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머물다 간 자리

익명의 편집위원

by 문우편집위원회

빛이 머물다 간 자리

: 변화의 시작이 되어


2017년 7월 2일 열린 故이한빛 PD 추보제의 웹자보. "이한빛 PD를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tvN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대책위가 주관하였다. 청년유니온



이제는 한빛이가 외롭지 않게 떠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마음이 편해집니다.


지난 7월 2일 오후 4시 30분, 의정부시 천주교 신곡2동 성당에서 고 이한빛 PD의 추도식이 열렸다. 고인이 죽은 지 250여 일만이었다. 고인의 어머니는 이제야 그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어렵게 운을 떼었고, 8개월 간 이한빛 PD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쉴 새 없이 달려왔던 사람들은 비로소 온전히 그를 추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에게 추모제는 묘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CJ의 공식사과와 명예회복,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 목표한 바가 이뤄졌으니 한숨을 돌릴까 싶었을 때,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누군가의 죽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만큼 가슴 저린 순간이 어디 있을까.

추도식의 자료집에는 고인의 친구들과 입사 동기, 함께 ‘혼술남녀’를 촬영했던 스태프들의 추모글들과 CJ의 공식사과 전문 및 구체적인 개선 방향과 재발방지 대책들에 대한 글이 실려있었다. 자료집을 쭈욱 훑으면서 다시 앞쪽으로 돌아왔을 때 고인의 생애를 간략하게 실은 글의 제목이 ‘빛이 머문 자리’라는 것을 발견했다. 참 잘 지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머물다가 간 그의 자리에 아직 남아있는 우리에게, 이 추모제는 끝이 아닌 시작임이 잔잔히 와닿았다.



방송업계의 실태와 원인


앞에서도 다뤘지만, 방송업계의 실태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와 관련하여 ‘tvn 신입 조연출 사망 사건대책위’는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현장에서의 문제들을 파악하기 위해 제보센터를 운영했다. 5월 8일 수합한 제보들을 공개하면서 대책위는 현장에서의 가장 빈번하고 직접적인 문제들을 ▲폭력과 성폭력이 빈번한 ‘군대식 문화’ ▲고강도, 장시간 노동 ▲저임금과 고용불안 ▲사회보장의 부재로 손꼽았다. 창의성보다는 복종이 미덕으로 여겨지고, 좁은 바닥에 알음알음 추천으로 살아남는 방송 업계에서 정당한 대우나 처우 개선은 상상조차 힘든 일이 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이 이전까지의 방송계의 정설이었다. 모두가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더라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책위가 발표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8월 27일부터 고 이한빛 PD가 실종된 10월 20일까지 그가 쉰 날은 55일 중 이틀뿐이었으며 수면 시간은 하루 평균 4시간 반에 그쳤다. 이는 다른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책위가 수합한 제보에 따르면 tvn의 촬영팀은 전날 촬영이 오버되어 집을 갈 수 없거나 지방 촬영 시, 별도의 숙소나 숙박 비용이 제공되지 않고 사비로 찜질방 등의 장소를 알아봐야 했다. 또한 유효제보 106건을 분석한 결과, 제작기간 중 스태프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9.18시간으로 최대 23시간을 근무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그마저도 평균 5시간이 안 되는 수면 시간은 촬영 중간 이동 시간에 채워지기 일쑤이다.

이 정도로 사람을 갈아 넣었으니 임금은 제대로 지불하겠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촬영 기간에만 집중 고용되는 비정규직들에게 야간 수당이나 근무 외 수당은 기대 밖의 이야기이다. 또한 아직도 현장에는 여전히 ‘열정 페이’를 당연시 여기는 ‘청춘 후려치기’가 만연하다. 누군가가 다치거나 사고가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제작비 절약을 위해 충분한 안전 인력을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태프들은 몇 인분의 일을 해내면서 건강에 무리가 생기더라도 그 누구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실제로 “조명팀 동료들은 연속적 밤샘근로에 운전까지 병행하다가 사고로 사망한 사례가 있다”라는 제보는 이를 방증한다.

원인이 무엇일까? 방송업계 또한 어쩔 수 없는 헬조선의 축소판이라고 친다 하더라도 화려한 조명 뒤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인권 실태는 너무나도 하드코어 하다. 방송업계에는 사용자, 정규직, 무기계약직, 프리랜서, 독립 PD 등 다양한 입장이 있는 만큼 그 원인에 대한 분석(혹은 탓)도 다양하다.

제작스태프와 이들을 고용하는 사용자 측이 모두 공감하는 이들의 열악한 근로환경의 원인 중 하나는 국내 드라마 제작과 편성관행에 있다. 대부분 사전제작으로 만들어지는 영국/미국드라마와는 달리 한국 드라마의 경우 생방송 수준으로 드라마 제작이 이뤄진다. 또한 정규직과 동일한 노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의 차이가 저임금, 고용불안정, 복지혜택의 취약성 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현장의 비정규직들은 이러한 근로환경의 문제점들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그 원인은 자신들의 노동시장에서의 지위에 따른 차별적 관행에 있다고 주장한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주제작의 확대로 인해 프로그램 제작에서 핵심적 제작인력은 지상파 정규직이, 나머지는 외주제작사에 의해 고용된 인력이 차지하고 있으며, 비정규직 스태프는 점차 증가하고 있다.[2]



문제 해결의 시작 : 표준계약서 마련과 노동조합 설립


방송업계 폐단을 다각도에서 깊게 다루기엔 지면이 부족하다. 오히려 우리가 좀 더 깊게 고민해봐야 하는 부분은, 이런 진단이 내려졌을 때 실제로 방송업계의 노동자들이 이런 차별적이고 불공정한 관행을 ‘어떻게’ 끊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CJ가 공식 발표한 ‘고 이한빛 PD 명예회복 및 방송 제작환경, 문화 개선 약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그중 ‘외주 사와 스탭 간 계약 시, 합리적 표준 근로 계약서 마련 및 권고’에 대한 사항은 그동안 강제력이 없어 사실상 시행되지 않았던 표준고용계약서를 사용자 측에서 먼저 마련하겠다는 것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CJ는 이 표준계약서에 외주제작사와의 임금 지급 여부 관리 감독을 강화하고 4대 보험과 근로/휴식 시간 준수, 일방적 계약해지에 대한 안전장치를 포함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러한 방송 업계의 표준고용계약서 작성의 법적근거는 콘텐츠산업진흥법 25조(표준계약서) 1항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콘텐츠의 합리적 유통 및 공정한 거래를 위하여 공정거래위원회 및 방송통신위원회와의 협의를 거쳐 표준계약서를 마련하고, 콘텐츠사업자에게 이를 사용하도록 권고할 수 있다.’라는 조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콘텐츠사업자는 콘텐츠의 제작과 유통 등과 관련한 경제적 활동을 영위하는 자(동법 제2조 정의)로서 법인뿐만 아니라 노동자도 포함이 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업계의 모든 노동자들에 대한 표준근로계약서의 작성도 권고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권고는 강제사항이 아니고 계약기간, 근무시간과 초과근무수당 지급, 임금 혹은 대금지급방법에 대한 명확한 기준 또한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있으나 마나 한 사항에 불과했다. 실제로 2015년 방송업계에서 표준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경우는 방송사와 출연진의 계약을 제외하고는(24.7%만 ‘적용하지 않는다’라고 응답) 모든 계약관계에서 60%를 넘었다.[3] 특히 독립제작사-독립 PD의 경우 10명 중 8명이 표준계약서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응답했으며, 우리가 흔히 방송업계를 떠올렸을 때 그려지는 방송사의 노동자들, 즉 스태프와 방송사간에서도 65.5%가 표준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CJ가 시작이 되어 더 많은 방송사들이 적극적으로 표준계약서를 마련해야 하는 이유이다.

방송업계 노동자들과 제작사/방송사와의 공정한 관계 수립은 결국 노동자들이 갖는 교섭력의 수준에 달려있다. 그렇기에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들의 집합적인 이해를 대변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이해단체의 설립이 필요하다. 아무리 정부에서 방송영상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제도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한다고 해도, 그 실효성은 단체교섭력의 유무에 의해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업계에는 구심점이 없고, 추진력을 갖출만한 조직이나 재정확보도 어려워 단체교섭을 할만한 조직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2006년 출범한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일노동조합은 제작스태프를 위한 노동조합으로서, 사용자와의 단체교섭은 하지 못했더라도 어느 정도의 협상력을 가지고 제작사나 방송사와의 계약에서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성과도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2011년 초 이 노동조합이 해산한 이후에는 방송 노동자를 아울러 대변할 마땅한 노동조합이 없는 실정이다. 방송작가유니온이 전국언론노동조합과 공동으로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를 발표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전체 방송업계 노동자를 포괄하지 않는다는 점과 방송작가는 현행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는 점 때문에 방송사와의 단체교섭능력이 없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립과 운영이 어려운 방송업계에서의 노동조합 설립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우선 구성원의 확보, 조직화와 조직운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 등 노동조합의 설립과 운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원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방송영상 제작스태프 노동시장에서는 이러한 자원이 쉽게 확보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방송업계 노동자들의 자체 단체교섭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 부분은 콘텐츠진흥법 제19조 ‘중소콘텐츠사업자에 대한 특별지원’과 제20조 ‘협회의 설립’에 의한 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협회의 설립은 콘텐츠 사업자의 공동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문화부장관의 인가를 받아 가능하며, 모든 법인의 형태는 설립을 지원할 수 있다. 또한 협회 설립에 관한 지원과 관련해서는 중소콘텐츠사업자의 사업이 원활하게 수행될 수 있도록 행정적 재정적으로 특별한 지원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방송업계에 종사하고 있으신 분이 이 글을 읽는다면 ‘말이야 쉽지’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이한빛 PD의 죽음이 방송업계의 폐단에 대한 전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온 것은 맞지만, 그전부터도 문제 제기는 꾸준히 되어왔다. 그러나 ‘원래 그런 것이다’, ‘버티지 못하면 나가라. 얼마든지 들어올 사람은 많다’ 식의 인식은 변화를 쉽지 않게 했다. 그리고 허술한 제도와 그마저도 실현되지 않는 업계의 현실은 그 인식과 세계를 뒷받침해 줬다. 명백한 부당한 처우와 인권 유린 앞에서 방송업계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조차 어려웠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더 고 이한빛 PD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가 머물다 간 자리의 빛이 잠깐 타오르고 마는 것이 아닌,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변화의 원동력이 되게끔 하는 것은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그렇게 10년이 흐르고 많은 것들이 나아졌을 때 우리는 고 이한빛 PD를 다시 돌아보고 조금이라도 더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故이한빛 PD를 추모하는 웹자보. "내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주는 드라마가 다른 누군가의 잔혹한 하루로 만들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등의 문구가 쓰여 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1] 방송영상 제작스태프의 근로환경 개선방안에 관한 연구, Kocca 연구보고서(2011.11)

[2]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 제작 스태프의 고용구조 변화에 관한 연구, 김병선, 김건용, 언론과학연구 제11권 2호(2011.6)

[3] '방송분야 표준계약서 실태조사',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콘텐츠진흥원(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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