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정워리, 딸바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 히트한 드라마 <도깨비>의 명대사다. 최고 시청률 20.5%, 순간 최고 시청률 22.1%를 달성하여 케이블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큰 컨텐츠를 만드는 tvN이 소속되어 있는 CJ 그룹은 취업준비생과 대학생이 가장 입사하고 싶어 하는 기업이다. 지난 1월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상반기 대기업 신입 공채 지원할 회사’에서 1277명 중 53.1%(678명)이 CJ그룹을 뽑았다. 2명 중 1명이 CJ그룹에 응시하겠다고 답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난 16년 2월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YBM 한국 토익위원회와 함께 4년 대졸 학력의 취업준비생 901명을 대상으로 대기업 공채 지원 계획을 발표한 결과를 보면 57.1%가 CJ그룹을 택했다. 특히 나영석, 신원호 PD 같은 스타피디들의 성공이 조명되면서 매년 피디 직종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내가 혼술을 하는 이유는’. tvN 드라마 <혼술남녀>는 드라마 말미의 내레이션을 이렇게 시작한다. 드라마가 진행될 때마다 서로 다른 이유가 나오지만 골자는 비슷하다. ‘힘든 날 진심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서 내 아픔을 나누기보다는 삭이는 것이, 이렇게 혼자 마시는 한 잔의 술이 더한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드라마 <혼술남녀>는 노량진 공무원 준비생들, 일명 공시생들과 학원 강사들의 지친 하루를 혼술로 위로해 주는 드라마다. 이 시대의 청춘의 현실과 그를 위로하는 내용으로 호평을 받았지만 촬영장 한편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최종화인 16화가 작년 10월 25일에 방영된 다음날, 조연출을 맡았던 이한빛 PD가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2016.10.21.
게임업체 넷마블 직원 투신
이한빛 PD는 2016년 10월 2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종방연을 며칠 앞두고 잠적한 고인의 죽음을 만 5일 만에 회사가 알게 된 것은 종방연 술값을 계산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인이 관리하던 촬영팀의 법인카드를 찾기 위해서였다. 생사가 확인되기 전 실종상태가 알려지자 선임은 이한빛 PD의 부모님을 찾아와 이한빛 PD의 근무가 얼마나 불성실했는지를 주장했다. 유가족들은 이한빛 PD의 유서와 고인이 남긴 녹음파일, 카톡 대화 내용을 바탕으로 CJ 측에 죽음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가해사실 인정 및 재발방지를 포함하는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했다. CJ 측은 두 달이 지난 12월 말 서면을 통해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학대나 모욕행위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됨.’
CJ 측은 이한빛 PD의 근태불량을 문제 삼으며 유가족의 사과요구를 자신들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CJ의 주장을 입증하는 자료는 없었으나, 직장 내 주변 사람들의 추가적인 진술을 통해 얻은 자료들은 충격적이었다. 이한빛 PD는 막내라는 이유로 딜리버리, 촬영준비, 영수증, 현장준비 등을 모두 도맡았고 계약직을 정리 해고하는 일도 해야 했다. ‘부조리한 세상을 외면하지 말라’고 평소 말해온 이한빛 PD에게 신념에 반하는 일은 큰 고통이었다. 또한, 이한빛 PD는 살인적인 업무량에 더해 동료들에게는 언어폭력 및 비난과 따돌림, 회사에서는 인사불이익을 당했다.
2017.1.15.
보건복지부 공무원 과로사
2017.1.22.
LG 유플러스 고객센터 현장 실습생 사망
2월 말 이어진 CJ 측의 대면에서도 회사는 정당한 사과대신 유가족들에게 정보의 출처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한 이한빛 PD 자살의 원인은 오로지 개인의 나약함이라고 주장했다.
이한빛 PD 사망사건에 대한 진실과 사측의 부당한 대응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 씨의 페이스북 게시물이 올라오자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었던 사건이 비로소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2017년 4월, 고인의 죽음으로부터 6개월 후였다. 4월 18일, 청년유니온,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26개의 노동조합 및 시민사회단체로 이루어진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CJ E&M에게서 회사 측의 책임 인정 및 공개사과, 공개적인 진상규명 및 관련자 문책, 재발방지책 마련에 대한 확답을 듣는 것이 목표였다. 대책위는 2016년 11월 9일 구성된 ‘故 이한빛 진상규명을 위한 가족 대책위’, 2017년 3월에 구성된 ‘故이한빛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응전략모임’의 단계를 걸쳐 탄생했다. 사망사건 발생 당시부터 있었던 꾸준한 움직임이 사건의 공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2017.5.27.
구의역 노동자 사망 사고 1주기 추모제
같은 날
광운대역 철도 노동자 사망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 당일 CJ 측은 18일 오후 늦게 공식 입장을 내고 “경찰과 공적인 기관 등이 조사에나선다면 적극 임하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책위는 기존 입장과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며 책임 인정과 재발방지대책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CJ의 태도 변화를 위해서 대책위를 중심으로 사건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4월 24일 대책위는 CJ E&M 사과 및 재발방지책 촉구기자회견을 가졌으며, 4월 26일 상암에 전하는 목소리_현수막게시행동에 10여 명이 참석하여 현수막 40개를 게시했다. 4월 28일과 5월 1일에는 ‘카메라 뒤에 사람이 있습니다’라는 슬로건 하에 고 이한빛 피디 시민추모문화제 와 노동절 플래시몹이 각각 진행되었다. 사건이 페이스북을 통해 최초로 공론화된 만큼, SNS에서의 물결도 활발했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통해서 사건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서명운동이 이어졌으며 tvN페이지에 항의 댓글을 남기는 등의 활동이 이어졌다. 1인 시위도 활발했다. 19일 故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 씨의 1인 시위를 시작으로 4월 19일부터 5월 19일까지 CJ E&M 앞에서는 총 20회의 1인 시위가 이루어졌다.
2017.6.
근로복지공단, 넷마블 직원 과로사 첫 산재 인정
남겨진 사람들의 목소리
4월 29일에 있었던 대선 전 마지막 촛불집회에서 故 이한빛 PD의 어머니 김혜영 씨는 PD로 취업을 한 후 적금을 드는 대신 세월호 416 연대와 KTX 해고 승무원, 기륭전자, 빈곤사회연대 등에 후원금을 보낸 아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며 끝내 책임을 회피하는 CJ E&M을 비판했다. 그는 이날 집회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삼성 백혈병 피해 사실을 알린 단체 반올림, 그리고 故백남기 농민을 언급하며 사회적 연대를 강조했다.
사망사건이 발생한 지 반년 만에 세상에 알려진 故 이한빛 PD의 죽음은 소리 없이 바쁘게만 돌아갔던 세상의 침묵을 깼다. 대책위가 방송노동의 폭력적인 실태를 시민들에게 알리는데 주력한 결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각자의 삶이 담긴 대답을 내놓았다. 4월 18일부터 대책위가 운영한 <드라마 현장 내 노동실태에 폭력에 대한 제보센터>에는 20여 일 동안 총 158명의 제보가 접수되었다. 제보 7은 숨 막히는 드라마 제작 현실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하루도 쉴 수 없는 스케줄. 한 시간도 편히 눈 붙이지 못하는 날들. 카톡이나 메시지를 숨 쉬듯 확인해야 하는 일상. 정말 답답한 것은 내가 당장 어제 잠을 자지 못했단 사실이 아니라 이런 시스템이 끊임없이 답습된다는 점. ‘다들 그렇게 일해 왔다’, ‘원래 그런 거다’가 통용되는 게 화가 난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제작시간은 노동자들을 향한 심각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제보 78은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곧 폭력이다. ‘방송’이기 때문에, ‘방송을 내보내야 하기 때문’에 제작상의 모든 비인간적인 행태와 상황들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관행이 존재한다. 가해와 피해를 구분하기 어렵다. 조연출을 괴롭히는 연출이나, 제작을 완성하기 위해 스텝들을 착취하는 조연출이나, 방송 일에 익숙해지지 못한 신입조연출을 무시하고 따돌리는 숙련된 비정규직 스텝들이나, 일주일에 두 편 이상의 시나리오를 써내야 하는 작가들까지 모두 시간의 노예이다.”
촛불과 장미 속에서 맞은 전환점
대선을 앞둔 후보들은 공식 SNS를 통해 이한빛 PD의 죽음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다. 문재인, 심상정 후보는 이 소식을 접한 뒤 안타까움을 표하며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데 힘을 실었다. 시민들 역시 SNS 상에서 故이한빛 PD 사건 대책위의 게시물을 공유하고 tvN에 책임을 묻는 온라인 서명에 참여하면서 점차 사건의 파장은 우리 사회의 노동이슈 전반에 대한 관심과 지지로 퍼져나갔다. 촛불정국에 이은 ‘장미대선’ 정국 안에서 노동절을 맞은 노동자들은 ‘지금 당장’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노동 권리 보장을 주장했고, 같은 날 중앙선관위가 발표한 재외선거 투표율은 75.3%라는 역대 최고 투표율을 기록했다.
한편, CJ E&M 측은 tvN 드라마 ‘혼술남녀 2’의 제작이 무기한 연기됐다는 소식을 전했다가 황급히 수습했다. 11일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한 드라마국 관계자가 “오는 하반기 ‘혼술남녀’ 시즌2 촬영을 시작하려 했으나 조연출 PD 사망 논란으로 제작이 전면 중단됐다”라고 밝혔으나, 해당 인터뷰가 보도된 후 CJ E&M 측은 제작 무기한 연기는 확정된 바가 없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지난해 10월 종영한 tvN 월화드라마 ‘혼술남녀’의 마지막 회는 자체 최고 시청률과 8주 연속 동시간대 1위를 달성하며 막을 내렸다. CJ E&M의 대표 방송 채널인 tvN은 트렌드에 민감한 20~49세 연령대에 속한 시청자를 타깃으로 삼는다. 故이한빛 PD 사건에서 진상규명의 책임을 회피하는 CJ E&M의 태도에 대해 회사 안팎의 비판 여론이 불거지는 동시에, 후속작의 시청률 부진 등 기업 자체 사정으로 인해 2분기(2017.4~6) 주가는 계속해서 하락세를 걷고 있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새로운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1].
5월 21일, CJ E&M은 대책위 측에 ‘故이한빛 PD 유가족과 대책위에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입장문을 전달했다. ‘부족한 제작 환경을 업계의 관행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한 점 반성합니다.’라는 문장이 담긴 글을 통해 비로소 회사는 한 달 만에 사과 입장을 표명했다. 대책위는 22일을 기점으로 대책위와 CJ E&M 간의 대화가 재개됨을 알리면서, 그동안 진행해 왔던 1인 시위와 서명을 잠정적으로 중단한 뒤 사측에 책임 있는 조사를 촉구하는 9340명의 서명을 전달했다.
그로부터 20여 일 후인 6월 14일, 유가족 대책위와 CJ E&M 김성수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이 만나 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사측은 대책위에 ‘유가족과 대책위에 드리는 사과의 글’, 그리고 유가족이 요구한 내용이 반영된 ‘故이한빛 PD 명예회복 및 방송 제작 환경, 문화 개선 약속’을 전달했다. 김성수 대표이사는 ‘사건 발생 이후의 미숙한 대응으로 유가족에게 아픔을 남긴 것’에 고개 숙여 사과하며 그동안 받은 질책에 귀 기울여 전반적인 시스템을 개선할 것을 약속했다. 사망사건이 발생한 지 8개월 만에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회사는 고인의 명예 회복과 제작환경 개선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명예 회복과 관련해서는 책임자를 징계하고, 회사 차원에서 고인을 추모하며 추후 기금 조성을 위한 재정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 방송 제작 환경 개선 약속은 노동 및 휴식시간 명시, 적정인원 확보, 표준계약서 작성 권고 등 제작현장의 ‘원칙’과 ‘표준’을 정립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어머니 김혜영 씨는 “한빛 PD가 남긴 이야기가 무리한 요구사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빛의 죽음의 의미를 진심으로 바라보고, 약속한 과제들을 진정성 있게 이행해 주시길 바란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7월 2일, 천주교 신곡2동 성당에서 故이한빛 PD의 추모제가 있었다. CJ E&M으로부터 공식사과와 개선약속을 받아낸 유가족 및 대책위는 추모제를 마지막으로 그동안의 활동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변화를 향해 새롭게 더 나아가기 위한 시간이었다. 대책위는 시민들이 보낸 성금을 모아 방송제작환경 개선을 위한 제도연구팀을 설립, 운영하는 것으로 향후 활동의 방향을 정했다. 아버지 이용관 씨는 인터뷰를 통해 CJ가 지원하기로 기금을 방송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 사용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몇몇 국회의원들과 함께 방송 노동업계 법안 마련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신입 PD가 사라진 그날로부터 250여 일이 지났다. 그동안 세상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많이는 바뀌지 않았다. 방송제작현장에서는 여전히 시청자들을 위해 한 주 내내 드라마를 찍어낸다. 과로와 사고의 위험에 시달리며, 버티며, 매일의 노동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을 미뤄나간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남았다는 것에 너무 익숙해 있는 만큼 어제와 오늘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로부터 250일이 지난 지금. 어떤 진실은 침몰했다가 비로소 인양되었고 어떤 기업은 사원의 죽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조의를 표했으며 어떤 병원은 한 환자의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비로소 밝혀냈다. 침묵에 균열이 생기고 상처는 공감으로 메꿔지기 시작했다. 사라진 모든 이들의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故이한빛 PD를 기억하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 CJ E&M은 방송 부문을 비롯해 영화 부문, 음악 부문, 공연 부문으로 총 4개의 사업 부문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중 방송부문은 기업 전체의 매출을 견인하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방송 부문은 지난해 CJ E&M 매출액 가운데 1.3%인 1조 1284억 원을 기록했다.
대책위 제공〈이한빛 PD 추모제 자료집(2017.2.)〉
대책위 발표 자료〈드라마/방송 현장 내 노동실태와 폭력에 대한 제보센터 1차 분석 결과 발표(2017.5.4.)〉
대책위가 공개한 CJ측 문서〈유가족과 대책위에 드리는 글(2017.5.21.)〉,〈故이한빛PD 명예회복 및 방송 제작환경, 문화 개선 약속(2017.6.14.)〉
故이한빛PD 아버지 이용관씨 인터뷰 기사 '문재인 대통령도 가슴 아파한 아들의 유서…아버지의 다짐'(오마이뉴스, 2017.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