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존재의 기록 : 불안의 확장과 수렴

수습편집위원 필자(筆者)

by 문우편집위원회

“나 너무 불안해”

지난여름, 오스트리아의 한 호수마을을 여행했다. 첼암제 (Zell am See)라는 지명을 가진, 관광객도 많이 없는 아주 작은 그 마을은 끝없이 펼쳐진 드넓은 호수를 닮아 고요하고 평안했다. 많은 수도권의 대학생들이 그렇듯 바쁜 도시 속에서 살다 보면 ‘고요’라는 단어와 마주치기가 참 어렵다. 매연을 뿜는 시끄러운 자동차들,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 번쩍거리는 대학가의 네온사인. 그 혼돈 속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내가 들이쉬고 내쉬는 숨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미지1.jpg 첼암제(Zell am See) 호수의 모습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불안을 ‘세계 내의 존재가 자기 자신의 근본적 한계, 즉 죽음을 자각할 때 나타나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그는 인간을 단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에 불과하다고 보며, 이 사실을 자각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본질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인간은 첫울음을 터뜨리는 그 순간부터 이미 불안을 짊어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평생 그와 함께 살아간다.


하지만 삶은 그 불안을 끊임없이 억누르며 무심히 지나간다. 도시의 빠른 리듬은 스스로의 불규칙한 심장박동조차 인지할 수 없게 만들어, 우리는 어느 순간 불안을 망각한 채 일상을 이어간다. 그러다 어느 날, 매일을 살아가던 익숙한 세계와 동떨어진 한 장소에서 그 불안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아, 나 불안해하고 있었구나.

철없던 십 대를 지나 사회에 나선 후, 내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 단지 ‘던져진 존재’이며,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에 막연하게 슬퍼했다. 그 막연한 서글픔은 새로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내 안에 존재해 왔던 불안이다. 다만 그것을 낯선 나라의 호수 앞에서야 발견했을 뿐이다. 내가 느끼는 이 알 수 없는 불안과 답답함은 무엇일까. 그 본질을 규명하고, 감정을 효과적으로 다뤄보기 위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펼쳤다.


불안은 자각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축복받은 무지에서 벗어난 인간을 조롱하듯 일상에서도 불쑥 나타난다. 발 디딘 도시의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느낀다. 그렇게 불안은 아주 서서히, 안에서 바깥으로 확장한다. 나를 흔들던 작은 두려움은 이제 세계 전체를 낯설고 불안한 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작은 심장에서 시작된 불안정한 두근거림이 주변으로 번져가며 점차 몸집을 키운다. 모호하고 흐릿했던 형체 없는 감정이 어느새 모양을 갖춰 나타난다. 그것은 빛이 번지는 가로등으로, 벽에 둘러싸인 세 평짜리 방으로, 때로는 눈앞의 사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게 내면에서 시작된 불안은 외부로 확장되며 한 인간의 세계를 서서히 물들인다. 이 감정의 확장성은 단순히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불안은 마치 절벽 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발걸음과도 같다. 결말이 뻔히 보이는 길 위에서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충동. 절벽 끝에 다다르기 전, 발끝에 묻어 있는 망설임의 흔적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질문에 답하려는 생각은 어느 순간 절벽의 반대쪽을 향해 흐른다.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결말 앞에서도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적 사유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태생적인 불안을 마주하며 깨닫게 되는 것은 죽음인 동시에 삶인 셈이다. 불안은 두 세계의 연결 고리와도 같다.


삶은 죽음보다도 잔인하다. 죽음은 이성이 깨어있는 채로 경험할 수도 없고, 이미 겪은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으니 한계 너머의 것들을 상상하게 만든다. 미지의 무언가는 대개 공허하게 느껴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해방감을 동반하기도 한다. 상상할 수 없기에, 그것은 오히려 자유롭다. 그러나 삶은 다르다. 삶은 너무나도 실재적이며, 숨이 붙어 있는 한 매 순간 우리가 직접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경험에 기반한 귀납적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 반복적인 추론 과정은 종종 목이 올가미에 걸린 듯한 답답함을 불러온다. 죽음이라는 도망칠 수 없는 확정적인 미래. 지나온 삶을 통해 예측할 수 있는 손바닥 위의 도착점. 다시 말해, 삶에 대해 고찰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향해 가속을 붙여 달려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과정에서 불안은 내 안에 은밀히 자리 잡아 존재를 흔들어 놓는다. 마치 본질을 망각한 인간들에게 남겨진 퇴화한 꼬리뼈처럼. 불안은 내가 자신의 한계를 직시할 수밖에 없게 만들며,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은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하며 파헤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하이데거가 말한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불안은 우리를 흔들고 약하게 만드는 동시에, 존재의 깊이를 발견하게 하는 강력한 도구다.


결국,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스물두 해 전에 나와 함께 태어난 한 우주, 그리고 그것이 예정한 마지막이다. 삶과 죽음이라는 불가분의 실체가 바로 내 존재의 근원이자 불안의 원천인 셈이다.



“이 세상이 흔들리면 나도 흔들려”

특이하게도, 불안은 확장하는 동시에 수렴한다. 주변의 아주 사소한 일상적 사건부터 사회 구조와 세계적 흐름에 이르기까지, 외부 환경은 끊임없이 나를 흔들며 불안을 주입한다. 아침 뉴스를 통해 접하는 경제 위기, 정치적 갈등,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무심한 말 한마디까지도 심리적 평정에 도통 도움이 되질 않는다. 하이데거의 주장대로, 인간은 ‘던져진 존재’로서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안정감을 찾으려 하지만, 세계와의 단절과 괴리를 느끼는 순간 그것은 불안을 낳는다. 불안은 외부에 머무르지 않는다. 갈등을 두려워 않고 불의에 목소리를 낼 때마다, 사회의 부조리함에 질려 홀로 남았다고 느낄 때마다, 세계는 점점 낯설어지고 나는 내면으로 더 깊이 침잠한다.


외부 세계의 안정감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롯이 내 불안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 불안은 내면의 것임을 깨닫는다. 외부 요소로 인한 불안의 전이가 사실은 새로운 무언가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자기로의 소환’이라고 부른다. 내면으로 수렴하는 불안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존재의 본질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가장 본질적인 경험이다. 수렴하는 불안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죽음과 삶에 대해 고찰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언제 세계를 낯설게 느껴왔을까. 강아지를 싫어하는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들으라는 듯한 욕설이 날아올 때,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나 홀로 어울리지 못하는 기분이 들 때, 혹은 친한 친구와 웃고 떠들다가도 문득 대화가 어딘가 어긋나는 듯한 어색함을 느낄 때.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사소한 일상에서도 불안은 활성화되고, 그것은 내면 깊숙이 스며든다.


비록 시간이 지나 그 불안이 결국은 내면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해도, 그 감정을 자각하게 만드는 트리거는 외부에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세계 속 존재’다. 외부 세계에서 비롯된 사소한 균열이 우리의 내면으로 흘러 들어가 불안이라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렇게 외부에서 시작되어 내부로 수렴하는 과정을 나는 ‘불안의 수렴’이라 부르고 싶다.


예민한 한 인간의 개인적인 일상이 아니더라도, 요즘 사회는 정말로 트리거 덩어리이다. 작년 12월 시작된 비상계엄 사태는 모두의 가슴을 쿵 내려앉게 했다. 무력으로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겠다는 선언 앞에서 그 누가 불안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어진 뉴스들 또한 불안을 가중하면 했지 절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한 국가를 이끄는 리더의 자질에 대한 의심, 국가 시스템의 부재, 양분화되어 싸워대는 정치권과 시민들. 매일 같이 이어지는 정치·사회 뉴스는 세계를 불안정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경제는 또 어떠한가. 정치 리스크로부터 시작된 환율 급등과 경제 불황 등은 피부로 체감되는 또 다른 위협이다. 미우나 고우나 평생을 나고 자란 내 나라가 이렇게 부서질까 두려웠다.


이 거대한 불안 요소 앞에 무력해지고 싶지 않아 내가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목소리를 냈고, 나와는 다른 사상을 가진 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가진 것 없고 힘도 없는 대학생이지만 나름대로 두려움에 맞서 노력했다. 글쎄, 내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는 미지수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모든 행동은 세계로부터 나를 더더욱 고립시켰고 내면으로 파고들게 했다. 혼란스러운 시국에 어떤 태도를 가질지,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할지 고민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행동하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갈등 상황은 세계와 단절되었다는 감각을 심화시켰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에 따르면, 우리가 사회에서 직면한 위험은 점점 예측 불가능하게 바뀌고, 이는 곧 확산하는 위험 속에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적 갈등으로 이어진다. 위험은 사회의 문제이지만 해결에 대한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면서 불안이 내면화한다는 것이다. 내가 느꼈던 불안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발생한 위험을 해결하려 들면서 불안이라는 감정을 외부로부터 내부로 수렴시켰다. 그리고 내부로 전이된 불안은 이미 내 안에 존재하던 불안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앞선 본질 탐구 과정을 반복한다.



불안한 매일을 보내는 모두에게

나의 내부에서 시작된 미묘한 떨림이 외부 세계를 통해 확산하고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이 과정에서 나는 불안이라는 감정의 순환 속에 갇혀 있음을 느낀다. 이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나는 왜 이 사라지지 않는 감각을 자각하게 되었는지, 왜 남들보다 예민한지를 끊임없이 자책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완전한 평온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불안은 결국 인간이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임을 수용하게 된다.


불안은 분명 나를 처절하게 사유하게 하며 삶을 버겁게 만드는 무게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죽음을 자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존재의 본질에 대한 끝없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차피 불안을 완벽하게 해소하기란 불가능하고, 어쩌면 인간다움은 바로 그 불안 속에서 빛나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다. 쉼 없이 머리를 굴리며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고민하기보다는, 무게를 내려놓고 단순하게 움직일 때도 필요하다. 어려운 일인 거 나도 알고 있다.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끊임없이 드라마를 찾아보고 열두 시간씩 자고 항우울제를 복용하면 멍청해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괜찮다. 모든 본질 탐구자에게는 잠시 치열함을 멈추고 둔감해지는 순간이 필요하다. 완벽한 해답을 찾으려는 조급함을 잠시 내려두고, 뇌가 과열되어 오류를 발생시키지 않도록 쉬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살아간다는 것은 불안을 완벽히 정복하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과 함께 흔들리면서도 끝내 걸어가는 것이다. 도중에 지쳐 마음속 불안을 외면해 버리고 홀로 서서 걸어갈 수도 있다. 끝까지 불안을 안고 비틀거리며 걸어가 죽음이라는 이 감정의 원인이자 나의 한계를 마주할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멋진 일을 하는 모두가 각자의 결론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때로는 작은 유머와 온기를 마주칠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27.

울리히 벡. 『위험사회』. 홍성태 옮김. 새물결.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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