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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완희 May 11. 2024

15화 광활(廣闊)한 광원(光源)

'광'나듯 빛났던, 노고단 일출

 일상을 보내며 힘든 일들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그래서 새롭게 마음을 다 잡고 싶을 때, 우리 가족은 새해가 아니더라도 때때로 '바다일출'을 보러 갔다. 집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비교적 가까운 포항 칠포해변에서 해돋이를 보고, 죽도시장의 따뜻한 칼국수 한 그릇을 먹는 일은, 좋지 않았던 일들로 무거워진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느슨해지고 늘어진 마음을 더욱 단단하게 여며주어, 힘들었던 우리에게 큰 위안이 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일상이 힘들어서라는 것보다, 지금처럼 잘 견디고 잘 버틸 수 있도록, 늘 보았던 바다의 해가 아닌, 산에서의 해를 마주하며 '힘'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일출산행'

나는 아이들에게 일출산행에 대한 생각을 여러 차례 물어보았지만, 나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죄송합니다"였다. 나는 산 능선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꼭 보고 싶었고, 계속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 목요일 저녁, 아이가 인라인 학원을 다녀온 후 ]


"엄마. 오늘 퀸덤 2 TV로 봐도 돼요?"

"몇 시에 하는데?"

"9시 20분이요."

사진출처. Mnet 퀸덤 홈페이지

 아이들이 나에게 얘기하는 '퀸덤 2'는 Mnet에서 2022.03.01~2022.06.02까지 편성된 프로그램으로 솔로 효린을 포함한 브레이브걸스, 비비지, 우주소녀, 이달의 소녀, 케플러 등 걸그룹들이 각 경연마다 자신들의 콘셉트를 잘 나타내는 무대를 보여주며 순위를 매기는 컴백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운동(인라인)과 문화센터(바이올린) 외, '집공부'로 평일의 루틴을 이어가고 있어서, 퀸덤 2는 보통 주말에 재방송으로 봤었는데, 오늘은 '본방송'으로 시청하면 안 되냐고 나에게 얘기를 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퀸덤 2는 2시간 정도 방송이 되는 거라 밤 11시 30분이 되어 끝이 난다. 우리 집 아이들은 늦어도 10시에는 자는데, 주말도 아닌 평일에 거의 12시가 다 되어, 잠을 자는 것이 살짝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럴 때야말로 '협상'이 필요한 거겠지?


"대가가 있어야지."


그 당시, 첫째 아이의 전지적 시점
나는 목요일날 학원을 다 마치고, 엄마에게 '퀸덤 2'를 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전에는, 할 것 다하면 보여줬는데, 갑자기 "대가가 있어야지"라고 말했다. 나는 그 대가가 짐작이 됐다. 바로 학교 갔다 온 후부터 계속 말하던 '일출산행'이다. 그래서 나는 빨리 '퀸덤 2'를 보고 싶은 마음에, 대가를 치르겠다고 했다. 그러고 신나게 '퀸덤 2'를 봤다.
- 첫째 아이의 일기 중.


 

 2년 전의 '노고단'이, 한 달 전의 '천왕봉'이, 한참이 지났지만 '지리산'의 여운은 오랫동안 아이들의 마음 안에 머물러있었고, 한 번도 지리산을 가보지 못했던 아빠와 언젠가 '꼭 함께' 가고 싶어 했던 아이들의 마음도 있었던 터라 우리 인생 첫 번째 일출산행을 지리산 '노고단'으로 정했다.   

 내 마음이 많이 힘들 때 가장 먼저 찾았던 지리산 노고단으로, 이번엔 '해'를 보러 떠나보자.  




2022년 5월 14일 토요일

 

새벽 02시 10분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 '웅_ 웅__' 진동과 함께 알람음이 울렸다. 미움받을 용기를 마음에 장착한 채, 방에 불을 켰다. 여기저기 ".."  "으.."라는 불만 가득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전날 밤 9시쯤 잠이 들었고 5시간 정도만 잤으니 따뜻한 이불속이 더 간절할 수밖에 없다.


"얘들아. 일어나야지."


 이틀 전 '퀸덤 2'의 서바이벌 전쟁을 본 아이들이, 지금 이렇게 일어나는 것과의 전쟁을, 그리고 '대가'를 치르기 위해 억지로 눈을 뜨며 몸을 일으키는 아이들을 보니 일출산행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살짝 든다.


 우린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밖은 어둡고 캄캄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은 짜증 낼 땐 언제고, 노고단주차장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숙소 문 앞에서 별자리를 찾느라 온정신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게 별자리를 찾는 아이들을 서둘러 차에 태우고, 우린 성삼재휴게소로 향했다.

하루 전 날 도착한, 우리의 숙소(지리산 생태체험단지, 삼지구엽초 방갈로)에서 성삼재 휴게소까지는 약 40분가량 소요되어, 지금 출발해야 여유 있게 노고단의 일출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성삼재 휴게소까지 가는 길은 가로등이 없는 시골길이 한참 동안 이어져 쌍라이트를 켜지 않고서는 갈 수 없을 만큼 어둡고 꼬불꼬불한 길이었다. 그런데 성삼재휴게소를 다 와갈 때쯤 대형 고속버스들이 우리 차의 앞 뒤로, 반대차선으로 여러 대 지나갔다. 나는 '버스들이 왜 이렇게 많지?'  '노고단의 일출을 보러 가는 사람들을 태운 버스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새벽 03시 30분

그렇게 우린 무사히 성삼재휴게소에 도착을 했는데, 여러 대의 고속버스에서 등산복차림을 한 사람들이 정말 많이 내렸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장비를 챙겨 등산로로 진입했다. 알고 보니 그분들은 '지리산 종주'를 하시는 분들이었다. 성삼재에서 출발해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로 내려오거나, 노고단에서 천왕봉 사이 주능선을 등반하시는 분들이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살면서 한 번쯤 '지리산 종주'를 꿈꿔보았을 것이다. 나 또한 '언젠가는 꼭 지리산 무박당일종주를 꼭 해보리라' 꿈을 꾼다. 하지만 나처럼 꿈을 꾸는 것만이 아닌, 실행시키는 많은 분들을 보며,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도전하는 그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아이들 또한 한 달 전, 지리산의 천왕봉을 다녀와서인지 힘든 무박당일 지리산종주를 시작하는 분들을 보며 정말 대단하다며 한참 동안 그분들을 바라보았다.

보는 눈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똑같았던 순간이었다.



 이제는 우리도 채비를 시작해 본다. 그런데 지금은 분명 5월이고 아무리 새벽이라 하더라도 기온이 심상치 않았다.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느껴지는 날씨였다. 혹시 몰라 트렁크에 챙겨두었던 털모자와 털장갑, 목도리까지 완벽히 장착하고 노고단 정상으로 출발했다.



[노고단 가는 길]

성삼재주차장 - 무넹기 - 대피소갈림길 - 노고단대피소 - 노고단고개 (4.7km, 평균 1시간 소요)

사진출처.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


[노고단에 오르기 위해 '무조건' 해야 하는 것]

사진출처. 국립공원공단 예약시스템

 노고단 고개에 도착하여 500m 앞, 노고단 정상까지 가려면, 국립공원공단 예약시스템 (knps.or.kr)을 통해, 꼭! 무조건! 노고단 탐방로 예약을 해야 한다.


노고단 정상탐방의 운영시간은 05시~17시.

입장마감은 16시.


※ 기상특보(호우, 태풍 등) 발표 시 탐방이 통제됨.







새벽 04시 10분

랜턴을 켜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놓인 길이었다. 안대로 눈을 가리고 을 때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양팔이 앞으로 뻗게 되는 것처럼, 앞을 보려고 해도 전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성삼재휴게소에서 보았던 많던 사람들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고, 올라가는 길엔 덩그러니 우리만 있었다.


 추웠던 날씨라 따뜻하게 대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올라가는 길이 불안하고 무서웠던 탓인지 온몸에 긴장감이 돌고, 오싹한 기분마저 들었다. 놀이공원에 놀러 가도 '절대' 귀신의 집에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내가 걷는 이 길이 귀신의 집과 비슷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만큼 온몸의 감각들이 곤두서있고, 예민해져 있었다. 그중 가장 예민했던 감각은 '청각'. 바람이 불어, 나무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내 귀에 너무 크게 들려왔다. 그 어떤 어둠보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나뭇잎소리가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햇빛을 받으며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나뭇잎소리는 귀를 간지럽혀주듯 느껴졌는데, 어둠 속에서의 나뭇잎소리는 귀를 괴롭히듯 무섭게 느껴졌다.


 나이 든 어르신들이 가끔 얘기하는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고 얘기할 만큼, 아이들이 걸음을 뗄 때마다 난리였고 전쟁이었다.


"귀신 나올 거 같아요."

"곰 나올 거 같아요."

"무서워요"


 아이들에게 말은 "괜찮아"라고 했지만, 내 몸에 바짝 다가와 내 손을 꽉 잡는 아이를 나 또한 의지하고 있었다. 내가 챙긴 조그마한 랜턴이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밝히기엔 너무도 부족했지만, 그 불빛하나를, 그리고 서로를, 의지해가며 어둠 속으로 들어갔고 정상을 향해 걸었다.


새벽 04시 50분

그러다 문득 하늘 위를 올려다봤는데, 깜깜했던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완전한 검은색 대신 인디고와 프탈로 블루가 살짝 들어간 듯, 밝아지고 있음에 기분 좋았던, 일출시간까지 40분밖에 남지 않은 하늘의 색깔이었다.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갈림길에서 우리는 편안한 길보다, 빠른 길을 선택하여 올라갔고 아이들은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에 마음이 급해졌지만 그럼에도 안전하게 올라가려고 애를 많이 썼다.

2년 전 아이들과 처음 노고단을 올랐을 때, 갈림길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올라갔던 아이들이 대견하다 여겨졌었는데, 오늘 일출산행을 하며 어두운 숲길을 걷고 오르는 아이들을 보니 대단하다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새벽 05시 30분

그렇게 노고단고개를 지나 노고단 정상에 들어서는 순간, 저 멀리 끝이 보이지 않는 산 능선 아래에서 '광'이 나는 동그란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보는 해와 산에서 보는 해는 정말 다르게 느껴졌다.

지난날 우리의 해돋이는 칠포해변 바로 코앞에 차를 세워두고 해 뜨는 시간에 딱 맞춰 몇 걸음 걷지 않고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노고단 정상을 향해 걸었던 우리의 용기와 떠오르는 '해'를 보겠다는 그 간절했던 마음이 지리산 노고단 정상의 '광' 나는 해를 보기에 부끄럽지 않았다.  


 올라오며 살짝 땀이 났던 내 몸에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며 이곳이 해발 1507m 높이라는 걸 실감하게 하듯, 해가 떠오르며 내가 볼 수 있는, 내 눈앞으로 펼쳐지는 광경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남편이 찍어준, 노고단 정상에서의 나와 아이들 그리고 '해'


내가 찍어준,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해'



 막힌 곳 하나 없이 넓은 광활한 이곳에,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는 광원한 '해'를 보고 있으니, '해'가 우리에게 빛을 비춰주며 말을 거는 것 같다.


내 빛을 받았으니,

너희들은 앞으로 '광' 나는 인생을 살 거라고.



(廣闊)한 광원(



 어둠을 뚫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산을 올라가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늘 함께 동행해 주는 나연이 나예 너무 고마워.





첫째 아이의 일기 중, 어느 일부분.


 점심을 뒤늦게 먹으면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느꼈다. 오늘은 내 인생 처음으로 일출산행을 했는데, 맨날 영상으로 보던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꼈고 노고단은 여름에 오고 싶다. 왜냐하면 지금도 너무 춥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낮잠 잤는 것이 너무 평화로워서 기분이 좋은 날인 것 같다.





[episode]



06:20

 노고단을 내려오며 '밥 짓는 곳'에서 아이들과 컵라면을 먹으려고 수프를 넣고 보온병 안의 물을 부은 후, 젓가락을 꺼내려고 하는데 '헉' 젓가락을 깜빡하고 챙겨 오지 못함을 확인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왜 '젓가락'을 챙기지 못했을까?

그날 아침, '밥 짓는 곳'에 있던 분들에게 나무젓가락을 얻어 겨우 컵라면을 먹을 수 있었던 우리 가족.


뜨거운 물을 부어 익어가는 컵라면 속 면발처럼, 밥 짓는 공간 속 나무젓가락을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너희들을 향한 엄마의 고마운마음도 함께 익어가는 아침이구나.


(廣闊)한 광원




아이들과의 열네 번째 여행 중, 어느 한순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계속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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