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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선령 Oct 18. 2024

[역사] 붉은 동백을 든 소녀도 울었다

여순 10•19 한이 서린 여수 만성리

숨이 막혀 끝까지 읽지 못했던 한강의 <소년이 온다> 마지막,

‘이제 당신이 나를 밝은, 빛이 비치는,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길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역사를 공고히 하고

<작별하지 않는다> 제주 4.3에 이어

펜으로 여순 10.19를 이어나가게 가르치는 것이다.

2019년 10월 전남교육신문에 썼던 기사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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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한 여수 만성리 해수욕장, 그 옆에 사뭇 다른 분위기의 무덤들이 있다.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희생된 수백 명 중 불태워져 신원을 알 수 없는 125명이 묻힌 ‘형제묘’다. 죽어서라도 함께 있으면서 형제처럼 억울한 한을 서로 위로하라고 후세 사람들은 묘비를 ‘형제묘’라 붙였다.

만성리는 1948년 발생한 ‘여수·순천 10·19사건(이하 여순사건)’의 민간인 집단희생지다. 해수욕장 인근 도로에는 ‘여순사건 만성리 희생지’ 푯말과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곳 위령비는 조금 특별하다. 보통 위령비에는 추모의 비문이 새겨지는데,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뒷면에는 말줄임표 ‘……’ 만 적혀 있다. 가장 짧지만 가장 길기도 한, 말줄임표를 통해 위령비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위령비 앞 울먹이며 붉은 동백꽃을 들고 서 있는 소녀가 유족들의 마음을 대신 전해주는 듯하다.


1948년 여수와 순천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해, 광복 이후 남한 단독 총선거안이 채택된다. 미군정에 분노하고 자주독립국가를 열망하던 사람들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다. 4월 3일 새벽, 제주도에서도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군과 경찰은 강경하게 진압했다. 7년여 동안 1만5,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제주 4·3’이다. 당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도 이승만 정부의 제주도 진압 지시를 받았다. 10월 19일, 14연대 군인들은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데 나설 수 없다며 출동을 거부했고 제주도민 학살 반대,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 등을 부르짖었다. 다음은 1948년 당시 <여수인민보(여수일보)>로 보도된 제14연대 봉기군 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의 성명서이다.


“우리들은 조선 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직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 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 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봉기군은 여수와 순천, 주변 지역까지 장악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잘못된 정치에 힘들어하던 지역민들도 동조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진압군을 파견했다. 일주일 만에 여수, 순천 뿐 아니라 보성, 고흥, 광양, 구례, 곡성, 전북과 경남 등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죽거나 다쳤고, 삶의 터전들이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여순10·19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의 조사 자료에 적힌 구술들이 아프다.


“진압해 들어오면서 사람만 보면 무조건 쏴버릴 정도 였어요. 나이 어린 한 학생의 손목을 잡고 냄새를 맡던 진압군민은 화약냄새 난다며 끌고 들어가 죽이기도 했지요.” - 광주전남현대사 2권, 진압군 진술

“오빠가 반란군에 가담했다고 하니까 토벌대가 어머니를 집에 넣고 불질러부러” - 피해자 구술 중


정부는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라고 사건을 왜곡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해 체제 안정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최근까지도 여순사건은 “‘빨갱이’들의 반란”으로 ‘취급’되었다.

여순사건의 발단이라 볼 수 있는 제주4·3은 진실을 밝히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2000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2014년엔 4·3희생자 추념일이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여순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이나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은 갈 길이 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반란’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순 10·19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전남 동부지역사회 연구소, 유족회 등 시민단체가 노력한 결과다. ‘항거’나 ‘항쟁’으로 부르자고 주장하는 역사가들도 늘어났다. 도올 김용옥은 저서 <우린 너무 몰랐다>에서 ‘민중항쟁’으로 명명하자고 주장한다.

전남교육청은 교원, 역사학자 등과 함께 여순사건과 관련된 역사 계기 교육 자료와 역사인물 탐구·체험 자료 등을 개발하며, 아픈 역사를 바로잡는 교육에 힘쓰고 있다. 전남도의회도 여순사건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순천만국가정원의 아름다움과 여수엑스포의 화려함 뒤에는 아픔이 숨겨져 있다.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 오늘에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 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 우리집 태운 사람 얼굴 좀 보자.” 이승만 정부에 의해 광복 이후 최초 금지곡이 되었던 ‘여수야화(1949)’ 가사 속에는 여수·순천의 비극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여수·순천 10·19사건은 독재와 불의에 저항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한 우리나라 뜨거운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 지역의 참혹하고도 슬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역사교훈여행(다크투어리즘: 역사적인 비극의 현장을 방문하는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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