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편집위원 사구
트위터의 140자 글자 제한, 유튜브 동영상의 자극적인 썸네일 — 흔히 이러한 기표들로부터 도출되는 디지털 세대에 대한 가장 오래된 비판은 “인터넷이 모든 것을 단순화한다”는 것이다. 이 어구에는 디지털 매체[1]의 즉각적이고 다양화된 정보전달 방식이 기존의 깊이 있는 담화를 얄팍하게 압축해 버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세대 갈등과 그리 동떨어져 있지 않은 해당 비판은 문제의 원인을 ‘자극적이고 단편적인 정보만을 추구하는 개인’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마땅한 대안을 달리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반쪽짜리이다. 이미 사회의 주류 매체로 자리 잡은 디지털 매체의 영향력은 더 이상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전환은 익명성을 통한 민주적 공론장을 꿈꾸는 유토피아적인 희망을 고취하기도 했다. 모든 논의의 충돌 속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새롭게 등장한 이 쌍방향의 소통 방식이 우리의 삶의 방식을 가장 거대한 것부터 제일 내밀한 부분까지 속속들이 바꾸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이 구조적 변화는 디지털 매체의 문제와 결부된 여러 현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하 코로나)을 둘러싼 정국은 디지털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예시이다. 근래에 디지털 매체, 나아가 정보 기술을 두고 불거진 쟁점으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정부가 코로나 확진자 동선을 고지하는 데에서 불거진 사생활 침해 논란이다. 감염병의 역학조사 과정에서 확진자의 이동 경로와 방문 장소가 방역 당국에 의해 면밀하게 추적되었으며, 해당 정보는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공개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네티즌이 확진자의 신상정보를 추론하여 공공연하게 이야깃거리로 만드는 상황이 허다했다. 이는 확진자의 동선을 쉽게 추적할 만큼 강력한 국가 정보 권력을 실감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 매체의 빠르고 자극적인 정보 전달 과정이 개인의 존엄성을 어떻게 훼손시키는지를 드러내었다. 확진자에 대한 무분별한 비난과 개인정보 침해 등으로 인해 유증상자들 사이에서는 코로나 확진 판정을 두려워하는 경향성이 종종 나타나기도 했다. 이후, 이러한 우려를 수용한 질병관리본부 중앙방역대책본부에서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정보는 공개하지 않도록 하는 동선 공개 가이드라인을 지자체에 전달하였다.
또 다른 논란은 정보 소외계층의 방역 정보에 대한 접근성 문제였다. 감염병의 전파 상황, 대응 방식에 대한 정보는 주로 소셜 미디어, 인터넷 뉴스나 블로그와 같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확산되었다. 해당 매체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지는 집단(노인, 장애인 등)은 자연히 중요한 정보를 얻기가 상대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정보 소외계층의 고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대면 수업, 온라인 회의 등 코로나 사태에 대한 교육 및 노동계의 대책이 디지털 미디어에 크게 의존하는 상황에서 기술 접근성이 낮은 사람들은 소외되었으며, 더욱이 디지털 매체로는 정상적인 작업이 불가능한 직군의 경우에는 코로나의 위험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매체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코드로 작용한다. 얼핏 동떨어진 듯해 보이는 이 두 사안은 그것이 디지털 매체 자체의 특성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논란을 분석해 보는 것은 현대 사회에 만연한 디지털 매체의 문제점을 진단하는 데 있어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글에서는 매체가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코로나 사태와 관련해서 디지털 매체가 지니는 중요한 특성들이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440년경, 요한네스 구텐베르크는 이동식 금속활자 기술과 종이, 잉크, 그리고 압착기 기술을 접목하여 활판 인쇄술의 일대 변혁을 일으킨다. 디지털 혁명에 비견되는 인쇄술에서의 이 혁명은, 정보의 폭발적 보급, 문자 문화의 번영, 텍스트의 민주화 등 수많은 결과를 낳았으며 짧게는 종교 혁명, 넓게는 서양 근대의 시작이 되는 사건으로 손꼽힌다.
한편, 1377년 고려에서 간행된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구텐베르크 이전, 동양에도 금속활자 기술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러나 고려의 금속활자는 비록 기술적 차원에서는 서양에 앞섰을지 몰라도, ‘구텐베르크 혁명’에 비견되는 사상적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하였다.[2]
디지털 매체를 논하기에 앞서, 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매체와 인간의 문화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안드레아스 뵌과 안드레아스 자이들러는 『매체의 역사 읽기』에서 매체에 대한 일반적이고 폭넓은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서로 떨어져 있는 사물이나 사람 등의 사이를 어떤 형태로든 중개해주는 것”[3] 이에 더해, 마셜 매클루언은 매체에 대해 더욱 심층적이고 통찰적인 정의를 내린다. “매체가 메시지이다.”[4] 그의 이 유명한 언술은 미디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매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통해, 매클루언은 내용을 중시했던 기존의 미디어 담론에서 벗어나 매체 자체의 실재성과 방식에 집중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체이론을 개괄하는 그의 작업에서 디터 메르쉬는 이 시선의 전환을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매체의 형식은 메시지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메시지 위에 주문을 걸고 그것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들에게도 해당된다.[5] 매클루언의 말을 빌리자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모든 미디어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제 조건을 주입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6]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매클루언은 매체와 기술이 인간 공동체의 구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때문에 매클루언의 사상에서 매체는 “조건 지우는 것들”, 다시 말해 문화와 사회의 구조를 담지하는 “디스포지티브”로서 기능한다.[7] 매클루언이 구텐베르크 이후의 서구사회를 이전과 구별하여 ‘구텐베르크 은하계Gutenberg Galaxis’로 지칭한 것도 이 맥락에서이다.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서구 문자 문화와 지식 문화는 생명력을 얻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 이전과 이후의 서구 사회는 구조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맥클루언의 사상은 양가적인 특성을 지닌다. 비록 그는 매체를 ‘디포지티브’로 간주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체 또한 당대의 역사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매체의 탄생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좌우되며, 매체의 활용과 영향도 사회적 여건에 따라 그 양상이 달라진다. 앞서 제시된 금속 활자의 예시가 이를 뒷받침한다. 비록 고려는 유럽에 한참 앞서 금속 활자를 발명하였지만, 대대적인 지식의 보급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인쇄술이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동아시아보다 유럽과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던 중동에서도, 구술 전통의 지배적 지위로 인해 인쇄술의 영향은 오랫동안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다. 이렇듯 매체가 사회의 구조를 조건 짓는다는 매클루언의 주장은 매체와 사회의 상호관계 속에서만 완벽하게 독해된다.
그림 형제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주인공 남매는 부모를 따라 숲으로 들어가면서 돌을 그 길에 흘려 놓는다. 이들이 놓은 돌은 밤이 되면 빛을 내어 그들의 집으로의 길을 비추어 준다. 그들의 발자취를 되짚어가는 과정을 통해, 돌들은 남매를 집으로 인도한다.
매체가 사회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매클루언의 주장은 디지털 사회에 이르러 더욱 사적인 차원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디지털 매체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한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있어 주요한 기제로 부상하는데, 이는 디지털 매체의 특성 중 하나인 디지털 발자국[8]에 기인한다. 마리나 미첼리 외의 연구는 이 디지털 발자국이 단순히 개인의 흔적을 넘어서, 타인과의 상호작용의 영구한 기록으로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SNS에서 이 모습이 두드러지는데, 인플루언서들이 팔로어의 태그와 댓글로 명성을 얻는 과정은 개인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그의 평판과 직결되는 디지털 매체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기 때문이다.[9] 온라인에서 명성을 얻은 인플루언서들이 오프라인 공간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비대해진 디지털 공간이 오프라인 공간을 침범하는, 다시 말해 ‘흘러넘치는’ 현상을 증언한다. 디지털 공간은 더 이상 오프라인 공간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간의 상호작용이 발생하는 활동의 장이자 자아 형성의 주된 지평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발자국의 또 다른 예시인 쿠키cookie는 디지털 매체가 형성하는 사회적 공간의 또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웹사이트 접속 시 만들어지는 아이디, 비밀번호 등의 기록 조각을 뜻하는 쿠키는 본래 회원 등록과 전자상거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기술이었다. 그러나 최근 인터넷 업체가 사용자에게 맞춤형 광고를 제공하기 위해 이 쿠키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사생활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10] 이 현상이 특히 의미심장한 것은 쿠키를 비롯한 수많은 파편적인 개인정보가 기업에 의해 활용되는 과정에서 개인의 취향과 선호는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자의적으로 왜곡되고 편집되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통해 재탄생한 사용자의 정체성은 맞지 않는 퍼즐 조각으로 이루어진 그림과 같은, 데이터의 집합으로 환원된다. 여기서 디지털 매체가 개인을 규정하는 방식은 한층 더 심오해진다. 디지털 공간에서 개인은 단순히 타인과 상호작용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공간 속에서 타자(기업)에 의해 데이터 인격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코로나 시국으로 돌아가 보자. 확진자는 디지털 공간 속에서 소셜 네트워크, 인터넷 기사의 댓글 등을 통해 그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당사자의 행동이나 의도는 자극적인 정보, 무분별한 추측 등을 통해 실제와는 다르게 악의적으로 왜곡되며, 곧 그의 일상으로까지 ‘흘러넘쳐’버린다. 모두가 서로에게 연결되어있다는 디지털 공간의 특성(그러나 후술하듯 이 상호연결성 또한 무결하지 않다)에서 비롯된, 인터넷 접속자의 평가가 곧바로 개인의 명예와 연결되어버리는 이 일련의 과정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아 가버리는 것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 사안을 바라볼 수도 있다. 모두의 일거수일투족이 데이터 조각으로 기록되는 현대 사회에서 권력의 통제력은 한층 강력해진다. 확진자의 정확한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통화 내역, 신용카드 이용 내역 접속권한의 정당성을 가지게 된 정부의 모습은 확장된 국가 권력의 규모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와 같은 절차가 생존권이라는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행해진 만큼 곧바로 통제사회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으로 연결 짓는 것은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경제권력이 개인의 사적인 정보에 대한 높은 접근성을 지닌 현대 사회는 ‘개인 정보’의 소유권과 편집권을 진정 개인이 쥐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헨젤과 그레텔의 동화에서 남매가 남긴 돌멩이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비춰준다. 그러나 데이터가 개인을 구성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의 흔적이 진정 우리를 집으로 이끄는가?
문자에 의존한 역사적 기록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 기록은 당시를 살았던 개개인에 대한 충실한 증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문자 기록은 일종의 편향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문자란 대부분의 사회에서 사회적·경제적 명망을 지닌 자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기 때문이다.
현대 상호작용에서 디지털 공간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된다는 사실은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 매체에 접근하지 못하는 존재들의 사회적 존재감이 약화됨을 의미한다. 특정 집단이 상호작용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곧 디지털 매체를 통한 소통이 ‘공정한 공론장’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담론을 형성하는 권력이 특정 집단에 편중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활판 인쇄술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듯, 매체의 수용은 기존에 설정된 사회적 지형을 크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디지털 매체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 즉 미디어 리터러시가 사회적 차별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고려할 때 보다 확실해진다.
디지털 공간이 평등한 공론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는 월드 와이드 웹(www)이 대두되며 디지털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1990년대부터 제시된 바 있다. 유현주는 그의 글에서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의 일화를 든다.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는 전자 네트워크를 통해 위계질서가 사라진 횡적 연결망 속에서 상호 평등한 개인간의 미디어가 실현되리라는 유토피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유현주는 이러한 전망이 디지털 매체의 근본적 결함(사생활 위협, 버그와 바이러스)과 더불어, 해당 매체에 접속 가능한 자와 접속하지 못하는 자 사이의 리터러시 차이로 인해 빠르게 퇴색되어 갔다고 지적한다. 특히나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가 내세운 디지털 지식인(디제라티digerati) 중 대부분이 백인 중산층 남성이라는 점은 그들의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필연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였다.[11]
비록 디지털 매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봉이 오늘날에는 비교적 덜하다고 하나, 미디어 리터러시는 여전히 서로 다른 사회적 집단 간의 경계의 골을 심화하고 있다. 로라 로빈슨을 비롯한 9명의 학자가 실시한 정보 격차 연구가 이를 방증한다. 해당 연구는 세대, 젠더, 인종과 민족성에 따른 디지털 리터러시,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 기회의 격차를 이야기한다. 예컨대 여성의 경우 인터넷상의 행동은 확립된 ‘여성적’ 역할과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행해진다. 나아가 국제적인 차원에서 남반구 국가의 인터넷 접속률은 북반구 국가보다 현저히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12] 이들 소수자 집단이 남기는 ‘디지털 발자국’은 더 큰 정보 권력을 쥔 집단에 비해 적으며, 이는 디지털 공간에서의 재현의 문제와 직결된다. 현재 디지털 매체가 상호작용 공간으로서 지배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그 안에서 개인 간 소통의 형태와 권리가 귀속적 지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문제적이다. 물론 이러한 분석이 모든 경우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위의 연구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디지털 매체가 사회적 격차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한다.
코로나의 전국적 확산은 이러한 정보 격차의 문제가 곧 삶과 죽음의 차원으로 직결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코로나 발병 초기 정부가 마스크 구매 방식을 5부제로 전환하면서 발생한 ‘마스크 대란’이 대표적이다. 이 기간 동안 정보 기술의 활용에 익숙지 않은 노년층은 갖은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약국별 마스크 재고량을 알려주는 스마트폰 앱이 생겼지만, 이를 활용할 능력이 부족한 노인들은 약국을 직접 돌아다니며 마스크 구매 가능 여부를 일일이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13] 노년층은 특히나 코로나에 취약한 계층이라는 점에서 이 문제가 두드러졌다.
또 다른 예시를 살펴보자. 유발 하라리는 일찍이 정보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무용(無用)’ 계급[14]의 부상”을 예측한 바 있다.[15] 비록 그의 예측이 완전히 옳다고 속단하기에는 이르지만, 미국에서 코로나 사태의 진행 양상은 직군별 정보 기술 활용 정도의 차이가 어떻게 기존의 불평등과 결부되어 생과 사의 문제로 이어지는지를 증언한다. 로버트 라이시 교수의 ‘코로나 4계급’에 대한 주장은 이 맥락에서 매우 암울하다.[16] 그의 글에서 중요한 것은 가장 최상위에 위치한 ‘원격 근무가 가능한 노동자the Remotes’ 가 다른 집단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첫 집단과 나머지 사이의 격차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경제적 격차이고, 둘째는 인종적 격차이다. 그의 글에서 라이시 교수는 후자 집단의 성원 중 빈곤층, 아프리카계, 라틴계의 비율이 특히나 높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인종적 불평등은 곧 생존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이 점은 미국 내 코로나 사망자 중 33%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는 점을 통해 뒷받침된다.[17] 더욱이 ‘원격 근무가 가능한 노동자’ 계급이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는 이유가 그들이 정보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직군에 속해있다는 사실 때문임을 고려한다면, 라이시 교수의 구분은 디지털 매체가 불러일으키는 불균형 사회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셈이다.
“디지털 그녀의 디지털한 웃음에/ 우리들은 발을 굴러 정확한 박자를/ 나누어 따라간다
이제 완전해진 결말/ 아니 갈라지는 땅”[18]
매체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이 충돌한다. 하나는 매체의 작동 방식을 규정하는 역사와 사회의 힘이다. 매체는 항상-이미 존재하는 권력과 관계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 정보 기술이 그 사용 방식을 습득한, 교육받은 계층의 손을 들어준다는 점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관계는 결국 매체를 통할 수밖에 없다는, 말 그대로 ‘매개체’로서의 힘이다. 그것이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구술 언어이든, 보다 발전된 형태의 디지털 매체이든 간에 개인과 개인의 연결은 매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지점에서 매체는 지대한 힘을 발휘한다. 매체는 소통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그것이 직조해내는 개인의 존엄에 대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에 미루어 볼 때, 디지털 세대의 고유한 문제는 분명 디지털 혁명으로 발생한 결과물이 맞다. 그러나 매체라는 조건에 근본적으로 내재된 결함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디지털 매체의 문제는 이전 세대의 매체의 문제를 일정 부분 답습했음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뿌리 깊은 매체의 구조 속에서 주체성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인가.
매클루언의 말을 다시 끌어와 본다. “모든 미디어는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제 조건을 주입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인용구는 그 자체로는 미디어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말은 미디어에 종속된 담화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반대로 해석하자면, 미디어의 형식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는 매체의 전제 조건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매체를 사용하여 소통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이제 그 내용을 뛰어넘어, 소통의 구조(매체)와 그것을 통해 수행되는 사람과 사람 간의 구별 짓기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소통은 누구에게 권력을 쥐여주는가. 우리의 소통은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를 앗아가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코로나19라는 재난 상황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정보 기술에 대한 일련의 질문들은, 매체와 인간의 관계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실존적인 질문임과 동시에, 미디어 범람의 시대를 항해하는 개인이 미디어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정립해 나가는 방식에 대한 실천적인 질문이다.
[1] 뒤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매체(媒體)는 널리 알려져 있는 미디어, 즉 매스컴보다 더 넓은 의미를 내포한다. 매체는 “어떠한 일이나 작용을 전달하는 데 매개가 되는 것” 으로서, 대중 매체를 넘어서 잡지, 그림, 심지어 문자와 언어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매클루언은 여기에서 나아가, 전깃불, 스포츠 경기도 매체의 범위 안에 포함한다.
디지털 매체의 근본이 되는 인터넷의 기원은 넓게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협의의 디지털 매체, 즉 웹2.0(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구분되지 않는 쌍방향의 인터넷 형태. 대표적인 예시로 위키피디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페이스북, 그리고 블로그를 들 수 있다.)을 지칭하기 위해 해당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2]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68732&cid=59014&categoryId=59014
[3] 안드레아스 뵌·안드레아스 자이들러, 『매체의 역사 읽기』, 문학과 지성사, 2020., 41.
[4] 허버트 마셜 매클루언 저, W. 테런스 고든 편,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5] 디터 메르쉬, 『매체 이론』,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9., 121.
[6] 마셜 매클루언, 김상호 역, 『미디어의 이해: 인간의 확장』, 커뮤니케이션 북스, 2011., 44.
[7] 위의 책, 122.
[8] 디지털 발자국이란 인터넷의 사용자가 그 사용 과정에서 남기는 다양한 디지털 기록을 의미한다.
[9] Marina Micheli et al., “Digital Footprints: an Emerging Dimension of Digital Inequality”, Journal of Information, Communication and Ethics in Society, vol.16 no.3, 2018., pp. 246
[10]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32584&cid=43667&categoryId=43667
[11] 유현주, 「팔로어에게는 힘이 없다」, 『인문잡지 한편』, 2020.5., 159-161.
[12] Laura Robinson et al., “Digital Inequalities and Why They Matter”. Information, Communication & Society, vol. 18 no. 5, 2015., pp. 571-574.
[13] 연합뉴스, “‘끓는 물에 넣었다 다시 쓰고’...‘마스크 정보격차’에 힘든 노인들”, 2020.03.16.
[14] 유발 하라리는 인공지능의 부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정보 기술을 운용할 능력, 혹은 정보 기술을 뛰어넘는 교육의 경험이 없는 계급은 곧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무용한 계급 useless class’이 되리라 예측한 바 있다.
[15]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김영사, 2018.
[16] 로버트 라이시 교수가 제시한 코로나 4계급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원격 근무가 가능한 노동자 the Remotes’이다. 이들은 전문·관리·기술 인력으로서, 온라인 근무를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대우를 받는다. 둘째는 ‘필수적 일을 해내는 노동자 the Essentials’이다. 이들은 의사·간호사, 농장 노동자, 배달업자, 군인 등의 필수 불가결한 직업에 종사하며, 직장을 잃지는 않지만 재난상황에 따른 위험 부담을 진다. 셋째는 ‘임금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 the Unpaid’로, 직장을 잃었거나 강제로 휴가를 떠나거나 유급 휴가를 다 써버린 계급이다. 이들은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큰 위기에 처해 있다. 마지막은 ‘잊혀진 노동자 the Forgotten’이다. 이 계급에 속하는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교도소 수용수, 아메리카 원주민 보호구역 거주자, 요양원 거주자 등이다. 이 계급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의료 서비스와 보호공간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집단 감염이 우려된다.
[17] Robert Reich “Covid-19 Pandemic Shines a Light on a New Kind of Class Divide and its Inequalities.” The Guardian, 26 April 2020.
경향신문, “코로나 시대 4계급 … 당신은 어디에 있나”, 2020.04.27.
[18] So!YoON!(feat.공중도둑). “A/DC=”, So!YoON!,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붕가붕가레코드,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