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땅을 바라보며

편집위원 단(丹)

by 문우편집위원회

1. 언제 마지막으로 맨땅을 밟아보았는지 모르겠다.


대학생이 되고 고향에서 상경한 이래로 몇 년 동안 서울에서 살며 내 신발 밑창은 크게 얼룩지는 일이 없었다. 내 고향 충청북도 괴산군은 지도를 꽤 확대하지 않으면 지명이 보이지 않는 작은 산골짜기 시골 마을이다. 속리산 자락의 첩첩산중 가운데 위치하여 고속도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며, 집 가는 길에도 수십 번 산과 고개를 넘고 터널을 지나야 하는 곳이다. 요즈음에는 제법 탁 트인 고속화 도로도 생겼지만, 그 위를 털털거리며 지나가는 트랙터와 포터 트럭을 보고 있자면 괴산은 역시나 시골 마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시골인 괴산에서 내 집은 훨씬 더 시골이다. 하루에 두 번, 아침 8시와 낮 1시에 다녀가는 시내버스는 그마저도 마을 입구에서 내려주기 때문에, 걸어서 한 시간이 우습게 넘는 길을 걸은 다음에야 집에 도착할 수 있다. 처음 40분 정도는 터벅터벅 마을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시골길을 걷는다. 검은 아스팔트 대신 희뿌연 시멘트로 만든 도로인데, 트랙터나 경운기 바퀴에서 떨어져나온 황토흙이 덕지덕지 엉겨 붙어 요즈음에는 아주 갈색처럼 보이는 도로이다. 승용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단일 차선 도로라, 차든 사람이든 먼저 도로에 들어선 것이 있으면 반대편에서 오던 것들은 갈림길 도로에 들어가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걷다 보면 마을의 파란지붕 조립식 집들은 하나둘 사라져가고, 점차 주위가 논밭으로 뒤덮인다. 휴경 중인 밭 어귀에서는 산고양이들이 쥐를 잡으려 동분서주하고, 아무개 집 발바리 강아지가 괜히 한두 걸음 발맞춰 따라와 준다. 그러고 나면 이제 진짜 산이다. 종종 등산복 입고 걸어들어오는 사람도 있는 진짜 산. 시멘트 도로가 뚝 끊기고 나면 가운데 잡초가 잔뜩 자라난 오르막 흙길이 나타난다. 두어 걸음만 걸어도 운동화 밑창은 금세 흙이 묻어 얼룩덜룩해지고, 흙과 돌멩이의 생경한 질감이 발밑으로 느껴진다. 그렇게 또 하염없이 2~30분을 걸어 올라가면 정겨운 그리운 낯익은 여전한 내 집이 있다.


이 집에 살았던 오랜 시간 동안, 내 모든 신발의 밑창은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나무와 풀을 원 없이 만지면서 살았다. 아무리 가느다란 나무라도 키가 크다면 그 뿌리가 깊어 태풍에도 넘어지지 않으며, 비가 온 후에는 평평해 보이는 흙보다 마른풀을 밟아야 발이 빠지지 않는다. 봄이면 호미 한두 개를 들고 마당에서 삼십 걸음이 채 안 되는 곳에서 봄나물을 채취해 먹는다. 농사를 지을 때면, 고라니가 콩 새순을 뜯어먹지 않게 하기 위해 밭 가장자리에 깻잎을 두 줄 심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능숙한 녀석들 때문에 매번 골머리를 앓았다. 밤이면 가로등 하나 없는 산골짜기가 완전히 어둠에 잠기고, 하늘에 수 놓인 별들이 거실 창 너머로도 손에 잡힐 듯하였다. 학교에 가려면 꼭두새벽부터 엄마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하고, 문화생활이라곤 친구 집 TV로 보는 영화 재방송이 전부였던 나의 그리운 어린 시절.


그러나 사실 나는 내가 살아온 농촌의 환경, 내가 경험한 농민의 삶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을 항상 꺼려왔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스스로를 온전한 농민으로서 정체화하기에 부족함이 크다는 사실이다. 윗대로부터 농지를 물려받고, 어릴 때부터 농업을 삶 속에서 학습하고, 농촌 마을 공동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삶. 동시에 농업으로서 삶의 궤를 이어가고, 농민으로서 자신의 삶을 가꾸면서 다양한 농민 의제가 일상에 직접 맞닿아있는 농민의 삶과는 언제나 거리감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농업인은 으레 생각하듯 선대로부터 농업을 위한 농지와 작물, 재배 방법에 대해서 전수받고,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땅을 가꾸며 살아간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여타의 산업구조와 달리 시사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며, 농촌 의제에 깊게 연관되어 존재하는 요소들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농지를 대대로 물려받으면서, 그 마을 사람들과 함께 평생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직업으로써 농사를 짓는 것’ 이상의 ‘농민으로서의 정체성’과 ‘농촌에 대한 소속감’을 형성한다.


그런 반면에 나는 농촌지역에서 농지를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부모님은 서울 출신이시며, 조부모님 또한 여전히 수도권에서 거주하고 계신다는 미묘한 지점을 지니고 있다. 부모님 모두 젊은 시절부터 해오시던 본업이 있었으며, 몇 년 동안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현재에는 더 이상 본격적으로 밭을 일구시지 않는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승용차를 타고 사무실에 출근하시고, 집에 번듯한 농기구가 있는 것도, 수확한 작물을 판매하는 유통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지점에서 우리 집은 농촌에 거주하지만, 그저 농업을 잠깐 경험해 본 가정일 뿐이다. 결국 나는 농촌에 대한 명확한 소속감보다, 그저 ‘자연환경’이 가까운 생활 공간이라는 인식만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지금까지 농민을 이해하는 흐릿한 연결고리였을 뿐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나의 농촌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이 비수도권 지역의 일반적인 특성으로서 납작하게 이해될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비수도권 지역과 농촌 지역은 면적상으로는 큰 교집합을 지니고 있지만, 인구 분포상 완전히 같이 위치시키기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점들을 지니고 있다. 앞서 서술하였던 인프라가 열악하고 자연이 밀접한 시골 마을의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일반적인 ‘비수도권’ 지역의 풍경으로 연상되었을지도 모른다. 비수도권 지역에서 어린 시절 및 학창 시절을 보내고 수도권 대학에 진학한 사람들은 언젠가 한 번쯤 그런 질문을 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고향에 영화관 있어?”
“너희 동네에 스타벅스나 뭐… 프랜차이즈 카페 있어?”
“너네 집도 그러면 농사짓거나 소 키워?”


요즈음에는 많이 줄어든 질문이지만, 여전히 드물지 않게 대답하고 있다. 물론 상상 속 목가적인 시골 마을을 기대하는 도시민들을 위한 친절한 부연 설명을 덧붙여서.


“영화관 없어. 요즘은 다들 집에서 OTT 보는데, 나 완전 어릴 적에는 군민회관에서 한 달에 한 번 가족영화 상영해 준 것 같아. 아니면 차 타고 한 시간 가면 좀 큰 도시 있는데 거기서 볼 수 있어.”
“스타벅스는 없고, 이디야는 있어. 스타벅스는 본사 직영으로만 운영되어서 못 들어온대. 대신 체인점 카페는 종종 보여. 그래서 대부분 직영점인 맥도날드, 버거킹은 없고, 롯데리아가 있잖아.”
“요즘 누가 농사를 지어 먹어. 다들 직장 다니지. 근데 우리 집은 마당에서 쪽파 키워. (웃음)”


가벼운 문답이다. 관념적인 시골 마을 출신인 나에게는 누군가가 내심 기대했던 대답이 튀어나온다. 그러나 누군가에게서는 전혀 다른, 그렇지만 당연한 대답이 나온다.


“무슨 소리야. 너희 그거 다 고정관념이야. 수도권 아니라고 다 허허벌판 시골 마을인 줄 아네. 꼭 광역시 아니더라도 수도권 신도시 못지않게 발전된 곳들이 얼마나 많은데.”


서울과 경기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 즉 비수도권은 하나의 이름표로 통칭되어지지 않는다. 비수도권에서는 도시화 되어있는 지역이 있고, 도시화가 되지 않은 농어촌 및 산림 지역이 있다. 게다가 도시화가 되지 않은 농촌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농민인 것 또한 아니다. 1970년대까지 200만을 유지해 왔던 농가 가구 수는 2023년 100만 농가가 한계선을 깨며 99만 가구로 하락하였다. 전체 가구에서 농가가 차지하는 비율은 5% 미만이다[1]. ‘비수도권이 농촌이며, 농촌에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농민’이라는 무의식적 전제는 허무할 정도로 오류투성이다. 심지어는 수도권으로 통칭되는 서울 및 경기권에서도 여전히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수도권 농촌 지역 출신으로서, 고향을 묘사하고 농민 의제를 발언하는 것이 이러한 고정관념을 재생산할지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 나만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표현된 공간이 그보다 넓은 인구 지역적 특성의 다양성을 가리고, 더 나아가 지방민에 대한 편 가르기와 무시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오랫동안 고향인 농촌지역에 대한 막연한 향수감, 농업에 대한 흐릿한 연결점만을 느끼고 있었으며, 도시민과 농촌민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 사이를 오가고 헤매면서 어쩌면 외로움을 느낀 것 같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몇몇 사람들보다 조금 더 가깝게 농민들을 지켜봤다는 이유만으로 농민 의제에 발언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를 의심하였다. 또 한동안은 농촌 출신이라는 것이 어쩌면 소수자성으로 나를 따라다녔으며 그것을 내심 부끄러워하였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그러한 시간을 보내며 나는 그저 서울에서 살아갔다.


서울에서 사는 동안 맨땅을 밟을 일이 없었다. 바닥은 언제나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가득 쌓여있었고, 종종 드러난 땅에는 ‘밟지 마세요’ 팻말 너머로 잔디나 조경수가 심겨 있었다. 서울은 마치 땅 위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 같았고, 이곳의 사람들은 땅과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인 것 같았다. 언제 마지막으로 맨땅을 밟아보았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서울은 땅이 아닌 바닥 위에 지어진 도시였으며, 종종 땅 위에 무겁게 올려놓은 것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과연 그 땅의 흙색이 어떠할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2. 남태령을 보았다.


유달리 다사다난하고 많은 눈물과 분노를 가져왔으며, 매 순간 생존에 대한 불안을 여실히 느끼며 살아야 했던 2024년이었다. 그중에서도 12월 21일 동짓날, 가장 길고 긴 추운 밤이었다. 그날 함께한 이들은 광장을 더 크게 열어냈고 오래된 땅이 아직 투쟁하는 우리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음을 느꼈다.


지난 12월 16일,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은 ‘세상을 바꾸는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대행진’을 시작하였다. 2015년 고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사건 때 처음 만들어진 전봉준투쟁단은 2016년 박근혜 국정농단 때에도 힘을 모았다. 그리고 이번 2024년, 이들이 농사를 위해 무엇보다 귀중한 재산인 트랙터를 걸고 바퀴가 상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서울로 출발한 계기는 ‘양곡관리법(양곡법)’[2]이다. 윤 대통령은 임기 중 첫 번째 거부권을 농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양곡관리법에 행사하였고, ‘포퓰리즘 법’, ‘강제 매수법’이라고 말하며 농민 의제에 강력한 반감을 표하였다. 이에 맞서 투쟁하던 농민들은 윤 대통령 비상계엄 사태 이후, 탄핵 시위에 함께하기 위하여 전남과 경남 등지에서 트랙터를 타고 출발하였다. 행진단은 길에서 먹고 자고, 딱딱한 아스팔트에 바퀴가 닳고 기계가 망가지는 것을 감수하며 6일간 전국을 누볐으며, 각지의 농민들이 행진에 합류하였다. 시속 20~30km로 최선을 다해 달린 트랙터들은 ‘윤석열 체포구속’과 ‘사회대개혁’, ‘개방농정 철폐’ 등을 내걸고 남쪽 끝부터 서울까지 행진하였으며, 21일 남태령 고개를 넘어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농은 21일 저녁에 “시민 여러분, 2024년의 우금치 남태령으로 모두 모여주십시오”라며 긴급 호소하였다. 경찰이 21일 오후 1시경부터 남태령 고개 부근에서 8차선 대로에 차벽을 세우고, 트랙터들을 비롯한 전봉준투쟁단의 행렬을 막은 것이다. 예고도 없이 ‘교통 혼잡이 우려된다’며 농민들을 가로막은 경찰들은 트랙터의 유리를 깨고[3] 운전자를 무력으로 끌어내리는 등 강경 진압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농민들에게 욕설과 폭력을 가하기도 하였다[4]. 트랙터를 강제로 끌어낼 견인차들이 동원되고, 수백 명의 경찰들이 투입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농민들은 시민들의 참여를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그리고 시민들은 이들의 부름에 응답하였다.


X(전 트위터)를 통해 전농의 호소가 빠르게 전파되었고, 시민들이 하나둘 남태령으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시민들이 오니까 경찰이 폭력적으로 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소식은 망설이던 이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날 저녁 광화문 집회에 참석했던 시민들, 그리고 집과 학교, 직장에서 일상을 살아가던 수많은 시민이 혹한에도 남태령에 모여 농민의 곁을 지켰다. 하원오 전농 의장은 이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길이 통제되니까 승용차나 버스에 탄 일반 시민들도 하나 둘 씩씩거리시면서 내리는 거예요. 아, 우리는 시민들이 우리한테 욕하려는 줄 알았죠. ‘농민들이 왜 시위를 해서 차 막히게 하냐’할 줄 알았죠. 근데 시민들이 우리한테 항의를 하는게 아니고, 경찰들한테 가서 ‘지금까지 한 줄로 잘 가시던 분들을 왜 막고 난리냐’, ‘경찰들 빨리 차 빼라’고 마구 소리를 치시는 거예요. 이번에 유명해진 ‘차 빼’ 구호가 거기서 처음 나온 겁니다. 시민들이 먼저 외친 거죠. 내 나이 곧 칠순인데, 그때 막 눈물이 날라 카대요.”

[5]


저녁부터 젊은 여성들을 필두로 많은 사람들이 남태령에 모여들었고, 영하 6도의 추위 속에서 농민들 곁에서 밤을 지새웠다. 유튜브 ‘전농tv’는 밤새 2만여 명이 시청하는 가운데 실시간 중계를 이어갔으며, 이를 지켜본 수많은 시민이 따뜻한 음식들을 남태령으로 배달시켜 보내거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버스를 대절하여 보내면서 연대하였고, 경찰들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지켜보았다. 밤을 새우며 6070 농민이 ‘삼천만 잠들었을 때’로 시작하는 농민가를 부르면, 2030 시민은 ‘낭만고양이’로 화답하였고, 여성 농민가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이어졌다. 밤새워 “차 빼”라고 외치며 남태령을 지킨 주축은 2·30대 여성들이었다. 하 의장은 “정말 꿈에도 상상 못 한 일이었”다며, 추운 날 밤에 손녀뻘 되는 젊은 분들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같이 행동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냐고 덧붙였다. 겨우 100명밖에 안 되는 시위대가 연행되지 않도록 지킨 것은 1000명의 시민이었다.

투쟁단 주최측은 진행 마이크를 내려놓고 광장의 시간을 온전히 시민들에게 맡기자고 결정하였다. 농민들은 시위의 주도권을 시민들에게 넘기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누구나 무대 위에 올라가서 발언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자 새벽에 발언을 신청한 사람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무대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발언 신청이 쇄도하였다. 남태령에서는 농민, 여성, 성소수자, 노동자, 이민자, 청년 등 모든 참가자가 사회에서 각기 겪은 차별과 소외의 경험에 공감하는 청중이자 발언자였다. 소외된 이들에게 또 다른 소수자들이 손을 내밀었고, 남태령은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가 되었다.


무박 2일의 투쟁 끝에 이튿날 오후 4시, 28시간의 대치 끝에 차 벽이 열리고 30여 대의 트랙터 중 10대가 한남동 관저가 있는 한강진역까지 닿을 수 있었다. 이날 아침이 밝을 즈음에는 응원봉과 방한용품을 들고 속속들이 도착한 시민들이 3만여 명까지 불어났으며, 이들은 차벽이 열린 이후에 농민들과 함께 사당역까지 행진하였다. 투쟁단은 트랙터를 몰고 한남동 관저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많은 시민도 관저로 합류하여 시위를 이어 나갔다. 이들은 이 사건을 ‘남태령 대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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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과 시민들이 함께한 남태령 대첩은 연대의 광장을 새롭게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위에 참여한 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날 밤의 남태령은 ‘희한한’ 공간이었다. 시민들은 단순히 투쟁단의 트랙터를 막는 경찰의 행위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왜 농민이 트랙터를 타고 서울까지 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고 분노하였다. 동시에 오랫동안 농민이 겪어온 차별과 소외의 역사를 이해하고, 동료 시민이자 함께 투쟁하는 동료로서 연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부장적 문화가 지배적인 고령화 사회’라는 고정관념 하에, 폐쇄적이라 여겨지던 농촌 공동체의 농민들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시민들의 문제에 연대하기 시작했다. 남태령의 광장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분리된 공간에서 살아가며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고 두려워한 이들이 한곳에 모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우리가 될 수 있었다. ‘다시 만난 세계’가 그곳에 있었으며, 트랙터를 모는 농민의 손과 응원봉을 든 여성의 손, 그리고 깃발과 핫팩을 든 모두의 손이 서로를 맞잡았다. ‘남태령의 기적’이라는 말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28시간이었다고 사람들은 회상하였다.



오랫동안 농민은 소외되어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전통적인 농촌 지역에서도 농민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으며, 이들의 목소리 또한 함께 작아졌다. 대부분 고령으로 이루어진 농촌 공동체는 디지털 시대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적절한 수단을 확보할 수 없었으며, 수도권 및 대도시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회운동에 함께 자리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지방 각지에서 전개되는 농민 운동은 지역신문에 작게 보도될 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 수 없었다. 아무도 이해해 주지 않는 곳에서 농민들은 외로움을 견디고, 억울함을 삼켜야만 하였다. 그러나 남태령 대첩 이후, 농민들은 젊은이들 덕분에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하였다.


“어제와 그제, 남태령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우리 농민들이 그걸 다 위로받고도 남을 인생의 경험을 했습니다. 젊은 여성분들이, 시민분들이 혹한의 밤에 모여 농민들의 어려움을 함께해 주고, 또 억울함을 풀어줬습니다. 마음뿐 아니라 몸으로 행동해 주시고, 후원으로 관심을 보내주셨습니다. 농민들도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에 우리도 사는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해줘서 진짜 고맙습니다. 사실 시골 가면 밤 되고 해 떨어지면 아무도 못 보거든요. 어제 농민들이 전부 다 '살다 살다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호응해 줄 줄은 몰랐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울면서 돌아갔습니다.”[6]



지난 2016년 박근혜 탄핵 때에도 농민들은 트랙터를 몰고 서울의 시위 현장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양재IC에서 가로막힌 행진단은 끝내 서울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당시의 전봉준투쟁단을 이끈 김영호 전 전농 의장은 인터뷰에서, 당시의 설움이 남태령과 겹쳐 보였다고 밝혔다[7]. 긴 트랙터 행진으로 피로에 지친 농민들을 기다린 것은 경찰의 곤봉과 발길질, 강압적인 체포였다. 당시 시위 인원 중 5명이 부상을 입고 36명이 연행되었으며, 김 전의장 역시 경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렸다. 광화문의 촛불 시민을 침묵으로 지켜보던 경찰은, 상경한 농민에게 가차 없이 무력을 휘둘렀다. 당시 농민들은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 이후에도, 자신들의 머리에 무자비하게 진압봉을 내리치는 경찰들을 보며 “농민은 이 나라의 하층민이구나”라는 생각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8].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농민이라는 정체성이 진입하는 것을 오랫동안 허용하지 않았다. 마치 농민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닌 듯, 농민 정체성을 앞에 내걸고서는 서울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19세기 말 동학농민운동부터 이어진다.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끝내 넘지 못한 그 우금치가 바로 여기 남태령입니다. 이번에는 넘고 싶습니다. 반드시 넘어야만 합니다. 기필코 넘을 것입니다”라고 전농이 긴급호소한 바와 같이, 농민 운동은 오랫동안 서울로 향하였다. 전봉준을 필두로 한 동학농민군은 국가의 수탈과 부패에 저항하며 혁명하였고,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의 손을 빌려 이를 제압하였다. 우금치 전투의 패배로 인해 농민군은 당시 한성으로의 진입이 좌절되었고,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전농, 전여농 운동이 ‘전봉준투쟁단’의 이름을 계승한 것처럼, 오랫동안 농민 운동은 ‘서울’에 맞서는 소수 세력으로서 그 의의를 지녀왔다. 그동안 농민에게 서울은 투쟁하여 쟁취해야만 하는 대상이었으며, 저항해야만 하는 다수 세력이 주둔하는 공간이었다. 농민들은 오랫동안 서울의 높은 장벽 앞에서 외치고 투쟁하고 외면당하고 좌절해 왔다. 그러나 남태령 대첩은 농민들에게 130년 만에 서울이라는 굳건했던 장벽이 뚫리는 순간이었던 동시에, 그 속의 이들과 연대하고 이해하고 결합하는 경험이 되었던 것이다. 서울과의 오랜 대립과 분리가 무박 2일의 투쟁 속에서 새로운 연대의 국면을 맞이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한편, 남태령에서의 경험은 2·30대 여성들을 포함한 수도권의 시민들에게는 농민 의제를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민들은 처음 남태령으로 향할 때, 트랙터 대행진을 하게 된 정확한 농촌 의제를 이해하고 간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9]. 이들 중 일부만 양곡관리법에 대하여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였다는 것을 알았을 뿐, 농촌 의제에 대해 이전까지 큰 관심을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나 광장으로 올 권리가 있다고 믿었고, 그 내용에 얼마나 동의하는지에 앞서 메시지가 전달되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농민 의제에 시민들이 귀를 기울이기 위해 찾아간 공간은 점차 모두의 삶을 이해하는 공간이 되었다. 밤새 진행된 시민 발언에서는 다양한 개별 의제들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밝혔고, 농민 의제와 탄핵 시국에 대한 발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삶의 양태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잘 알지 못한 의제를 발언하여도 아무도 비아냥거리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그렇구나, 알아두겠다”[10]라는 말처럼,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투쟁을 하면서 살아가는 다양한 삶의 주체라는 것을 그 순간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태령은 서로를 특정한 필요에 의해 잠시만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삶의 투쟁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동지로서 이해하는 공간이었다. 동시에 폐쇄적이고 가부장 중심적이라고 생각해 왔던 농민이 현대의 다양한 의제들에 연대할 수 있는 열려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린 공간이기도 하였다. 남태령의 길고도 긴 밤 동안 사람들은 서로의 개별 의제들에 대하여 공감하고 연대하였으며, 농민들과 서울 시민들은 인간 대 인간으로 친밀하게 접촉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였고, 그렇기에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고 낯설게, 혹은 두렵게 느껴왔다. 그러나 서로를 만나고 대화하고 감각할 수 있는 공간을 통해 ‘그들’을 ‘우리’로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농민의 문제는 '나'의 먹거리로, 노동자의 문제는 '나'의 일자리와 노동으로, 누군가의 인권 문제는 '나'의 인권으로 인식되었다. 누군가의 문제는 곧 나와 우리의 문제가 되었고, 누군가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 되었다.”

[11]


남태령에서 시민들은 정체성이 교차하며 연대하는 감각을 일깨우고 공유하였다. 시민들은 서울을 향해 행진해 온 농민들이 자신들의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매일 먹는 농산물이 어디서 재배되었고 생산되었는지를 느꼈다. 그리고 부당한 공권력 앞에서 다른 정체성들이 한곳에 모여 저항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누구나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각자의 삶에서 각자의 투쟁을 하는 중에 서로를 만나고 의지하고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공간을 실현시켰다.


농촌은 농번기에 ‘품앗이’를 통해 부족한 일손을 채운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서로서로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한데 모여 이 밭, 저 밭을 다니면서 밭일을 돕는 것이다. 나의 밭일이 급한 만큼, 함께하는 다른 사람의 밭일도 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한 명이 30일을 일하기보다 30명이 하루를 일할 때 훨씬 더 많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움받은 만큼 일손을 나누고, 내 마음이 급할수록 다른 사람 밭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 남태령은 다른 어느 곳의 집회보다도 2·30대 여성과 퀴어들의 비중이 높은 공간이었다. 이들은 사회적 약자로서 받는 불이익과 불합리함을 언제나 직접 체감하였고,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가 연대를 요청할 때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있었다. 차별과 혐오에 맞서는 마음이 돌고 돌아, 서로의 짐을 나눠 들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품앗이가 잘 되는 마을일수록, 마을 전체의 농기계 수가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장집에는 트랙터, 얼룩발바리 집에는 땅속 작물 수확기계, 박씨 여사 집에는 탈곡기, 빨간 처마집에는 콩 심는 막대기가 있다.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모든 도구들이 각자의 집에 흩어져 있다. 바꾸어 말해보자면, 필요한 물건이 부족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장소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서로를 돕게 된다. 농촌 공동체의 대다수가 고령 노인인 지금, 농민들은 제때 시의성 있는 정보를 접하거나 젊은 세대가 주로 이용하는 플랫폼들을 통해 농촌 의제를 전파하기에 어려움을 지닌다. 물론 농민 중에 SNS 이용에 능한 비교적 젊은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절대다수의 농민들이 그러한 플랫폼을 통해 정보에 접근하고 전파하는 것에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보 교류에 능하며 실시간 소통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SNS에서 전파된 농민의 호소글을 보고 한달음에 달려왔다는 것은 연대가 앞으로 이뤄낼 수 있는 국면들을 명확하게 시사한다. 연대할 의지가 충분하게 있으며,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여성 청년들과 퀴어들이 농민의 부족한 일손을 채워준 것이다. 연대가 필요한 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대가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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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연대를 위해 모인 농민, 여성, 성소수자, 그리고 수많은 시민은 서로를 보호하고 지켜내는 안전한 공간을 꾸려내었다. 혹한의 추위에서 마지막 전철이 끊기자, 농민들은 시민들에게 이곳은 위험하니 제발 돌아가달라고 사정하였다. 그러나 단 한 명의 시민들도 돌아가지 않고 농민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남태령은 서로를 보호하고 돌보는 공간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음식과 방한용품이 서로의 손을 타고 뻗어나갔다. 사람들은 각자 챙겨온 핫팩과 장갑 등 방한용품을 주변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넘겨주었고, 혹여나 음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까 김밥 한 줄을 받으면 절반을 주변에 넘겨주었다. 따뜻한 물이 생기면 옆 사람과 나눠마셨고, 아픈 사람이 생기면 너나 할 거 없이 길을 열고 자신의 차에 히터를 틀어주었다. 인근의 여자 화장실이 붐비자 남성들이 먼저 남자 화장실을 양보하였고, 시민 발언에서는 각자의 정체성과 의제들을 들으며 모두가 호응하였다. 모두가 같은 세상을 살기 위해 함께 투쟁하고 연대하며, 서로를 돌보는 공간을 꿈꿔왔던 사람들은 그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다.


전봉준투쟁단은 시민들에게 ‘우리’의 힘으로 만든 ‘남태령 대첩’의 감사 인사를 전하며, 광화문 시위에서 연대를 상징하는 1만 개의 무지개떡을 돌렸다. 다양한 색이 한데 모인 무지개떡은 전통적으로 다양성과 조화를 상징한다. 부모는 어린아이 생일상에 무지개떡을 올리며 ‘세상 만물과 사이좋게, 우주와 조화롭게’ 지내라는 소원을 담았다. 행운과 풍요, 평화를 비는 무지개떡은 이제 모두가 함께하는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남태령에서 시민과 농민은 ‘우리’가 되었고, 꿈꾸던 더 넓은 연대를 체험하였다. 김윤천 전농 제주도연맹 지도위원은 “남태령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이자 연대의 승리”라고 말하며 감사 인사를 전하였고, 시민들은 앞으로도 농민에 지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렇기에 마침내 투쟁단의 트랙터가 한남동에 도착한 순간, 서로의 삶에 함께하게 된 이들이 ‘우리가 이겼다’고 외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남태령의 기억을 통해 서울과 지방, 농촌과 도시 사이에서 흐릿하게 부유하던 정체성을 연대라는 이름 안에서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남태령에서의 시민 발언 중, 한 여성은 스스로를 충남 농가의 딸이라고 소개하며, 홍대에서 열린 오타쿠 파티에 참석했다가 소식을 듣고 남태령에 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의 트랙터를 아이돌 팬의 응원봉에 비유하였고, 농민의 삶을 쌀밥, 막걸리, 제철 먹거리 등으로 유쾌하게 연결 지으며 서로의 공감대를 연결해 보였다. 이를 통해 더 많은 경계선을 넘나들수록 더 많은 이들에게 공감하고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느꼈고, 나의 부유하는 정체성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떠올릴 수 있었다. 농촌을 경험하고 농민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20대 여성으로서, 그리고 서울권 대학교에서 대학 언론으로 활동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연대에 함께할 수 있을지 상상하게 되었고, 기대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내가 서있는 정체성들의 교차점을 인지하고, 내가 얼마나 더 많은 경계를 뛰어넘어 살아갈 수 있을지 꿈꾸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번 겨울, 펜을 들고 남태령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젊은이들은 과거 계엄에 맞서 피 흘리며 민주주의를 지켜낸 앞 세대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이제 그 감사를 저 젊은 친구들에게 돌려주고 싶다. 정말 고맙다. 그대들…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로 교체되는 것이 기껍고 반갑다. 지난 시대와 함께 늙어 소멸되는 것이 조금도 슬프거나 억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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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 대첩을 계기로 24일 전장연 집회에 처음 참가한 조수진은 민중가요 노랫말에 있던 ‘깨부수자 성차별’을 기억한다. (…) “옛날부터 연대를 해주신 거예요. 나도 저 공로의 혜택을 받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금은 이 같은 일들을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임을 위한 행진곡’ 중)라는 노랫말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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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앞으로의 농촌은 어떻게 되는가.


남태령에서의 승리 이후에도, 농민들의 삶은 지속된다. 전봉준 투쟁단이 트랙터를 끌고 ‘윤석열 탄핵’을 외치며 서울로 올라가게끔 한 도화선, 양곡관리법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2023년 3월 23일,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이 발의한 민생 법안 1호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그러나 4월 4일, 윤 대통령은 1호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하며 이를 맞받아쳤다.[14] 전례 없는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발 사태의 시작을 알린 것이 바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다. 삼권분립 체제에서 국회의 입법권을 무효화시키는 대통령의 거부권은 그 자체만으로 엄중하다.[15] 대통령실에서 ‘거부권이라는 부정적 용어보다 법적 용어인 재의요구권을 사용해달라’고 한 만큼 그 파급력은 엄중하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하여 ‘포퓰리즘 법안’, ‘강제 매수법’이라고 강하게 비난하며[16], 노골적으로 농민 의제를 홀대하였다.


쌀은 농민의 주된 소득원으로, 농가 경제 안정을 결정짓는 작물이다. 쌀값 투쟁이 언제나 모든 농민의 투쟁이었던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문에 양곡관리법은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50년 2월 제정된 양곡관리법은 국가가 쌀 가격을 관리하는 것을 골자로 하여, 쌀이 과잉 생산되거나 쌀값이 너무 떨어졌을 때, 정부가 이를 매수하는 등 수급을 조절하여 쌀값을 안정시킨다는 내용이었다. 대한민국의 주식인 쌀은 식량 안보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양곡관리법 제1조에 “이 법은 양곡의 효율적인 수급관리와 양곡증권정리기금의 설치 등을 통하여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함으로써 국민경제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나타난 바와 같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내수 식량수급이 국내외 정세에 타격받지 않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 법이다. 동시에 헌법 제123조 1항에서 “국가는 농업 및 어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하여 농·어촌종합개발과 그 지원 등 필요한 계획을 수립·시행하여야 한다”고 명시한 바의 취지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곡관리법을 통해 우리나라는 식량위기에 큰 타격을 받지 않는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하여 전 국민이 힘든 시기를 보냈던 2007~2008년 즈음하여 글로벌 식량위기가 있었다. 기상이변과 중국발 농작물 수요 증가 등 복합적인 요인들로 곡물의 가격이 급등하였고, 세네갈, 이집트, 모로코를 비롯한 아프리카 일대와 볼리비아, 예멘, 우즈베키스탄, 파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 그리고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인접한 동남아시아 지역들에 들불 번지듯 폭동이 이어졌다. 한편,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는 멕시코에서는 ‘토르티야 시위’가 있었다. 미국과 UN이 바이오 에너지 사업을 지원하겠다고 결정하자, 초국적 곡물 메이저 기업들이 바이오에너지 산업에 진출하였다. 이때 옥수수가 바이오 연료의 원물로서 각광받으며 가격이 폭등하였다. 멕시코 시민들은 주식인 옥수수를 구매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고, 정부가 가격 상한선을 설정하기 전까지 연일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나라 시장은 금융위기에 비하여 식량위기에 둔감하였다. 국내 곡물 자급률이 20% 수준에 불과한 것에 반하여, 주식인 쌀 자급률이 90%를 넘기 때문에 세계적인 식량위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지 않은 것이다. 주요 생산국들에서 식량 수출을 제한하거나 수출가를 크게 올린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주체적인 식량안보를 지킬 수 있는 국가였다. 그러나 이런 안전함이 도리어 국내의 식량주권에 대한 낮은 인식과 안이한 대처로 이어졌다. 말 그대로 “글로벌 금융위기는 아는데 식량위기는 모르는”[17] 정부가 이어졌고, 식량 의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시민들 또한 줄어들었다.


2000년대 이후 쌀값을 둘러싼 문제가 점차 심화되었다. 식생활의 변화, 가족 형태의 변화 등으로 인하여 쌀 소비가 차츰 감소하였으며, 시장의 남는 쌀과 그로 인한 폭락 문제가 되풀이되었다. 이에 대하여 정부는 쌀값이 일정 금액에 미치지 못하면 정부가 차액을 보전해 주는 ‘쌀 소득보전직불제’, 논에 타 작물 재배를 유도함으로써 과잉생산을 방지하려는 ‘쌀 생산조정제’ 등의 제도를 도입하며 시장에 개입해 왔다. 그러던 지난 2021년 10월 풍작으로 쌀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산지 쌀값이 내림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농림축산식품부는 ‘초과생산된 쌀을 매입할 수 있다’는 기존 양곡관리법의 재량 조항을 수행하지 않고 시장을 지켜보기로 결정한다. 그 결과, 이듬해인 2022년, 수확기를 앞둔 9월에 시장 쌀값은 20% 넘게 급락하였다. 이는 45년 전 쌀값 통계 관측 이래로 전례없이 가장 큰 하락폭이었다. 이에 국회에서는 의무 조항이 추가된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여 발의되었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에서 이전과 바뀐 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쌀 초과 생산량이 3~5% 이상이거나 가격이 5~8% 이상 떨어지면 과잉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수매해 쌀 가격을 안정화한다’는 내용에서 드러나듯, 원래 ‘매입할 수 있다’라는 재량 조항을 ‘매입하게 하여야 한다’는 의무 조항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논에 쌀 외에 다른 작물을 재배할 경우 재정적 지원을 한다는 조항도 추가되었다.

당시 야권 등 개정안에 찬성하는 측에서는 쌀 의무 매입을 통해 일시적 생산 과잉 문제를 안정시키고 쌀값을 안정시킬 수 있으며, 동시에 타 작물 재배 지원을 통해 쌀에 집중된 기존의 국내 농업구조를 변화시켜 구조적 생산 과잉을 극복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였다. 반면 개정안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의무 조항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매입할 수 있다’는 재량 조항을 정부가 시의적절하게 잘 발동한다면 현행 법률로도 충분히 쌀값 폭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또한 정부가 의무적으로 쌀을 매입하였을 때, 쌀농사 의존도가 심화되고 쌀 재배에 집중된 현재의 구조적 생산 과잉을 극복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농민들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국회 논의를 거치며 고질적인 쌀값 폭락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의무 매입 기준이 미약한 선에 그쳤다고 지적하였다. 당초 논의에서 ‘쌀 초과 생산량이 3% 이상이거나 가격이 5% 이상 떨어’졌을 때, 의무매입해야 한다고 지정한 바와 달리, 표결에 부친 개정안에서는 초과 생산 ‘3~5%’, 가격 하락 ‘5~8%’로 조정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쌀 초과 생산량이 5% 이상이 되거나, 가격이 8% 이상 떨어지기 전까지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된다고 규정한 바와 다름없다. 농민들은 ‘국회에 농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도, 농민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사람도 전무하다’며 크게 유감을 표하였다.

동시에 전농과 전여농은 성명서를 통해 현재의 쌀값 폭락의 원인은 농민들의 과잉생산이 아닌 ‘수입쌀’ 때문이라고 밝혔으며, 정치권에서 쌀값 폭락의 원인을 농민에게 돌리고 양곡관리법을 정쟁거리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한국은 지난 1995년 WTO 가입 이후, 20년 동안 쌀 관세화를 유예하는 대신 미국 등의 쌀을 수입하고 있는 상황이며, 매년 40만 8천 700톤에 달하는 수입쌀이 시장에 풀린다. 쌀 자급률이 90%인 상황에서, 쌀값 안정을 위해 국내 쌀의 생산을 조절할 것이 아니라 수입을 조절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정부가 논에 콩과 들깨 등의 타작물을 심을 것을 권하는 것 역시, 농업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것이라며 비판하였다. 벼를 심는 논은 예로부터 침수가 잦은 저지대 평야에 위치하거나, 물에 쉽게 젖는 땅들에 위치한다. 물에 강한 벼의 경우, 홍수로 밭이 완전히 침수되어도 일주일 정도는 문제없이 버틸 수 있다. 그러나 여타 밭작물은 잠깐이라도 침수 피해를 입을 경우 치명적이다. 정부가 전략작물직불제[18]를 도입한 이래로 많은 농가들이 이에 참여하였지만, 재작년 작년에 잇따라 논에 심었던 밭작물들이 홍수 피해를 면치 못한 상황이다. 게다가 농민들의 80% 이상은 고령농으로, 재배 작목을 손쉽게 바꾸기 어려운 상황이다. 상품성 있는 농작물을 기르기 위해 재배법을 연구하고, 농사에 필요한 농기계를 구비하며, 밭을 새로운 작물에 적절하게 가꾸는 등 작목 하나를 바꾸는 데 몇십 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전략작물직불제, 양곡관리법 개정안 등의 영향으로 많은 쌀 농가가 재배 작물을 바꾸고 있는 상황이며, 2021~2022년 쌀가격 폭락으로 인하여 많은 농가들이 벼농사에 부정적이다. 또한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가뭄 등 이상기후가 반복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였을 때, 올해 쌀 생산량이 당초 예상한 바보다 턱없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농민들은 농업에 대한 이해 없이 농민들의 과잉생산만을 문제의 원인으로 보고 지적하는 탁상공론에 비판을 이어가는 상황이다.



이와 같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2023년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되었지만, 그 다음 달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고 재의결에 실패하며 폐기되었다. 이후 민주당은 초과 생산량을 의무적으로 ‘매입하게 해야 한다’는 조항 대신 ‘대책을 수립·시행해야 한다’고 내용을 수정한 양곡관리법 개정안[19], 그리고 농산물 가격이 적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일부를 보전해 주는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그러나 결국 두 법안은 여야 합의 결렬로 인하여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로 21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폐기되었다. 이후 2024년 다시 한번 동일한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과 농안법 개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였으나, 12월 19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농업 관련 법안 4건[20]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였다[21].




양곡관리법 사태는 두 가지 지점과 맞닿아있다. 우선 국내 정치사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농민을 홀대하는 정부·여당의 행태이다. 물론 과거에도 꾸준히 농업 예산을 삭감하는 등 정부는 농민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국회에서는 농민을 대변하기는커녕 농업에 대한 이해를 갖춘 의원조차 턱없이 부족하였고, 청와대에서는 농업 담당 비서관이 오랫동안 공석으로 남아있었다. 양옥희 전여농 회장은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농업이 존중된 적이 없다”며 국내 식량주권 인식의 미약함을 비판하였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값 문제에서 정부는 언제나 농민의 손을 들어주었다. 언제나 쌀농사는 한국 농업 전반을 대변하였으며, 쌀값의 폭락·폭등 문제는 언제나 국내 농업계의 흥망성쇠와 강하게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정부에서 쌀값 문제에서 농민을 척진다는 것은 농민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와 마찬가지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번 정부는 오랜 금기를 깨고 농민들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또 하나는 지금까지 보호해야 할 ‘가치’로서 다루었던 쌀을 ‘시장재’로 여기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쌀은 시장재가 아닌 ‘정치재’였으며, 시장 질서와 상관없이 정치권의 안보 자원으로서 관리해 온 작물이었다. 그러나 “시장의 쌀 소비량과 상관없이 남는 쌀에 막대한 혈세를 들인다”는 전례 없는 표현과 함께 쌀의 가치가 흔들리게 되었다. 2023년 1월 16일 양곡관리법에 대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에 의하면 몇몇 국회의원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위헌적이라며 크게 반발하였다[23]. 쌀이 초과생산이 되었을 때는 국가가 수매를 해야 하는데 양파는 왜 방치하냐는 발언, 형평성과 시장경제의 기본 질서를 훼손한다는 발언이 이어진다. 심지어는 “도시 근로자들은 왜 일해야 됩니까? 자기의 임금은 시장에 맡겨져서 열심히 벌어서 세금 내는데, 왜 농민은 시장 격리 조치를 의무화해서 적정 소득을 보장해야 합니까?”[24]와 같은 도발적인 발언도 이어졌다. 아이러니한 점은 농민들 또한 당연하게도 열심히 벌어서 세금을 낸다는 것이다. 시장격리 의무화를 통해서 보장받을 수 있는 적정 소득 또한 최저시급의 선에 한참 못 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농작물의 가격이 1년의 수입으로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작물 가격이 오른다는 것은 그해 제대로 수확을 한 농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매일같이 고된 육체노동을 해야만 하는데도, 폭염이나 폭우 한 번에 한 해의 수확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하루아침의 천재지변으로 손해만 잔뜩 안고 그해 농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요즈음의 현실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농업에 대한 일말의 이해조차 없는 정부에 의해 선한 도시민과 악한 농민 갈라치기의 피해자가 되어버린다. 결국 양곡관리법 법제사법위원회로부터 한 달 뒤, 대통령실 관계자발로 “양곡법 개정안에 위헌성이 있다”는 짤막한 입장이 표명되었다. 헌법을 무기로 휘두르며 오랜 사회적 가치를 훼손하는 순간이었다.


주목할 것은 쌀을 시장재로 바꾸려는 시도가 명백하게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늘 그러하듯 이분법의 언어로 선량한 국민과 구분되는 ‘적’을 설정하였다[25]. 장애인, 외국인, 여성, 노조 등 편을 갈라 ‘나’와 ‘타자’를 구분하고 약자를 배척해 온 역사는 농민에게도 마찬가지로 그 그늘을 드리웠다. 현 정부에서 공정과 자유에 반하는 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쌀이다. 여당 국회의원들의 발언처럼 쌀은 양파 농가, 도시 근로자, 시장경제의 적이 되었으며,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을 갈라칠 수 있는 손쉬운 무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고령자인 농민층에서는 온라인을 포함한 각계의 공론장에서 스스로를 방어할 ‘스피커’가 거의 없다. 게다가 쌀 농가 상당수는 호남 지역에 있다. 현 정부의 갈라치기 혐오주의 정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화물차·건설 노동자에 이어 현 정부가 때릴 만만한 적이 바로 농민”[26]이라고 할 법하다.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의 저자 김태호 교수는 이번 양곡관리법 논란을 바라보며, 과거 한국인에게 ‘마음의 빚’과 같은 존재였던 농촌과 농민에 대하여, 최근 복지 부담을 가중시키는 존재라는 모멸적 시선이 많아지는 것에 유감을 표하였다. 또한 여성, 퀴어, 이주민에 이어 농민 또는 시골 사람도 혐오 정서의 대상이 되었다며 사람들의 고민과 대책을 촉구하였다.



오늘날 쌀 중심으로 고착화된 농업 생산구조는 오랫동안 이어진 정치적 상호작용의 산물로서, 농업 주체인 농민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문제이다. 1960년대 박정희 정부는 식량부족 문제를 타개하고자 ‘쌀 자급률 100%’를 목표로 쌀 재배를 적극 지원하였고, 통일벼 보급을 위해 높은 가격에 쌀을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쌀 한 톨이라도 개방하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공언한 김영삼 대통령 시대를 지나며, 농민은 ‘쌀은 정부가 책임진다’는 일종의 사회계약을 신뢰하게 되었다. 동시에 양파 파동이나 고구마 파동이 일었을 때, 국가는 쌀만큼 가격 폭락에 대하여 책임지지 않았다. 1990년 시작된 농산물 개방에서 쌀만은 제외한 ‘쌀 예외주의’가 농정을 지배하였고, 기상이변이나 과잉생산 등 농작물 가격파동이 일 때마다 피해를 본 농가들은 쌀농사로 속속들이 전환하였다. 여타 농작물을 재배하여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쌀농사 외에 열린 길을 찾아볼 수 없었다. 추곡 수매, 직불금, 휴경 보상 등 쌀 생산에 편중된 정책 지원과 보조금이 이어지며 농민은 쌀 재배에 의존해야만 하였다.



오랫동안 정치재로서 예외주의의 대상이 되었던 쌀은 결국 시장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었다. 1995년 20kg에 30,143원이었던 쌀은 2022년에도 46,869원이었으며, 2024년 말에는 오히려 조금 감소한 45,675원 수준으로 나타났다.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쌀 가격이 동결되다시피 유지된 것이다. 소비자물가지수를 단순추산하였을 때에도 1995년 30,143원의 가치는 오늘날 6만 원을 훌쩍 넘기는 수준이다. 처음부터 정부의 개입 없이 자유롭게 시장에서 거래되었다면, 양곡관리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높게 쌀값이 책정되었을 것이다.

쌀 재배면적 역시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이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시행된다면 훨씬 더 많은 농가가 쌀농사로 전환하면서, 쌀농사 의존도가 심해지고 과잉생산이 이어질 거라는 현 정부 및 여당의 예측과는 달리 쌀 재배면적은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2002년만 해도 105만 헥타르였던 쌀 재배면적은 현재 70여 헥타르에 불과하다. 쌀 중심의 생산구조라 할지라도, 결국 고령화와 도시화로 인하여 농민 인구가 줄게 되면서 절대적인 쌀 생산량도 하강세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민주당에서 양곡관리법 개정안으로 정말 더 많은 농민이 쌀농사를 짓게 된다면 환영할 일이라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그러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통과된다고 해서 농가 인구가 늘거나 농촌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는 무척이나 섣부르다. 2023년 통계청은 2인 이상 농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농가경제조사 결과, ‘농가소득’이 처음으로 연 5천만 원을 넘어섰다고 알렸다. 이에 따라 “농가소득 5천만 원 시대, 귀농해볼까?”라는 제목의 기사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농업소득’ 자체는 암울한 수준이다. 통계 자료 속 연 5천만 원을 넘긴 농가소득은 농사를 통해 벌어들이는 ‘농업소득’ 외에도 ‘농업 외 소득’과 ‘이전소득’ 등이 포함된 것을 의미한다. 농가소득 중 식당이나 도소매업 등 다른 부가적인 경제활동으로 얻은 ‘농업 외 소득’이 39%, 국가 보조금과 정부의 노령연금, 직불금, 자녀의 용돈 등으로 이루어진 ‘이전소득’이 33%에 달하는 수치이다. 농업소득 자체만으로는 전체 소득에 21%에 불과하며 한 해 평균 천만 원을 조금 넘는 정도인 것이다. 주목해 볼 점은 하나 더 있다. 위에 서술한 평균 소득이 농민 개인의 수치가 아니라, 농민이 가족구성원에 포함되어 있는 농가의 한 해 소득이라는 것이다. 즉 2인 이상 가구일 경우의 농업 소득이 연평균 천만 원에 불과하다.

농촌의 4인 가구를 상상해 보자. 5060 세대의 부모님은 농민으로서 적당한 규모의 오이 농사를 짓는다. 이들은 새벽에 밭으로 나가 밭일을 하다가, 태양 빛이 뜨거워질 무렵에는 작은 백반집의 문을 열고 점심 장사를 시작한다. 오후에는 해가 지기 전까지 부지런히 농기계를 손보고 밭을 보수하고, 다음 주 장맛비에 맞춰 사용할 비료 사오십 포대를 옮긴다. 서른을 바라보는 이들의 두 자녀는 결혼하지 않고, 가구원으로 남아있다. 첫째는 차로 40분 거리의 정형외과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고 있으며, 둘째는 근처 노인복지관 행정팀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들의 모든 소득을 합쳤을 때, 농가의 한 해 평균 소득이 책정된다. 작년 대한민국의 1인 가구의 평균 연 소득이 3천만 원 이상인 것을 고려하였을 때, 농가의 살림살이는 마냥 넉넉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들어 음식과 숙박, 도소매 서비스 등에서 농업 외 소득이 증가하는 추세이다. 봄겨울 등 농업소득이 발생하지 않는 농한기 등이 있고, 기상이변이나 농산물 가격 폭락이 잦아지며 농업소득만으로는 생활하기 힘든 현실이다. 농민들은 최저시급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시간 및 강도 대비 낮은 수입만을 기대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농촌 지자체에서 고령 노인을 대상으로 제공하는 공공 일자리 사업에 수백 장의 지원서가 날아드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농업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 손으로 일구기 어려울 만큼 큰 농지가 필요하다. 상품성 있는 작물을 길러내기가 어려울뿐더러, 가뭄이나 장마가 길어질수록 한 분기의 농사를 ‘엎어버려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농작물을 납품처에 출하할 수 있을 정도의 농가에서는 몇천 평 내지는 몇 헥타르 이상의 양질의 농지가 필요하며, 트랙터 등 고가의 농기계 없이는 수확하기 어려울 정도의 농지여야 그나마 수입이 생긴다고 할 수 있다. 경지 규모가 3헥타르 이상인 농가의 평균 농가소득은 7천만 원 정도인 반면, 0.5헥타르 미만인 농가의 소득은 4천만 원 언저리에 그쳤다. 경영 규모가 크고 농사를 전업으로 해야만 일정량 이상의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으나, 한편으로 소득의 불안정성 또한 늘어난다는 한계도 있다.

충남 서산에서 3헥타르 이상 농사를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설회사의 명함을 가지고 있었던 한 농민은 “농사를 짓고는 있지만, 농산물 가격이 워낙 들쭉날쭉하다 보니 ‘고정된 수입’이라는 것은 없어서, 다른 일을 하면서 농사를 지어야 생계가 유지된다”[27]고 설명하였다. 농작물 가격이 좋다고 하여 무조건 수입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결국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시장에 출하할 만한 농작물이 제대로 생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산지에서 출하가 시작되면 농작물의 가격이 무조건 내려가는데, 인건비와 비룟값, 농약값 등 부자재의 가격은 계속해서 올라가는 추세이다. 농산물을 판매할 때는 도매가격으로 팔지만, 각종 재료비는 소매가격으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물가 상승세 속에서 점점 손해를 입는 상황이다.


‘농사지어도 본전은커녕 손해만 본다’는 농민들의 말처럼, 오랫동안 악화되던 농가교역조건지수는 2022년을 기점으로 회복이 어려울 수준까지 급락하였다. 농가교역조건지수는 농가가 생산한 농산물과 농사에 사용되는 농기자재, 농업용품 및 생활용품 등의 가격 등락을 비교하여 농가의 채산성[28]을 파악하는데 활용하는 지표이다. 2020년을 기준인 100으로 설정하고, 교역조건지수를 (농가판매가격지수/농가구입가격지수) x100으로 계산하였을 때, 농가의 교역조건지수는 90 정도에 불과하다. 교역조건지수가 100 이상일 때 채산성이 좋아진 것, 100보다 낮으면 채산성이 나빠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농산물 가격이 올라 농가판매가격지수는 올랐지만, 농가가 사서 쓰는 구입가격지수가 더 많이 오르면서 채산성이 악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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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떠한 일을 ‘업’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종사해야만 한다. 농민은 농업을 통해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현재 농가의 20%를 차지하는 1인 농가의 연평균 소득은 2천만 원 정도에 그친다. 국가지원금, 직불금 등 이전소득과 기타 소득을 제외하였을 때, 단순 농업소득은 480만 원에 불과하였다. 이번 연평균 농가소득 통계는 1인 농가 소득이 전부 제외된 수치인 만큼, 농가소득 연 5천만 원의 실체는 한없이 나약하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농민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농업이 가지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어떠한 일을 ‘업(業)’이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일을 통한 생계유지가 가능해야 할 것이다. 농민은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현실은 식당, 마트, 건축, 중장비 등을 전전하며 무엇이 본업이고 무엇이 부업인지 명확하게 이야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당장 하루 세 끼 밥상 위에 오르는 음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며, ‘다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잘’ 먹기 위해서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알지 못한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두고 양파 가격 폭락도 해결하라던 국회의원들은 농수산물 유통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가로채는 유통업체들의 횡포에는 침묵한다. 우리나라는 농산지에서 출하된 농산물의 가격이 서울 가락시장 속 도매법인의 경매에서 결정된다는 복잡한 유통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원양어업, 철강, 건설사 모기업의 거대 도매법인과 중도매인, 소매업체를 거치며 높은 유통비용이 소비자가에 더해진다. 그러나 유통구조를 개선해서 농산물에 제값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농민의 요청은 결국 또 다른 농민을 공격하고, 농민 전체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키우는 수단으로써 왜곡당하였다.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쟁은 ‘농민 혐오’를 강하게 비추는 시대적 징후이다. 취약한 농민에게 갈라치기가 무기처럼 휘둘러지고 있다. “난동 세력에게는 몽둥이가 답”이라고 말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 농민이 기본비용을 마련하면 지자체 등에서 일부를 지원하는 보조금 제도에 따라 적법하게 구입한 트랙터임에도 불구하고 시위에 사용된 트랙터 지원 비용 자료를 내놓으라고 요구한 국민의힘 박덕흠 의원[29], 남태령 시위 이틀 뒤에 전농 간부들에게 집시법 위반 관련 출석요구서를 익일 특급으로 보낸 경찰 등 남태령 이후에도 농민에 대한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농촌과 농업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농민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양곡관리법 기사의 조회수가 폭발적으로 늘었으며, 오랫동안 농민이 겪어왔던 억울함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늘어났다.



4. 땅을 닫으며.


“역사는 지난 이틀을 ‘남태령 대첩’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그저 이겼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혐오와 차별 속에 주류 사회에서 배제되어온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노인, 도시 빈민, 농민이 만든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성별도 세대도 지향도 직업도 다른 이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연대를 넘은 ‘대동의 남태령’을 열어냈기 때문입니다.”

[30]


농민들의 세상은 남태령 전과 후로 나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시의 현대적 의제, 신자유주의 하의 경제와 효율의 논리에서 고립되고 스피커를 잃은 채 공격당하였던 농민들은 새로운 연대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가 남태령 이후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더욱 굳건해지기 위해서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첩첩산중이다. 농민 단체는 가부장 질서에 익숙하다는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성인지 감수성이나 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하였다. 동시에 남태령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였던 것처럼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여전히 농민과 농촌 밖 사람들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이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이나 타인을 감각하고 소통하는 방식,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꿈꾸는 방식들이 종종 생경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사회의 경제 구조는 지극히 인위적이고 개인적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실내 공간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규칙에 맞춰 일하고, 일해서 성과를 낸 만큼 그 보상을 가져간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을 해서 나의 성과를 만들고, 그 보상으로 나의 자산을 축적하는 것이다. 개인의 어려움은 종종 개인의 게으름, 능력 부족으로 여겨지며, 모두가 동등하고 차별 없는 환경에서 살아간다고 착각되곤 한다. 반면에 농촌 속 농민들의 삶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이는 순간의 연속이다. 이른 서리에 수확을 앞둔 농작물이 죽어버리고, 온난한 겨울 탓에 병충해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은 개개인의 잘못을 탓하기보다, 주변에 손길을 나누며 어려운 계절을 견딘다. 풍작과 흉작은 한낱 개인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며, 그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땅이 응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초연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남 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던 도시민들과 ‘내 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던 농민들은 서로의 삶의 궤를 낯설게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태령의 기억은 결국, 모든 것이 다른 이들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꿈꾸게 하였다. “대동의 남태령”이라고 칭한 하 전농 의장의 성명처럼 농촌과 도시가 서로 연결된 세계로서 대동[31]하게 된다면, 그제야 우리는 같은 땅 위를 밟고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땅에서 난 것들을 먹고, 땅 위에서 살아가며, 결국 땅으로 돌아갈 한 생애 동안,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이 이해하고 공감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땅과 멀어지고, 땅을 잊어가는 오늘의 우리는 결국 얼마나 땅을 그리워하게 될까? 이 땅 위에서 각자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언제든 서로 연결되고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나도 나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땅 위에 나를 일으켜 세웠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글을 남기며.



각주

[1] 하지혜. “‘100만 농가’ 깨졌다…더 짙어진 ‘농촌 소멸’ 그림자.” 농민신문, 2024.04.21. https://www.nongmin.com/article/20240419500820

[2] 다음 목차에서 후술할 주제로, 농민들의 안정적인 삶을 위하여 정부에서 쌀 생산 및 유통에 관여할 수 있게끔 하는 법이다.

[3] 트랙터는 일반적인 승용차와는 다르게 운전석을 둘러싼 차체벽이 전부 유리이다. 잘못 깨진다면 크게 다칠 수 있는 크기의 강화유리이며, 깨졌을 때 운전자는 문짝 없이 운행해야만 하는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한다.

[4] 전농 긴급호소문

[5] 김성욱. “트랙터 시위대 총대장 "시민들 '경찰 차 빼' 구호에 눈물...이런 적은 처음".” 오마이뉴스, 2024.12.23., https://omn.kr/2bl4d

[6] 김성욱. 앞의 기사(오마이뉴스). 하원오 전농 의장 인터뷰 인용

[7] 이재환. “"'남태령 대첩', 2016년 양재IC서 막혔던 그때 떠올라".” 오마이뉴스, 2024.12.21., https://omn.kr/2bljj

[8] 김혜형. “남태령의 젊은이들 덕분에 이제 농민은 외롭지 않다.” 시민언론 민들레, 2024.12.22.,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94

[9] 이슬기.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https://omn.kr/2bmge

[10] X(전 트위터)의 한 유저(용주)가 “딸들아, 고맙다”라고 말한 농민에게 ‘충격 논바 진짜 계심’ 깃발을 들어보이며 자신이 논바이너리임을 밝히자, 농민이 ‘그렇구나, 알아두겠다’라며 대답한 것이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재게시 되었다. 이후 정체성 포용과 성소수자 연대 논의의 상징적인 발언이 되었다.

[11] 장지혜. “8년 전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 연대를 경험한 우리가 기대된다.” 오마이뉴스, 2024.12.28., https://omn.kr/2bncv

[12] 김혜형. 앞의 기사(시민언론 민들레)

[13] 이슬기. 앞의 기사(오마이뉴스) 남태령 대첩에 참가했던 15명의 여성과 퀴어 인터뷰 중 발췌

[14] 4월 4일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시작으로, 간호법 제정안, 노란봉투법, 방송 3법, 쌍특검법, 이태원 참사 특별법 등에 대한 거부권 행사가 이어졌다.

[15] 헌법상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자 외국에 대하여 국가를 대표하고, 행정권을 지닌 정부의 수반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근래의 헌법학자들은 대부분 법치주의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권한은 ‘국가원수’로서의 지위가 아닌,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지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동시에 국회에서 ‘법률’을 입법 가능한 것에 반하여, 대통령 및 행정부는 법률의 하위법령인 ‘법규명령’만을 발할 수 있다. 긴급명령, 대통령령, 총리령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입법부의 고유한 권한을 침해하지 않기 위하여 행정부는 반드시 법률보다 하위법령만을 발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대통령이 법률의 효력을 지닐 수 있는 장치가 계엄 등을 포함한 국가긴급권 발동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권한을 능가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행정부에 재량이 있는 법규범보다 상위의 법령을 무효화 시키는 강력한 장치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거부권 남발은 필연적으로 국회의 입법 재량을 훼손하고, 삼권분립 법치 하의 민주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행위가 된다.

[16] 2023.04.04. 윤 대통령 용산 대통령실 국무회의 발언 중 “양곡법 개정안은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서 모두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농가 소득을 높이려는 정부의 농정 목표에도 반하고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법안입니다."

[17] 차형석. “글로벌 금융위기는 아는데 식량위기는 모르는 이유 [편집국장의 편지].” 시사IN, 2023.04.17.,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150

[18] 원래 논에서 쌀을 재배하던 농민이 콩 등으로 재배작물을 바꿀 경우,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

[19] 이는 애당초 농민들이 양곡관리법 개정에 대하여 요구한 바를 거의 반영하고 있지 못하며, 일각에서는 더 이상 본래의 목적대로 기능할 수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농민의 요구사항이 크게 희석되어 원 요구사항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대측의 반발이 극심하였다.

[20] 양곡관리법 개정안,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대한 법률, 농어업재해보험법, 농어업재해대책법

[21] 하 전농 의장은 이에 대하여, ‘한 권한대행 체제로 돌입한 후 가장 먼저 한 것이 농민 관련 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라며 ‘농민을 죽이는 거부권은 절대 안 된다고 호소했음에도 정부가 또다시 농민을 버렸다’고 하였다.

[22] 최지현. ”양곡법 거부, 체포도 거부... 거부의 시대에 만난 대학생-농민.” 오마이뉴스, 2025.01.11., https://omn.kr/2btwn ‘ 2025년 1월 11일 광화문에서 열린 ‘퇴진너머 차별없는 세상을 그리는 청년 대학생 사전집회: 농민과 대학생이 함께 외치는 농민생존권이 보장받는 세상’ 보도기사 발췌

[23] 장동혁 국민의힘 의원 발언 “어떤 경우에도 모든 남는 쌀을 완전 격리해서 정부가 그것을 다 책임져야 한다고 미리 선포하고 가는 것은 지금 헌법 제119조 제1항에서 얘기하는 시장경제의 기본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형수 국민의힘 의원 발언 “쌀에 대해서는 초과생산이 되면 국가가 의무적으로 다 수매를 할 수 있도록 했는데 그러면 양파는 왜 초과생산됐을 때 가격 떨어져도 방치해두느냐, 이 형평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헌법상의 평등의 원칙에 문제가 됩니다. 이게 어떻게 위헌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24]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 발언

[25]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자치언론 문우편집위원회 비상계엄 규탄 대자보 참고. 2024.12.05.

[26] 이오성. “양곡법 거부,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농민을 걷어찼다.” 시사IN, 2023.04.2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146

[27] 이수연. ““연소득 5천만 원이라는데 나도 농사나?”…사실은.” KBS, 2024.05.2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75028

[28] 손익을 따져보았을 때, 이익이 남을 여지가 있는지 판단하는 지표. 사업을 할 때 좋은 채산성이 있어야지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29] 국민의힘 박덕흠 의원은 보은군·옥천군·영동군·괴산군을 지역구로 하는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으로, 해당 국회의원이 속한 지역구는 대부분 산림 및 농촌으로 이루어져 있다.

[30] 전봉준투쟁단 총대장,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하원오. 2024년 12월 22일 성명

[31] 대동: 1) 큰 세력이 합동함. 2) 온 세상이 번영하여 화평하게 됨. 3) 조금 차이는 있어도 대체로 같음.



참고자료


남태령 자료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투쟁단 긴급호소문] 시민 여러분! 2024년의 우금치 남태령으로 모두 모여주십시오!”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share/p/14xoNVMb35/ .

김성욱. “트랙터 시위대 총대장 "시민들 '경찰 차 빼' 구호에 눈물...이런 적은 처음"” 오마이뉴스, 2024.12.23., https://omn.kr/2bl4d .

이슬기, “'남태령 대첩' 참가자 15명이 그날 밤 겪은 '희한한' 일” 오마이뉴스, 2024.12.27., https://omn.kr/2bmge .


농촌·농민 자료

이오성, “양곡법 거부, 대통령이 사상 처음으로 농민을 걷어찼다” 시사IN, 2023.04.2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146 .

이수연, ““연소득 5천만 원이라는데 나도 농사나?”…사실은” KBS, 2024.05.2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75028 .

한국농정. 2016년 ‘농민운동 현장을 찾아서 -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투쟁’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26022 .


첨부 이미지 출처 (본문 내 첨부 순서와 같음)

장윤, “남태령 경찰차벽 철수… 트랙터 시위대 "대통령 관저로 행진"” 조선일보, 2024.12.23.,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4/12/22/SVFFAZSCMFAVZB77XTH7QJBKG4/ .

김성욱. “트랙터 시위대 총대장 "시민들 '경찰 차 빼' 구호에 눈물...이런 적은 처음"” 오마이뉴스, 2024.12.23., https://omn.kr/2bl4d 기사 내 권오성 사진.

이수연, 앞의 기사(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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