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6일. 드디어 개막 디데이가 왔습니다. 핸드볼과 농구가 펼쳐질 릴 메트로폴은 이미 축제준비를 단단히 했습니다. 대광장에는 올림픽 빌라쥐라고 해서 작은 핸드볼과 농구 경기장 및 다양한 무료 스포츠 프로그램을 위한 장소를 마련해놨습니다. 구경하고 있자니 벌써 저녁 일곱시, 시내에서 해야하던 일도 내려놓고 급하게 집으로 와서 티비를 켰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올림픽 개막식을 보기 위해서요. 생방송으로 보면서 그대로 받아 쓰고 있는지라 두서없고 정리가 되지 않은 글입니다만, 일종의 라이브 감상문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릴 대광장 풍경
놀랍게도 일곱시 반 정각에 개막식이 시작했습니다. 먼저 인트로 영상에서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자멜 드부즈 Jamel Debbouze (한국에도 수입된 아스테릭스와 오벨릭스 : 미션 클레오파트라라는 영화에 등장합니다)가 성화를 들고 파리 경기장에 들어오지만 관중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당황합니다. 이 개막식은 현대 올림픽 역사 상 처음으로 경기장이 아닌 야외에서 진행되는 개막식인데, 자멜의 실수로 성화가 엉뚱한 곳으로 갔다는 유머러스한 연출입니다.
당황한 자멜 뒤로 프랑스 축구의 전설 지네딘 지단 Zinédine Zidane이 나타나 성화를 올바른 곳으로 옮겨주기로 약속합니다. 지단이 파리 지하철에 갇혀 있을 때 세 명의 청소년이 대신 성화를 봉송하다가 결국 마스크를 쓴 괴한에게 바톤을 넘겨주게 되는 것이 이 인트로 영상의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이번기회에 프랑스의 다양성을 보여주겠다는 포부처럼 이 나라의 대표적인 이민자 출신 유명인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영상에도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인 오페라의 유령의 멜로디나 파리 카타콤베 등 프랑스 문화에 대한 힌트가 여기 저기 숨겨져 있습니다.
티비 화면을 그대로 찍어서 첨부하고 있습니다. 낮은 화질 죄송합니다.
영상이 끝나고 이 대회를 위해 근사하게 단장한 트로카데로 정원이 비춰집니다. 센느 강 위에 분수로 프랑스의 삼색기를 쏘아 올릴 때, 올림픽 대회의 종주국인 그리스의 배가 첫 번째로 들어옵니다. 여느 개막식과는 달리 각 참가국이 센느강의 명물인 유람선 바토 무슈 Bateau mouche 처럼 배로 입장하는 것이 재밌네요. 유람선 위의 선수 모두 이 순간을 백 퍼센트 즐기는 듯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1막이 끝나고 축하무대가 시작됐는데요, 커다란 분홍 깃털 부채 속에서 레이디 가가가 등장했습니다. 정말 생각도 못한 유명인사라 깜짝 놀랐는데, 심지어 지지 장메르Zizi Jeanmaire의 아주 옛날 노래를 프랑스어로 부르더군요? 단번에 센느 강 계단을 최고의 무대로 만들다니, 정말 놀라운 아티스트입니다. 참고로 Zizi Jeanmaire는 뮤직홀과 카바레 씬의 제왕이라고 불렸던 다재다능한 가수 및 댄서였습니다. 레이디 가가가 오마쥬한 Mon truc en plume은 그의 가장 유명한 노래입니다.
배경음악으로 에디트 피아프, 세르쥬 갱스부르그, 베로닉 상송, 모조, 디암 등 유명한 프랑스 가수의 유행가 리믹스가 들립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봤으면 열심히 따라 불렀을 텐데, 혼자라 아쉽습니다. 처음엔 아코디언 연주자나 에이트 피아프의 La Foule 등 다소 '클리셰'적인 프랑스의 면모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 갈수록 그 이미지를 깨며 현대 프랑스 문화를 부각시키네요.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Ah ! Ça Ira !라는 노래를 아시나요? 만약 어쌔신스 크리드 유니티를 플레이해본 분이라면 인게임에서 들었을수도 있습니다. 1790년에 작곡된 프랑스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노래인데, 처음에 반복되는 "Ah, ça ira"라는 문장은 "아, 다 잘 될거야."라는 혁명가의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여섯 번째 문단에 "Les aristocrates on les pendra.(귀족의 목을 매달자)"라는 가사가 있는데, 그 가사가 들리자 마자 프랑스 유명 메탈그룹 고지라 Gojira가 나타나 화려한 불쇼와 함께 메탈 버전 ça ira를 선사합니다. 와, 이건 기대도 못했네요. 신선하고 강력합니다.
드디어 한국선수단이 등장합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남한을 북한으로 착각했다는 소식을 꽤 나중에 들었는데요, 그 찰나에 France 2채널에선 해설자끼리 이야기 중이었기 때문에 저는 못 들은 듯 합니다. 해설자들은 제대로 남한을 남한으로 소개했는데, 논란이 될만한 실수네요.
제게 가장 기억에 남는 퍼포먼스 중 하나는 저도 좋아하는 아야 나카무라 Aya Nakamura가 자신의 히트곡과 이삼십 년 전의 유행가를 섞은 버전을 부를 때였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공화국 수비대가 아야의 가장 유명한 Djadja라는 곡을 함께 부르는 걸 보면서 땅을 구를 뻔 했습니다. 프랑스 학사원도, 공화국 수비대도 아야 나카무라에게 일반적으로 매칭되지 않는 이미지의 향연이었거든요.
아야 나카무라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이민자가 많은 구역에서 쓰는 슬랭을 적극 활용해 곡을 쓰는 것으로 질타를 받았습니다. '아야 나카무라가 프랑스어의 붕괴를 가져온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표준 프랑스어를 다듬는 기관)가 보면 기겁할 가사다', '프랑스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프랑스 시민이라 할 수 있나' 등 주로 '언어'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아프리카 말리 공화국 출신의 여성 싱어송라이터라는 위치 하나만으로 극우 누리꾼에게 수없이 공격을 받았고, 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하게 됐을 때 정당성이 없다며 심한 야유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 아야가 모든 편견을 비웃듯 긍지높은 공화국 수비대의 코러스를 받으며 프랑스 학사원 앞에서 지금 세대에게 익숙한 음율과 가사로 노래하는 걸 보니 아주 통쾌하네요. 이 세상에 순수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사용자의 필요에 의해 변하니까요.
영상 중에 제가 학생 때 자주 들렀던 INHA 도서관이 나와서 기쁜 마음에 사진을 찍었습니다. INHA는 미술사학 특화 도서관으로,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 안에서 공부할 때가 그립네요... 여덟시 반부터 비가 심하게 내리기 시작했는데, 해설자가 Il drache !라고 해서 갑자기 빵 터졌습니다. 이 프랑스 북부 사투리가 무슨 말인지 궁금하신 분께 밑의 글을 추천합니다.
프랑스의 표어인 자유 평등 우애 중 박애로 자주 번역되는 Fraternité는 특히나 형제간의 우애를 뜻하기도 합니다. '형제'가 아닌 '자매' 관계를 뜻하는 Sororité라고 화면에 표시된 직후에 프랑스 역사를 빛낸 여성 여덟 명(소개된 순서대로 Alice Milliat, Gisèle Halimi, Paulette Nardal, Jeanne Barret, Christine de Pizan, Louise Michel, Alice Guy, Simone Veil)의 금빛 석상이 차례대로 세워진 것이 감동적입니다. 파리 국립고등 음악무용원 출신의 메조 소프라노 악셀 생시렐 Axelle Saint-Cirel 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재해석한 라 마르세이예즈가 울림이 깊네요.
중반부터는 저녁 준비를 하느라 제대로 보질 못했지만, 패션쇼와 디제이 쇼 등 볼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잊을만 하면 마스크를 쓴 의문의 성화봉송자가 파리의 지붕을 파쿠르로 내달리며 도시의 아름다운 전경을 보여줍니다. 다만 비가 끊임없이 와서 각국의 선수들이 다들 감기에 걸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 중간중간 환상적인 날씨를 자랑하는 아이티도 중계됩니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프랑스 선수단의 배가 보입니다. 유람선 규모부터 다르군요. 제가 좋아하는 Petit biscuit의 음악도 나오고, 집에 가고싶다는 표정의 프랑스 대통령의 얼굴이 화면에 잡힙니다. 그 이후로는 유로댄스 리믹스에 맞춰 발레, 왁킹, 힙합 등 다양한 갈래의 춤을 보여줍니다. 센느 강이 거대한 댄스 플로어가 된 느낌이네요. 어느 순간부터 제가 좋아하는 필립 카트린 Philippe Katherine의 J'adore가 들리길래 혼자 집구석에서 어깨춤을 추는데 갑자기 반나체의 시퍼런 인영이 다타나서 흠칫했습니다. 필립 카트린 본인이 왔군요. 언제나같이 난해하고 당황스러운 퍼포먼스입니다. 다른 나라의 해설에선 청중에게 이 요상한 아티스트를 어떻게 소개했는지 궁금합니다.
축제가 후반으로 달하며 두건과 마스크를 쓴 은빛의 기수가 강철 말을 탄 채로 센느강 위를 달려 올림픽기를 트로카데로 정원까지 가지고 옵니다. 마치 중세 판타지가 가미된 SF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미장센입니다. 마스크와 두건을 쓴 두 인물은 아무래도 어쌔신 크리드가 모티브인 듯 합니다. 어쨌든 유비소프트도 프랑스 기업이니까요. 이름 모를 기수가 가지고 온 올림픽기가 올라가며 올림픽 찬가가 울려퍼집니다.
트로카데로 정원으로 무대가 옮겨진 이후 카누 선수이자 하계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 토니 에스탕게Tony Estanguet가 연설을 합니다. 나름 담백하고 나쁘진 않은 글입니다만, 감사인사를 할 때보안 문제로 추가된 경찰의 숙식 해결을 위해 자신의 원룸과 기숙사를 내주고 파리 밖으로 내쫒긴 대학생에겐 감사하는 것을 잊은 듯 하네요. 지루한 두 번째 연설이 끝나고 지단이 나타나자마자 관중의 환호가 커지네요. 오프닝의 마스크 괴한 1이 지단에게 성화를 쥐어줍니다. 지단도 시상대를 걸어 스페인의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Rafael Nadal에게 성화를 넘기고, 동시에 에펠탑에 불이 켜집니다. 파리의 상징과도 같은 철제 구조 위로 아름다운 비디오 맵핑과 웅장한 레이저 쇼가 펼쳐지네요. 적어도 이번 해에 제 세금이 어디에 쓰였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이후로는 Serena Williams, Carl lewis, Amélie Mauresmo 등 세계 스포츠계의 거물들이 잇달아 성화봉송에 참여합니다. 프랑스 유도의 자랑인 Teddy Riner 와 올림픽 삼관왕이란 타이틀을 거머쥔 육상선수 Marie-José Pérec이 마지막으로 성화를 점화합니다. 프랑스령인 카리브해의 과들루프 출신의 유명 체육인 둘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누리는 것이 상징적입니다. 그리고 이 축제의 끝을 건강상의 문제로 4년동안 대중 앞에 서지 않았던 셀린 디옹이 장식합니다.카리스마 넘치는 제스쳐와 호소력 깊은 목소리로 재해석한 그만의 'Hymne à l'amour'. 무대가 끝나자 해설자이자 개막식 의상 스타일리스트였던 다프네 뷔르키Daphné Bürki는 감동에 눈물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무대까지 끝나고 나니 거짓말처럼 비도 멈췄습니다. 솔직히 스포츠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큰 기대없이 시청을 했는데, 처음부터 시각과 청각을 사로잡는 공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상했습니다. 수어 래퍼, 드랙 아티스트, 어린아이, 노인, 다양한 인종과 젠더를 소개하면서 확실히 다양성의 측면은 확고히 보여준 듯 합니다. 특히 전체적으로 프레임 안에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여성 체육인에 대한 존경을 잘 드러낸 것이 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프랑스가 오늘 저녁 보여준 이미지만큼 평등한 나라였다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그 외에도 클래식한 프랑스 문화의 현대적인 해석이나 중간에 삽입된 유머러스하거나 세련된 영상도 아름다웠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이 이벤트에 참여한 모든 관객도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환호와 합창을 아끼지 않았구요. 2023년의 프랑스 유명 뮤지컬 스타마니아 Starmania 연출가인 토마 졸리 Thomas Jolly가 가장 영리한 방법으로 화려한 쇼를 보여줬네요. 물론 완벽하다고는 못할 개막식이었지만, 그래도 생각지도 못하게 즐거운 세 시간 반을 보냈습니다. 앞으로도 이 특별한 행사가 문제없이 잘 진행되길 바랍니다.
P.S. 잠깐, 지금 생각해 보니 마스크를 쓴 두 인물의 정체는 전혀 드러나지 않았네요? 언젠가 알게 될 날이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