인식에 큰 부분을 차지하더라구요.



기억 위에서 삶은 계속된다


단         공항에서 아민이 애인과 다시 만나는 장면이 있잖아요. 저는 캐스퍼(아민의 애인)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두려웠어요. 저 사람이 갑자기 낯설고 그 둘의 관계가 영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어요. 다들 아민과 아민의 파트너가 서로 대화를 잘 끝내고 집에 간 장면을 감동적이라고 느끼신 것 같은데… 저는 아니더라고요.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는 이전의 시간을 온전히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과정이 아민에게는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자신의 과거를 이미 전부 알고 이해해주던 원가족과는 다르게, 새롭게 만나 형성되는 가족과는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납득하고서야 비로소 애인에게 마음을 열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2021. 나의 집은 어디인가(원제: Flee). 네온, 파티시펀트, 커존 아티미셜 아이

단         보통 사람들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을 더 잘 기억한다고 하잖아요. 큰 시련을 만났을 때, 다른 밝은 기억들이 그 슬픈 기억들에 압도되는 경우도 되게 많고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과거에는 부정적인 감정에 가려져 있던 즐거운 기억들이 새삼 귀중했다는 걸 깨닫는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렇게 울림을 주지 못한 기억이었을지라도 시간이 흘러 다시 생각해 봤을 때는 자신에게 힘을 주는 강력한 기억으로 새롭게 작용하는 거죠. 그래서 아민도 나중에 덴마크에 정착하고 나서 도망다니기만 했던 유년시절을 회상할 때, 무섭고 상처되던 순간 속에서도 그때 들었던 경쾌한 음악이나 가벼운 내용의 멕시코 드라마,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서로 도왔던 따뜻한 순간들이나 자신이 좋아했던 형과 같이 수많은 긍정적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되잖아요.

아자      치마 입고 동네를 뛰어다니거나 누나 머리를 땋아주면서 놀았던 기억도 있고요.

단         맞아요. 분명 아민에게는 부정적인 시간들이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시간들도 꽤 많았을 거란 말이죠. 그런 작은 행복의 순간들이 계속 남아 자기도 모른 채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었고, 그런 것들이 계속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자      아민은 새로 구한 집에 나있는 좁은 길을 보고 자신이 과거를 잊고 행복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기도 해요. 분명 아민은 자신의 삶을 열심히 꾸려나가면서도 문득문득 그 길을 보며 과거의 어두운 기억들이 막 떠오르겠죠. 그렇지만 아민은 그때마다 어떻게든 그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을 잘 승화시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앞으로의 미래도 지금까지와 같이 계속 암담하리라는 생각에 주저앉아버리지 않고요. 그래서 저는 아민이 파트너와 함께 새로운 집에서 살겠다고 결정한 그 순간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포슬      아까도 잠깐 언급한 다큐멘터리 〈사마에게〉 이야기를 또 하고 싶어요. 감독을 비롯해서, 알레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알레포라는 공간이 자신들의 집이기 때문에 이곳을 떠난다는 걸 감히 상상할 수 없어요. 그래서 알레포에 아무리 폭격이 내려도, 원래 살던 집이 형체조차 찾아볼 수가 없이 무너져도, 그냥 계속 알레포에 머물러요. 그 사람들이 알레포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기억 때문인 것 같아요. 그곳에서 있었던 많은 사건들에 대한 공동체 차원의 기억들이요. 그 좋은 기억들이 그 장소랑 관계가 없지 않잖아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어렸을 때 맡았던 냄새를 잠깐 다시 맡으면 갑자기 그 시절의 기억이 막 떠오르면서 향수에 젖는 경험들이 한 번씩은 있을 텐데요. 그거랑 비슷하게, 그들은 알레포라는 공간에 각인된 모든 기억과 감정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요. 그게 실향이라는 경험에서 가장 아픈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민의 경우에도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잖아요. 형이랑 같이 연 날리고 누나의 머리도 빗겨주던 그런 아름다운 추억들을 뒤로 하고 그곳을 떠나야 했다는 게 아민의 유년기에 엄청난 상처였을 것 같아요. 실향이라는 경험이 아민이 다시 찾은 집과 어떤 방식으로 이어져 있을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재밌을 것 같아요.

유연      이 중에 영화 〈애프터 양〉 보신 분 계신가요?.〈애프터 양〉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소재가 기억이거든요. 그 영화는 고장난 안드로이드를 고치기 위해 안드로이드의 기억을 열어보는 걸로 시작되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기억을 기록한 영상은 딱 3초씩만 저장되어 있어요. 아이폰에 있는 라이브 포토랑 비슷하게요. 저는 그걸 보면서 안드로이드뿐만 아니라 인간인 우리 삶의 사건들도, 사실 전부 맞닿아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기보다는, 라이브 포토처럼 단편적으로 기억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민이 과거에 겪은 피난 같은 사건들도 쭉 연속적이라기보다는 낱개로 존재하고, 그것들을 매끄럽게 다듬은 게 바로 이 영화인 거죠.

또, 우리가 생각하기엔 먼 과거의 기억일수록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데, 그런 것들이야말로 오히려 미래에 존재할 일들에 대한 영향력이 더 큰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가 끝난 직후에는 한 번 일어난 비극적인 삶의 사건은 기억이 흐려지더라도 알게 모르게 평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비관적으로 여겨지더라고요. 그런데 수다회를 진행하면서 다른 생각이 조금씩 들었어요. 현재도 언젠간 과거가 되겠죠? 그럼 이 현재의 일도 더 과거의 일과 함께 ‘과거’라는 이름으로 합쳐지고 그 다음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거예요. 그렇게 기억이 많이 쌓일수록 과거의 강렬한 사건과 감정들도 조금씩 더 중화가 되지 않을까요? 과거가 되어버린 현재의 노력들이 결국 그 다음의 나에게 다시 큰 영향을 미칠 테고, 과거에 일어난 슬픈 일들의 비중은 점점 작아질테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아요.

아자      공부 자극 멘트 중에 ‘감정은 사라지고 결과는 남는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런데 오은영 박사님께서는 이 문장과는 반대로 생각하신대요. 반대로 ‘결과가 사라지고 감정이 남는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오은영 박사님께서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 성적을 기억할 수 있냐면서, 성적은 결국 나중에 가면 쉽게 잊히지만 당시에 내가 열심히 했었다는 그 경험과 감정은 분명 기억이 날 거라고 하셨거든요. 방금 유연님이 과거의 상처나 실수가 현재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슬프다고 얘기해주셨는데, 저도 동의해요. 그렇지만 아민은 상처를 안고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꾸려나가잖아요. 저는 아민의 삶에 대한 의지가 정말 강하다고 느꼈거든요. 그러면 아민의 삶이 계속되면서 이러한 노력이 함께 과거의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거예요. 그러면 이전에는 상처와 트라우마로 작용하기만 했던 피난 다니고 숨어 지내던 시간들도 미래에 마냥 부정적으로만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아요.

포슬      아민이 덴마크에 오게 되기까지 있었던 과거의 여정과, 파트너와 함께 살 집을 찾는 현재의 여정이 병렬적으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이런 배치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과거와 현재, 이 두 가지의 집 찾는 과정이 조금 다른 형태이면서도 공통적으로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는데, 그런 부분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한 배치가 아닐까 싶어요. 과거의 집 찾기에는 무력함이 전반에 깔려 있잖아요. 자의적으로 집을 선택할 수 없고 전쟁과 같은 외부적인 상황에 쫓겨서 어쩔 수 없이 여러 집을 떠돌아 다니니까요. 현재의 집 찾기에서도 초반에는 아민이 충분히 주체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죠. 집을 찾아가는 과정을 마냥 편하게 여기지도 않았고요. 그래도 분명히 그 둘은 다르게 느껴졌어요. 왜 현재의 집 찾기는 아민에게 비교적 편안할 수 있었는가를 고민하다가 결말 부분에서 나름의 답을 얻았어요. 아민이 포스닥에 합격한 걸 파트너에게 말하지 않고 계속 숨기다가 그 사실을 직전에야 알게 된 캐스퍼(파트너)와 다투게 되잖아요. 그래서 아민이 감독의 집에 하룻밤 묵게 되는 거고요. 이후 아민이 포스닥을 끝내고 귀국할 때 캐스퍼가 공항으로 그를 마중 나오는데, 아민은 잠시 고민하지만 결국 그에게 가서 안겨요. 그런 화해의 과정에서 둘 사이에서 많은 대화와 협의가 이루어졌을 거고, 결국 둘이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거겠죠. 결혼도 하고요. 저는 그게 되게 좋았어요.

아자      저도요!

포슬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완벽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공간도 결코 완벽하지 않고, 언제든 삐그덕거릴 수 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민은 이제 이 삐그덕거림이 생길 때면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걸 알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저는 마지막 대사가 특히 좋았어요. 아민이 ‘이 공간을 우리 걸로 채울 수 있을까?’라고 말한 거요. 잘 해낼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제 이 공간은 내가 마음대로 꾸며나갈 수 있는 곳이란 사실을 확실히 하는 게 정말 좋더라고요. 집이란 안전하고 친밀하면도서 동시에 나에게 힘과 믿음을 주는 곳이어야 하는 것 같아요. 나의 노력으로 이곳을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고, 문제가 생겨도 해결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요.

2021. 나의 집은 어디인가(원제: Flee). 네온, 파티시펀트, 커존 아티미셜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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