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너를 잊었다 해도 한 번도 너를 지운 적 없어

편집위원 지구인

by 문우편집위원회

“세상은 너를 잊었다 해도 한 번도 너를 지운 적 없어”[1]



* 해당 글은 가정폭력, 퀴어 혐오와 같은 이야기를 언급합니다. 이 과정에서 직접적인 혐오 발언 또한 등장합니다.

* 뮤지컬 ‘이터니티’의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건 시작이 시작된 이야기”


누구나 한 번쯤은 ‘내가 투명인간이라면?’이라는 상상을 해보는 듯하다. 당신이 투명인간이라면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어보는 글을 인터넷에서는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몰래 놀이기구를 타겠다는 답변부터 다른 사람들의 물건을 훔치겠다는 답변까지, 다양하고 많은 반응들이 있지만 나는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사실, 이 질문은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질문 중 하나이다. 투명인간? 아무도 그를 보지 못할 것이고,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건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내가 이 세상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모두에게서 지워진다고? 젠더퀴어인 나에게는 절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다. 네가 싫어! 조차 아닌, 너는 존재하지 않아, 너는 뭐야? 라는 말들. 존재의 부정은 어떻게 보면 가장 궁극적인 혐오의 형태라고도 볼 수 있다. 나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그 순간의 외로움, 고독,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순간들을 무수하게 마주치며,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대해 두려워했고, 간절하게 ‘존재하는 존재’로 인식되고 싶어했다.


그런 기억이 처음으로 생긴 지 십몇 년은 더 흐르고 나서, 나는 생뚱맞게도, 그 아픈 기억들에 대한 위로를 작년 가을 혜화의 작은 무대 위에서 마주쳤다.



“아빠 난 그냥 아름답고 싶었던 거야”, “내가 누굴 만나든 그게 무슨 상관…”


작년 10월, 나는 글램록을 소재로 한 뮤지컬을 같이 보러 가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말에 내 생애 처음으로 내 돈을 내고 소극장에서 뮤지컬을 봤다.[2] 락 음악을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그런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뮤지컬을 만들 수 있을지 궁금했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대학로 공연’의 실체(?)도 궁금했다. 그때는 정말 ‘이 뮤지컬의 소재는 글램록이다’라는 이야기만 듣고 가서, 이 외의 정보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그 뮤지컬, ‘이터니티’는 이후 내 몇 개월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이터니티에는 ‘블루닷’, ‘카이퍼’, ‘머머’, 총 세 캐릭터가 등장한다. 블루닷은 가발, 화장, 반짝이는 의상 등의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되는 ‘글램록’ 장르를 대표하는 70년 전의 슈퍼스타이다. 실제 우리 세상에서 1970년대에 활동했던 글램록 스타, 데이비드 보위의 이미지를 연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화려한 인기도 잠시, 시간이 지나며 블루닷과 글램록은 사람들에게 점점 외면을 받고 잊혀져간다. 반면 카이퍼는 21세기에 사는 인물이다. 카이퍼는 70년 전의 락스타인 블루닷을 동경하며, 자신 역시 가수가 되어 이미 잊힌 장르인 글램록을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이제 아무도 글램록을 듣지 않는다며 카이퍼의 꿈을 무시한다.

즉, 이 극에는 ‘70년 전’과 ‘지금’이라는 두 개의 시간대가 교차한다. 각자의 시간대에서 블루닷과 카이퍼는 사람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블루닷은 자신과 자신의 음악을 기억할 카이퍼 같은 존재들을 떠올리며, 카이퍼는 글램록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블루닷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위로의 메시지를 상기하며 다시 일어선다. 그리고 극 내내 블루닷과 카이퍼의 이 모든 행보를 줄곧 지켜보는 캐릭터가 시간이자 공간 그 자체인, 무어라 규정짓기 어려운 존재인 머머이다. 머머는 블루닷의 매니저, 유명 토크쇼 진행자, 카이퍼가 찾아간 글램록 클럽의 사장 등 수많은 모습으로 나타나 블루닷과 카이퍼를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매정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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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사 마가요시 스기타가 촬영한 데이비드 보위의 모습


위는 최대한 건조하게 정리한 이터니티의 내용이고, 내가 이터니티와 사랑에 빠진 이유는 다름 아닌 내가 바라본 ‘퀴어한’ 캐릭터들 때문이었다. ‘남자로 태어나’ 화장을 하고 ‘여성스럽게’ 꾸민다는 이유로 가족의 학대를 받고, 스타가 되어서도 너는 ‘남자’인데 혹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대중의 눈초리를 받는, 아름다운 락스타 ‘블루닷’. 그런 블루닷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카이퍼’. 게다가 위에서 설명한 극의 진행상, 블루닷과 블루닷이 사랑하는 글램록은 ‘사라지고’ ‘잊히는’ 존재이다. 블루닷은 가발을 벗으라고, 화장을 지우라는 압박에 시달리며 너의 정체성은 세상과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없고 ‘정상적’이지 않다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주입당한다.


이미지3.jpg 뮤지컬 이터니티 속 블루닷의 모습 (사진 배우 김준영)


나는, 나 자신이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젠더퀴어[3]이기에 꼭 나 같은 캐릭터를 보면 마음이 쓰인다. 그들의 서사에 공감하기도 쉽다. 내 눈에는 블루닷이, 자신의 ‘남성 되지 못함’에 평생을 아파하고 세상의 비난을 받은 퀴어 인물로 보였다. 즉 세상이 강요하는 성별/성별 표현/성적 지향의 정상성에 부합하지 못하여 언제나 ‘정상’이 되기를 강요받은 나의 퀴어 동지들 같았다. 그에게 화장과 가발, 글램록을 이제는 그만할 때도 되었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에 함께 슬퍼했고, 혹시 연인이 남자냐는 질문에 같이 심장이 내려앉았다. 무대 위에서 절망하고 또 절망하는 그가 너무나도 안쓰러웠다.

그렇기에, 극 후반에서 자신을 기억해 줄 카이퍼의 존재를 떠올리고 그가 포기하려던 화장과 가발을 다시 쓴 뒤 무대에 서는 블루닷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눈물이 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든 죄악들 / 금지된 신의 영역을 침범해 / 오 나는 모든 금기들 / 무덤에 잠든 시체에 키스해 / 키스해 신들과 / 키스해 천사와 / 키스해 소년과 / 키스해 소녀와”

- 넘버[4] ‘이터니티 reprise’ 가사 중


이 세상의 시선에서 죄지은 존재, 금기를 저지르는 존재, 신과 천사를 ‘감히’ 탐하는 존재, 그리고 소년도 소녀도 사랑할 수 있는 퀴어한 존재. 그가 좌절을 딛고 일어나 자신이 바로 그런 무엄한 존재라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말로 다할 수 없는 힘을 얻었다. 그래서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될 때마다 이터니티를 다시 보러 갔다. 그 극장에 있노라면 지구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정상성을 강요당하며 고통받는 수많은 존재들과 내가 진실로 이 지구에 존재함을 인정받고 허락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 주변인들에게도 이 극에서 내가 읽어낸 퀴어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녔고, 그 덕분에 이터니티를 실제로 보고 온 몇은 나의 감상에 공감하면서 함께 블루닷을 사랑하게 되었다.



“혹시 조금 다른 취향인가요?”


그렇게 계속해서 이터니티의 노래를 듣고, 이터니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연대하는 팬들의 말을 찾아보는 행복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나날들에 벼락이 내리쳤다. 이 극의 작가가, 개인 인스타그램에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질문 및 답변 기능을 이용하여 이터니티 관객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던 중 ‘이 작품에 퀴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다’는 답을 작성하신 것이다.


Q. 혹시 이터니티 작품 안에 퀴어에 대한 상징이 녹아있다고 봐도 될까요? 관객의 입장에서 어느정도 느끼면서 보고 있어서… 궁금했어요
A. 이 이야기는 정말 하고 싶었는데요! 이 작품에 퀴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토크쇼2에서 나오는 그에 대한 것들은 블루닷의 겉모습을 보고 만들어낸 대중과 언론의 얕은 편견이라 생각했습니다!


“토크쇼2에서 나오는 그에 대한 것들”이란, ‘토크쇼’라는 넘버 중 블루닷이 바에서 남자와 껴안던 모습이 목격되었다며 “혹시 조금 다른 취향인가요?” 등의 말로 토크쇼 진행자에게 추궁당하는 장면을 뜻한다.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다음으로 내가 바로 한 생각은, 이상하게도, “이 소식을 퍼뜨리지 말아야겠다”였다. 그의 답을 보자마자, 이 말이 이터니티로 위로를 받은 나의 주변 소수자들에게 큰 상처를 주리라고 직감했다. 그래서 당장의 내 슬픔을 잠시 억눌러두고, 이런 소식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른 척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한 구석에는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연히, 나처럼 이터니티를 좋아하게 되어 계속해서 관련한 소식을 찾아보던 주변인들에게도 금세 이 답변 내용이 전해졌다. 주변인들은 모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슬픔, 분노, 좌절 등. 그리고 나에게 이 소식을 보았냐고, 괜찮냐고 묻는 연락들이 쌓였다.


이터니티를 사랑하는 사람들 중 나와 내 주변인들만 이 소식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터니티의 팬들도 한동안 떠들썩한 반응을 보였다. X(트위터)의 반응들을 기준으로, 다양한 반응들의 종류를 나름대로 분류해 보았다.


• 가장 많은 반응은 분노였다. (1) 대사와 가사에서 직접적으로 퀴어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퀴어한 서사, 퀴어한 이미지를 모두 사용하는 뮤지컬임에도 ‘퀴어와 관련 없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일이 (슬프게도 놀랍지는 않으나) 실망스럽다는 반응이었다. 퀴어들에게는 이런 ‘퀴어 지우기적’ 전유와 차용이 익숙한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이야기가 되풀이되었다. 늘상 반복되는 “그래서 퀴어냐”고 물으면 결국 부정하는 행위가 바로 화가 나는 지점이며 퀴어혐오라는 지적이었다. (2) 또한, 자신이 퀴어라고 당당히 밝혔던 글램록 슈퍼스타 보위의 여러 시각적 이미지를 참고하였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뮤지컬에 대한 이런 해석은 보위에게도 퀴어에게도 모욕적이라는 반응도 많았다. (3) 이외에도 퀴어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발언은, (그 대상에 퀴어도 포함되는) 소외받고 잊히는 자에 대한 위로를 다루는 해당 극의 메시지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짚는 경우도 있었다.


• 위와는 조금 결이 다른 분노와 지적도 있었다. 작가가 극의 해석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반응들이다. 해당 상황이 인스타그램의 기능을 이용한 문답의 상황이었고, 작가에게 질문을 보낸 관객도 “관객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 느끼면서 보고 있”다고 밝혔기에 더욱 ‘전혀 없다’는 단언을 해서는 안 되었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어떤 작품에 대하여 관객의 특정한 해석이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해당 해석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반응들이 많았다.


• 이 소식에 대한 슬픔과 아픔을 표현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나 퀴어 당사자들의 경우 더욱 그러하였다. 이터니티에서 소수자에 대한 위로를 읽어내고 본인도 그에 힘을 얻었는데, 작가의 발언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식의 발언이 여럿 있었다.


• 이런 상황에 많은 이가 분노하거나 상처받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하는 글도 꽤 있었다. 부정적 반응의 당사자가 퀴어 본인으로서 슬퍼했든지, 작가의 발언 기저에 퀴어 혐오가 깔려있다 판단하여 분노했든지,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이터니티라는 작품에 대한 기억에 부정적 감상이 추가되는 것을 아쉬워했다. 작품에 대한 감상이 바뀌는 것뿐 아니라, 이터니티로 자신이 받은 위로가 훼손되었다 느낀 이들에 대한 염려도 많았다. 어떠한 이유로든 상처받았을 서로에 대하여 위로가 오고갔다. 이 과정에서 이터니티의 특정 공연 회차에서 배우가 즉흥적으로 뱉은, 퀴어친화적으로 볼 수 있는 발언이 위로의 일환으로 다시 언급되기도 하였다[5].


• 작가의 해석은 그러하지만, 자신의 해석은 다르다고 자신 나름의 해석을 공유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자신은 이터니티가 퀴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극이라 해석했다고 밝히거나, 소외된 자들을 향해 위로를 건네는 극이라고 보았기에 퀴어에게도 이 극의 위로가 유효하다는 반응들이었다.


• 작가의 발화 의도를 좋은 식으로 추측하며 최대한 상황을 선해하는 글도 종종 있었다. 이런 글은 공통적으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가십’에 시달리는 스타 블루닷의 모습이기에 블루닷이 무조건 퀴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요지였다. 글 작성자가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뉘앙스인 경우도, 작가가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라며 추측하며 상황을 진정시키고자 하는 뉘앙스인 경우도, 둘 다인 경우도 모두 있었다. 이런 반응들의 경우 이 또한 혐오적이라는 반응을 받아 삭제된 경우도 있다.


모든 이가 위의 반응 중 하나만을 표현한 것은 아니며, 복합적인 반응을 보인 경우도 아주 많았다. 나의 경우에도, 슬픔과 아픔을 표현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이 받았을 상처가 걱정되어 다른 사람들의 안부를 살피고 최대한 위로해주려 노력하였다. 공개적으로 어딘가에 게시물을 작성하진 않았지만, 분노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내 나름의 해석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또 이 작품으로 받은 나의 위로를 잃지 않고 싶어서, 상처를 덜 받고 싶어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도 나의 생각이 작가님의 의도를 좋게 보려는 방향으로도 흘러갔다. 그래서 팬덤 내의 이 모든 반응 하나하나가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지 이해가 되었기에, 이 상황이 더 마음이 아팠다.



“사라져 영원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는, 나와 비슷하게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관된 부정적 사건으로 예상치 못한 실망을 겪은 적이 있는가? 내가 겪었던 것과 꼭 비슷한 일이 아니어도 좋다. 그러니까 나의 경우는, 작가가 내가 생각하는 작품의 메시지에 배치된다 여겨지는 발언을 한 경우였다. 여러분의 경우에는, 배우가 있는 매체의 경우 배우가 그랬을 수도 있고, 창작자 중 누군가가 작품의 메시지와는 관련이 없지만 혐오적인 발언을 했을 수도 있고, 작품 자체가 다시 돌이켜보니 혐오적인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 가능성은 아주 많다. 내가 떠올린 그런 예시들을 나열해 보겠다.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는 20세기 공포 문학, 장르 문학의 거장으로 불린다. 러브크래프트의 여러 유명 단편 중, 특히나 《크툴루의 부름》은 해당 단편을 기반으로 한 동명의 호러 롤플레잉 게임이 크게 흥행하여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러브크래프트는 극심한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성차별주의자였으며, 그의 작품에도 인종차별과 남성중심주의적 사고가 만연하다. 또한 그는 반유대주의자였으며, 우생학을 신봉하였다.

• J. R. R. 톨킨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 등 많은 유명 소설을 집필한 작가이다. 그의 판타지 세계관 속 설정들은 이후 아주 많은 판타지 작품들의 기반이 되었기에, 현대 판타지 장르에 톨킨이 끼친 영향력은 매우 크다. 그러나 그의 세계관 속에서 명석함, 예의바름, 아름다움 등 소위 ‘우월한’ 특성을 가진 종족들은 서구권 1세계의 민족 및 백인이 연상되도록 서술된 반면 어리석음, 무례함, 못생김 등 소위 ‘하등한’ 특성을 가진 종족들은 여러 아시아 및 아시아권의 민족을 연상시킨다는 비판이 있다. 즉, 서구권 1세계의 민족들을 ‘우월한’ 것과 결부시키고, 그렇지 않은 민족들을 ‘하등한’ 것과 결부시킬 여지가 있어 차별적이라는 비판이다.


•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은 2018년 트랜스여성[6]을 “치마를 입은 남자”라고 칭한 트랜스젠더 혐오적인 SNS 게시물에 ‘좋아요’ 반응을 표현하였고, 이는 실수였다고 해명하였다. 그러나 이후 조앤 K. 롤링은 지속적으로 트랜스젠더 혐오적인 게시물에 공감하거나, 그런 발언을 스스로 SNS에 업로드하는 등의 행보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에 영화 《해리포터》의 출연 배우들이 조앤 K. 롤링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며 트랜스젠더 혐오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나의 경우, 위에서 나열한 예시 중 어렸을 때 《해리포터》를 읽었다. 내가 그중에 특히나 좋아했던 캐릭터는 ‘통스’라는 인물이다. 그는 외모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인물이라, 늘상 내 몸이 마음에 들지 않던 나는 통스의 능력을 매우 부러워했었다. 나는 시간이 지나며 내가 느끼는 내 몸과의 괴리가 어느 정도 나의 젠더퀴어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연스럽게 《해리포터》도 어릴 때의 내가 나 자신과 연결 지어 독해한 책으로 재정의되었다. 그런데, 인터넷 세상을 접하고 나니 작가는 내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크게 당황하고 놀랐다. 그 뒤로 나는 《해리포터》를 이전과 아주 동일한 감상으로만 읽을 수는 없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랑한, 어쩌면 우리를 살아가게 해준 작품, 혹은 그 작품에 연관된 어떠한 사건이 나를 실망시킨 경험을 하곤 한다. 나는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서, 우리가 이런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보고자 한다.

사실 이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 지점’과 ‘내가 받아들인 작품’을 분리하자는 해결책을 제시해왔다. 가령 작가가 혐오발언을 했을 경우, 그건 작가의 일이고 작품을 사랑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식이다. 예를 들자면 위에서 말한 《해리포터》의 경우, 특히 영어권 팬덤에서, 트랜스젠더 팬들을 향해 《해리포터》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유효하고 작가 때문에 이를 포기하지 말라는 뉘앙스의 글들이 SNS상에 여러 번 공유되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들은 실제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효과적인 대처법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략을 취하면 내가 받아들인 작품은 작품의 창작자 등 작품과 관련된 인물, 작품이 쓰인 사회 등과는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고, 향유자는 ‘작품이 아닌’ 것에 위협받지 않을 수 있다. 나는 ‘문제가 된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한 그 작품의 해석을 좋아했을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글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만든 이가 괴물일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에서 콘스턴스 그레이디는 영화 〈가위손〉을 좋아한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다. 그는 어렸을 적 본 이 영화를 정말 사랑했지만, 후에 〈가위손〉의 주연 배우인 조니 뎁의 가정폭력 범죄 사실을 보고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고 밝힌다. 그리고 아무리 이런 상황에서 앞에서 언급한 ‘문제’와 ‘작품’ 분리 전략을 사용한다고 하여도, 그 혐오감의 감정은 작품에 대한 애정과 함께 여전히 공존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이런 전략으로 조니 뎁의 가해 사실과 피해자의 피해 사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꼭 〈가위손〉이 아니더라도, 비슷하게 창작자 등 관련인이 범죄나 가해를 저지르는 경우에는 그 향유자들 사이에서 작품을 소비하는 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식의 논의들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러고 동시에 항상 그에 대한 비판 및 실존하는 피해자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함께 제기되었다. 덧붙여, 폭력 사건의 가해자이거나 혐오적인 관점을 가진 창작자의 작품을 구매 및 향유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해당 가해 사실이나 혐오에 대한 옹호로 읽히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실질적으로 작품을 사회와 유리시키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널리 공유되는 ‘문제와 작품의 분리’ 방안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인 게 아닐뿐더러,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 보기도 힘들다.


다시 그레이디의 글로 돌아가서, 그가 분리 대책 대신 택할 수 있는 방안들로 무엇을 제시했는지 살펴보자.

• 저자와 창작자에게 “‘해석상의 힘(그들 작품에 대한 관객의 해석 방식을 좌지우지하는 힘)과 제도상의 힘(뒤따르는 응징 없이 남을 부당하게 대할 수 있는 힘)’을 모두 부여”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이론


•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정적”이므로 “세상의 모든 예술작품에 골고루 비판적인 관심을 쏟을 수는 없”고 “비평가가 작품을 약간은 선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


• 쟁점을 “이 작가는 괴물인가?”가 아닌 “이 작품은 독자인 나에게 작가의 괴물 같은 모습에 연루하기를 요구하는가?”로 두는 방법


• 특히 작품으로 수익을 얻는 창작진이 문제를 일으킨 경우 ”작품에 돈을 쓰고 싶지 않다는 결정을 내리”는 방법


등이 글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그레이디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만능인 정답은 없”(15p)다고. 또한 자신의 글에서 밝힌 여러 이론들을 다시 간략하게 언급하며,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여러 가지 발상을 듣고 나서 제가 스스로 어떻게 생각을 정리했는지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예술에 대해서요.”(16p)라고도 서술한다. 그레이디의 주장은 나의 경험을 돌아보아도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며 실질적으로 유용하기도 하다. 만능인 정답을 찾을 수는 없고, 나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때까지 살펴본 여러 문제 해결 방식을 상기하며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작품에 관련된 일로 예상치 못한 실망을 겪는 일에 대한 내 생각의 흐름을 적어보려 한다. 먼저 떠오른 대책은, 이런 일이 생기면 내가 왜 화나고 슬프고 실망했는지, 지금 상황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낱낱이 정리해서 의견을 공유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즉 비판하는 글 쓰기이다. 실망스러운 일을 만든 장본인이 시정하고 사과할 수 있는 문제가 일어났다면, 그런 반성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이 방법에는 여러 장점이 있다. 나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전략을 취할 경우, 작품의 향유자도, 창작자 등 관련된 사람도, 자신이 몰랐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얻어갈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 제기가 활발해지면 추후에는 작품 창작의 과정에서, 그리고 창작자와 관련인에게서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경계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운이 좋다면(?) 창작자 등 관련인에게 정말로 해당 문제에 대한 피드백이나 시정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이 방법은 분명 어느 정도 좋은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한 완벽한 대책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이것만으로 그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 이 방법으로 내가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다시 한번, 이터니티가 나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었을 때, 내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돌이켜보았다.


먼저 나는 앞서 정리했던 팬덤의 반응에 큰 힘을 얻었다. 솔직히 나는 이 사건이 발생한 후 모두가 작가의 발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이 극이 퀴어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에 동조하는 방향의 여론이 조성되면 어떡할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이터니티 팬이 작가의 해당 발언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에서 팬덤이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다면 나는 다시 이터니티를 좋은 마음으로 보지 못했을 것 같다. 특히나, 나와 비슷하게 이터니티에서 퀴어적인 메시지를 읽어내며 이터니티를 사랑한 이들이 나와 공동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감동적이다. 같이 슬퍼하고, 같이 위로하고, 같이 각자의 소중한 가치와 아픈 부분을 나눌 수 있었음에 행복했다.


또 몇 배우의 무대인사[7] 속 발언도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


“이터니티라는 극에서 좋은 머머가 나올 때도 있고 나쁜 머머가 나올때도 있지만, 중요한 건 본인이 생각하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이나 생각들(을) 굴하지 마시고 꼭 더 단단하게 가지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자기가 다르다고 느끼고 있는 수많은 외계인 여러분들, 본인이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여러분들, 여러분은 외계인이 아닙니다. 조금 다른, 그 또한 똑같은 지구인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지구인으로서 잘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발언들을 통해 나는 내가 생각한 이터니티의 메시지, 즉 ‘이터니티는 소수자를 향한 위로와 인정을 담고 있다’는 해석에 배우들도 공감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 점이 큰 위안이 되었다.

즉 정리하자면, 나의 회복에 도움이 된 것은 첫째로 같은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공감과 위로였고, 창작과 관련된 인물들이 보인 내게 소중한 가치를 응원해주는 행보였다.



“내가 널 기억해”


그래서 이 글을, 위에서 그레이디가 언급하였듯 자신이 아끼는 작품에 관련된 사건으로 예상치 못한 아픔을 겪는 일에 대처하는 방식이 여럿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연대와 지지의 목소리 내기’도 아주 유효한 방식이라고 주장하며 끝맺고 싶다. 모두가 자신이 사랑하던 메시지와 가치가 부정당해도 자기 스스로 극복해내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말로, 오로지 ‘혼자서’ 그럴 수 있는 인간이 있기는 할까? 우리 모두는 타인이 가득한 환경에서 살아가기에, 당신을 둘러싼 세상이 당신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이 지구에서 당신이 있을 자리가 조금씩 깎여나가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러한 누구도 이 지구에서 튕겨져 나가지 않게, 지구인으로서 남을 수 있게, 우리 모두 자신 곁의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위로를 건네주었으면 좋겠다.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을 지적하며 슬퍼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고, 당신에게 공감하고 연대한다고 말해주고, 서로를 살피고 돌보고⋯⋯. 이러한 위로가 활발해지는 창작의 세계를 우리 각자가 만들어가려 노력한다면, 돌고 돌아 자신이 상처를 받을 때에도 따스한 공감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문제 상황 그 자체는 정말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가끔, 혹은 자주, 따스한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 상황이 좋지 않으면 당장은 모두가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그 ‘누군가 있음’을 명백히 드러내기 위해 목소리를 내주었으면한다. 팬덤도, 창작과 제작에 닿아 있는 자도. 온갖 혐오와 폭력의 목소리가 드높아도 내가 널 기억한다는 그 한마디가 있다면, 누군가는 슬픔과 좌절을 극복할 수 있다. 모두에게 요청한다. 당신의 보듬음을 기꺼이 나누어달라고. 당신이 향유자의 위치이든, 창작자의 위치이든. 나도 내가 찾은 결론을 따라 아픔을 겪은, 겪을 당신을 위해, 여기서 소리치고 있겠다. 내가 널 기억하노라고.



각주


[1] 이 글의 모든 제목과 소제목은 뮤지컬 이터니티의 대사 혹은 가사에서 차용하였다.

[2] 내가 대학교에 오기 전 살았던 곳에서는 소극장은 고사하고, 큰 규모의 극장을 가려고 해도 한참을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서울에는 뮤지컬과 연극 공연을 많이 하는 대학로라는 곳이 있다더라’ 정도의 사실만 알고 있었지, 내가 직접 그런 작은 극장에 가서 공연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번에 대학로의 공연들을 보면서, 소위 대학로 연극/뮤지컬 문화라는 것이 얼마나 수도권/비장애인/고소득층/고학력자/신경전형인 중심적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이 글의 주제에서는 다소 벗어나지만, 연극/뮤지컬 문화의 이러한 문제점들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에 대해 더욱 많은 고민이 이루어져야 하는 동시에, 해소를 위한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3] 젠더퀴어란 남성 혹은 여성으로 나뉘는 성별 이분법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성정체성을 가진 성소수자를 뜻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젠더퀴어는 지정성별(출생 시에 육안으로 해석된 성별)과 자신의 성정체성이 불화하는, 트랜스젠더의 범주에 속한다.

[4] 뮤지컬에 등장하는 노래를 ‘넘버’라고 부르더라. 나는 뮤지컬에 익숙하지 않아 이 명칭이 꽤나 어색했기에 각주를 단다.

[5] 이터니티의 극중에는 블루닷과 머머(해당 장면에서 토크쇼의 진행자로 분한다)의 토크쇼 장면들이 있다. 그 중 첫 번째 토크쇼인, 넘버 ‘라잇이어 토크쇼 (Instrument)’ 부분에 해당하는 장면에서는 사전에 질문함에 모집한 토크쇼 시청자의 질문 중 총 세 개를 블루닷이 답해주는 토크쇼 코너가 진행된다. 이 중 앞 두 질문은 이미 대본 상으로 정해져 있는 질문이나,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실제로 뮤지컬 이터니티의 해당 회차 관람객들이 공연 시작 전 작성한 질문 중 하나를 추첨으로 뽑게 된다. 따라서 세 번째 질문의 경우 블루닷 역을 맡은 배우는 이에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대답한다. 본문에서 말한 “퀴어친화적으로 볼 수 있는 발언”이란, 해당 장면에서 블루닷 역의 배우가 “블루닷님, 남팬도 괜찮나요?”라는 질문에 “boys, girls, others, 다 좋아요(남자든, 여자든, 그 이외이든, 다 좋아요)”라고 대답한 것을 말한다. 해당 발언은 이터니티 팬덤 내에서, 1975년 그래미 어워즈에서 데이비드 보위가 시상자로 나서며 말한 “Ladies, gentlemen, and others.”를 차용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6] 지정성별은 여성이 아니나, 여성으로 정체화한 사람을 뜻한다.

[7] 무대인사란 뮤지컬, 연극 공연 등에서는 무대가 끝난 뒤 배우가 관객에게 간략히 인사 및 소감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뜻한다.



참고문헌


Masayoshi Sukita. (1973) David Bowie[Photography]

@rndworks. X(Twitter), 2024.10.17. https://x.com/rndworks/status/1846848260444770557?t=Zq3TbJj2RYhJU3Wb2kt0cg&s=32

콘스턴스 그레이디. 김혜연 옮김. 「우리가 사랑하는 예술을 만든 이가 괴물일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2021.03.31. https://philo-electro-ray.org/ (전기가오리 자료, 기타 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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