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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완희 May 04. 2024

14화  비렁길에서의 '비움'

'벼랑'의 아찔함 속,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다면 금오도 '비렁'길

 '시리얼'이라는 것을 몰랐던 어린 시절, 우유에 태워 맛있게 먹었던 과자가 있었다. 바로 '죠리퐁'.

오목한 국그릇에 죠리퐁 과자를 뜯어 1/2만 담은 후, 우유를 죠리퐁이 잠 길듯이 부어, 시원하고 고소한 우유의 옷을 입은 바삭하고 달콤한 '죠리퐁' 건더기 만을 숟가락으로 먼저 건져먹고, 국그릇에 남아있는 우유에 남아있는 나머지 1/2의 죠리퐁을 모두 부어 죠리퐁보다, 더 달달함의 최대치에 도달한 캐러멜맛이 베인 우유와 함께 떠먹었은 게 아니라 비벼먹었던 나. 

뜯으면 한 봉지를 다 먹게 되는 환상적인 맛을 자아내는 죠리퐁을 맛보며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맛있냐며, 나는 늘 죠리퐁 뒤편의 재료와 영양성분을 아주 유심히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죠리퐁 뒤편에 내가 자세히 읽어보고 싶었던 한 가지가 더 생겼다. 

사진출처. 크라운 공식 홈페이지

 바로 '실종아동 찾기'에 나와있는 친구들.  

아이가 어렸을 때, 죠리퐁을 먹을 때마다 마음이 쓰였다. 나는 죠리퐁 뒤편에 부모님과 헤어진 아이들이 어서 부모님과 만나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고, 이렇게 과자봉지 뒤편에 실종아동 찾기 캠페인을 꾸준히 안내하는 '크라운' 회사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응원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런데 모두 그랬던 아니지만, 대부분 아이들이,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부모님과 서로 헤어져 만나지 못했고, '어린이날'에 헤어진 아이들도 다수 있었던 터라 마음이 아팠다.

 

 

 꼭. 죠리퐁 뒷면의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어린이날에는 붐비는 바깥보다, '집' 안에서 아이들과 온전히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았고,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무려 8년 동안 어린이날은 아이와 외출을 하지 않았었는데..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어린이날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바로 캠핑. 그런데 거기서 해먹을 타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아이의 머리 일부분이 찢어졌다. 피가 나고 있는 아이의 머리에 수건을 대어가며 우린 급하게 가까운 응급실을 찾았고, 아이 머리의 찢어진 부분을 스테이플러로 봉합했던 적이 있었다.

 어린이날이라 아이가 좋아하는 구름탕수육을 만들고 있었는데, 구름탕수육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를 봐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며 아이를 한참 동안 꼭 안아주며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에게 '어린이날'이라는 기억은 '죠리퐁의 실종아동 친구들, 찢어진 머리로 아이가 많이 놀라고 아파했던 것, 아이를 향한 나의 미안했던 마음'이라는 것으로 남아있다.

아이를 낳고 처음 외출한 '어린이날'이라, 좋지 않은 기억으로 더 각인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첫째 아이가 3학년 4학년이 되는 해에도 우린 집에서 온전히 어린이날을 보냈고, 첫째 아이가 5학년 둘째 아이가 3학년이 되던 해, '5월'이 되자 아이들은 나를 안심시키려고 이렇게 얘기했다.


"엄마. 저희 안전하게 할게요."

"(엄마를 놀리듯이) 엄마아빠 잘 따라다닐게요."


 누가 보면 내가 '유별나게' 아이들을 키우는 줄 알겠다. 그냥 어린이날만 되면 나는 이상하게 '죠리퐁 뒤편에 아이들'도 생각이 났으니까..

내 얼굴을 보며, '나가요'라고 얘기하는 아이들의 바람에 따라, 이번엔 '나가보자'라는 마음으로 가족회의 끝에 '어린이날'에 갈 곳을 이곳으로 정했다.


바로, 여수 '금오도'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금오도'는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26.999km 2이고, 해안선 길이는 64.5km으로 제법 규모가 큰 섬으로 대부산(해발 382m), 옥녀봉(261m), 망산(347m) 등이 솟아있다. 여수만 남서쪽에 있으며, 북쪽에 돌산도, 북서쪽에 개도, 남쪽에 연도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섬의 생김새가 큰 자라와 같이 생겼다 하여 자라 오(鰲) 자를 써 금오도()라 하였다.


 금오도에서는 남해안에서 찾아보기 힘든 해안단구의 '벼랑'을 따라 조성된 길이 있다. 벼랑의 여수사투리인 '비렁'의 이름을 따서, 그 길을 금오도의 '비렁길'이라 부른다. 섬 해안가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따라 조성된 18.5km의 벼랑길, 지금부터 출발해 보자.



[금오도 배편]


1.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 (주말운행)

여수함구미 / 하절 06:10, 09:50, 14:50(동계 14:20)

함구미여수 / 하절 07:50, 11:10, 16:40(동계 16:05)

소요시간: 1시간 30분 / 개도(1시간)


여수금오도 여천, 우학 / 하절 06:20, 14:30 동절 06:20, 14:00

금오도 여천여수 / 하절 09:00, 17:20 동절 09:00, 17:00

금오도 우학여수 / 하절 08:40, 17:00 동절 08:40, 16:25

소요시간: 여수여천(1시간)/ 우학(1시간 30분)/ 연도(1시간 40분)


2. 돌산신기항

신기금오도 여천 / 하절 07:45, 09:10, 10:30, 12:00, 14:30, 16:00, 18:00, 19:30, 20:30

                            동절 07:45, 09:10, 10:30, 12:00, 14:00, 15:50, 17:00, 18:30, 19:30


금오도 여천신기 / 하절 08:20, 09:40, 11:00, 13:00, 15:00, 16:30, 18:30, 20:00, 21:00

                          동절 08:20, 09:40, 11:00, 13:00, 14:30, 16:20, 17:30, 19:00, 20:00

소요시간: 25분


3. 백야도선착장

백야함구미직포 / 동. 하계 11:00

백야함구미 / 동. 하계 07:20, 09:10, 11:00, 13:20, 15:40

함구미백야 / 동. 하계 08:10, 10:00, 12:23, 14:45, 16:25

직포함구미백야 / 동. 하계 12:05

소요시간: 백야함구미(35분)/ 백야직포(1시간)


여수 '금오도'로 가는 자세한 사항은 여수 관광문화 홈페이지를 통해 볼 수 있다.

여수관광문화 > 관광안내 > 교통정보 > 오시는 길 > 여객선 (yeosu.go.kr)


※ 우리는 금오도로 가는 배편 중,  '25분' 정도로 가장 짧은 시간이 소요되는 '신기항에서 금오도 여천항으로' 가는 배를 이용하기로 했다.




2022년 5월 5일 어린이날 

 

 선착장 40m 전, 거의 다 왔는데 차들이 꿈적도 하지 않는다. 네이버 지도 길 찾기에 나온 시간으로 맞춰 출발했는데, 막상 티맵을 켜보니 생각했던 시간보다 15분 정도 더 걸리는 바람에 많이 늦었다. 

'우린 10시 30분 배를 타야 하는데..' 지금 시간은 10시 15분, 주차장으로 들어가길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차들 사이, 나는 차에서 내려 '금오도 비렁길 여객터미널 매표소'로 뛰었다.


 붐비는 터미널 안, 매표소에 표를 끊기 위해 줄을 섰다. 내가 이토록 서두르는 이유는, 이곳은 '전화. 인터넷 예약불가, 무조건 당일 선착순 발권' 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린 'half 배낭도보여행'으로 금오도를 여행하기 때문에 차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아서 무사히 표를 끊을 수 있었다.


"어디야?"

주차장이 만차라서, 터미널 옆 공사장 옆쪽으로 주차를 했다고 한다. 나는 주차를 한 곳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공사장의 흙먼지가 섞인 바닷바람이 나를 향해 불어와 내 눈을 따갑게 했고,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으로 눈을 뜨기 힘들었다. 나는 '선글라스'는 무조건 챙겨야 한다며, '선글라스 챙기기'를 머릿속에, 그리고 혼잣말로 계속 되뇌며 차에 도착했다.

(선글라스를 챙기며) "짐 챙기고 어서 배에 타자."


 1박 2일 동안 트레킹을 할 예정이지만, 차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아서 더 꼼꼼하게 살펴보며 빠르게 짐을 챙겼고 우린 10시 30분 배를 '겨우' 탔다. 말 그대로 15분의 기적이었다.




 4월 15일 지리산 산행을 갈 때는 나와 아이들 '셋' 뿐이었는데 이번 여행은 가족 완전체의 여행이기도 하고, 어린이날 기념 여행이라 발 사진을 남기려고 하는데 '헉'!!!


"어떡해. 트렁크에 등산화 안 신고 왔다."


 배를 타기 전 갈아 신으려고 자동차 트렁크 안, 큰 바구니 안에 넣어뒀는데 우리 가족모두 깜빡하고 배낭챙겨 급히 배에 탄 것이었다. 배는 이미 출발했고,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도 남편과 아이들은 러닝화인데, 나는.. 컨버스운동화.. 운동화긴 운동화인데.. 비렁길을 걷다 고무밑창이 떨어지진 않을지, 내 발바닥은 무사할지, 여러 걱정이 되었다.

컨버스 운동화야. 1박 2일 동안 잘 부탁해..(또르르)


 

 그렇게 배를 탄지 25분 만에 우리는 금오도 여천항에 도착을 했고, 배의 도착시간에 맞춰 여천항 선착장 앞에 대기 중인 마을버스를 탔다. 이 버스는 여천항에서 금오도 1코스의 시작지점인 함구미선착장으로 이동하는 마을버스다. (어른 2천원, 아이 1천원의 요금/ 결제는 현금만 가능)


 마을버스 안은 금오도 비렁길을 걸으려는 분들로 가득 찼고, 함구미선착장까지 가는 동안 마을버스 기사님께서는 금오도의 '버스와 택시'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금오도에는 마을버스 외에 택시가 2대 있는데 택시비가 어마어마하게 비싸고, 택시를 잡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하셨다. 그래서 버스시간표를 잘 찍어두는 게 '포인트'지만, 간혹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많고 적음에 따라 버스운행시간이 달라질 때도 있다고 하셨다.


  10분 정도 버스기사님의 설명을 듣고 나면, 어느새 비렁길 1코스 시작점인 함구미선착장에 도착한다.


 우린 'half 배낭도보여행'으로 금오도를 여행한다. ' half 배낭도보여행'이란, 1박 이상의 야영 생활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산과 들을 마음껏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여행을 의미하지만,  'half' 말 그대로 '절반'의 배낭도보여행이다. 

야영할 텐트를 가져가고 싶었지만 아이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잠 만, '민박집'에서 자기로 했다. 그래서 텐트 외에 1박 2일 동안 필요한 우리의 짐, 배낭을 짊어지고 금오도를 걷는다. 배낭 안에는 세면도구, 갈아입을 옷, 얇은 이불과 베개커버, 간단한 약품들, 간식 그리고 우리가 금오도를 걸으며 마실 물들이 들어있다. 아이들도 자신의 짐들은 자기 스스로 챙겼다.  

   

※ 'half 배낭도보여행'이라는 말은 내가 우리의 상황에 맞게 만든 말이다.

 



 금오도 비렁길 1코스는 함구미-미역널방-송광사절터-신선대-두포로 이어지는 길로 총 5km, 평균소요시간은 2시간이다.

 봄이라 꽃가루, 미세먼지, 황사까지 공기 속에 좋지 않은 것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날들이 계속 이어져, 한동안 창문을 닫아두고 생활을 해서인지 답답한 부분들이 많았고, 야외활동 시 무조건 마스크는 필수였는데 오늘은 날씨가 맑고 화창해서 마스크 없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이 너무 시원하고 좋았다.  

 

 비렁길 1코스의 초입은 살짝 경사가 있는 언덕길이다. 걷는 발아래로는 야자매트가 깔려있고, 사방으로는 풀숲이 우거져있는 오솔길이 한참 이어진다. 숲길이 언제 끝나나 싶을 때, 햇볕이 내리쬐는 벼랑길이 나오고, 벼랑길이 끝나면 또다시 풀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걷는, 오솔길과 벼랑길의 반복이었다. 산과 바다를 30-40분 정도 번갈아가며 걷다 보니 '미역널방'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에 미역을 널어두었다고 해서, '미역널방'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믿기 어렵겠지만 위의 사진 속 아이들의 나무게이트 밑은 아래 사진처럼 절벽(벼랑)으로 되어있다. 실제 미역널방에서는 넓은 바다가 주는 평온한 느낌이 더 크게 와닿아서 시선이 절벽아래가 아닌, 바다를 향해있었고, 그래서 절벽이라는 느낌이 덜 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우리가 소름 돋을 만큼 아찔했던 순간은 미역널방을 지나와, 뒤돌아 본 미역널방이었다.

다시 미역널방에 간다면, 아이들은 과연 위의 사진처럼 망원경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사진출처. 여수시청 홈페이지

 

 비렁길 1코스구간을 걷기 시작한 지, 1시간 정도 지났다. 이제는 오솔길보다 조금 넓고, 미역널방의 고도보다는 낮은 길이 나왔다. 5월 초였지만, 내리쬐는 햇볕과 기온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방불케 했다. 걷는 것이 많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더위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만약 우리가 걷는 옆길이 벼랑길이 아닌, 해변길이었다면 바로 바다로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했다. 함구미선착장에서 출발하여 금오도 비렁길을 꽤 오래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함구미선착장에서 보았던 '노란색 집'과 멀리 함구미선착장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길을 잘 못 들었나? 왜 처음시작지점으로 다시 오게 된 거지?"

 꼭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사진의 노란색 스티커가 있는 지점에 우린 서 있었고, 이곳과 우리가 금오도 마을버스에서 내려 출발한 곳이 불과 500m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지점과 가까운 곳으로 오게 된, 이곳, 이 길이 맞는 길이었다. 비렁길 1코스는 이렇게 금오도의 용머리길이 먼저 이어진다. 아이들은 10분 만에 올 수 있는 거리였는데, 1시간을 걸어서 왔다며 투덜대기 시작했다.

 "이럴 땐 쉬어가야지. 그치?"


 시간도 12시가 한참 지났다. 점심도 먹을 겸, 1코스에 있었던 비렁길 쉼터라는 식당으로 들어가서 먹을 것을 주문하고 아이들과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아주머니께서 테이블로 막걸리를 가져다주셨다.

남편의 얼굴이 공개되는 순간!

"저희는 막걸리는 주문 안 했는데요."

"사장님(?)이 주문하셨습니다."

"네? 아.. 감사합니다.."

남편을 보니,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 양반이... 음주산행을 하겠다는 거야?')

"자기야. 비렁길 걸으면서 막걸리 마시겠다는 건 죽겠다는 거야. 뭐야?"

"방풍나물 전에 막걸리가 빠질 수 없지."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고 테이블을 보니, 죄다 술안주가 가득하다. 도토리묵무침에 방풍나물 전, 잔치국수, 해물라면까지.

"그래. 막걸리 한잔 마시고 슬렁슬렁 걷자."


 테이블 옆 펼쳐지는 금오도 바닷길의 풍경을 보며 마시는 막걸리는 시원하고, 요구르트의 달달한 맛도 나며, 살짝 쌉싸름하기도 한 안 시켰으면 후회했을법한 이 식당 최고의 시그니처메뉴였다. 알고 보니, 금오도는 '방풍나물'이 굉장히 유명하고 이 막걸리는 '방풍 막걸리'로 금오도의 특산품이라고 했다.


그렇게 여유롭게 점심을 즐기고, 우린 다시 걷기로 했다. 차가 아닌 오로지 배낭을 메고, 걷는 half 배낭도보여행이니까!

그런데, 가방이 처음 들었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남편의 가방도 아이들의 가방도, 내 가방도 정말 무거웠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우리 가족모두 함께 걷는다는 것, 그 하나로 행복해했고 만족해했다. 늘 아빠는 바빴기 때문에, 엄마와 아이들 '셋'만 걷는 여행을 다니는 경우가 많았던 터라, 이번 여행이 더 의미 있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제 1코스 구간의 절반이 남았다. 2코스 시작점인 '두포'로 열심히 걸어가 보자.  




 식당에서 출발하여 30분가량 걸었을 때쯤, 첫째 아이는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엄마..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때의 상황을 첫째 아이의 일기로 대신 적어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또다시 출발하고 얼마 안 있다가 (?)이 마려웠다. 그것도 정말 급한 것 말이다. 근데... 어차피 출발을 해버려서 나는 1시간 30분 동안 급(?)을 참았다. 배는 안 아팠는데, 나올려는 것을 다시 돌려보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식은땀이 나왔다. 가는 도중 몇 번이나 멈춰서 풀숲에 누려고 하다가 참을 수 있다고 해서 참고 걸었다. 나는 항상 긴장되면 (?)이 마려운데, 그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하지만 오늘만은 그것이 싫었다. 그리고 1시간 30분이 지난 후, 나는 1코스를 다 끝내고 화장실을 찾으러 갔는데, 저~멀리 있었다. 그래서 거기까지 걸어서 결국 화장실에 가서 (?)을 했다. 너무 기분이 홀가분했다. 그리고 온몸이 가벼워져서, 하늘 높이, 날 수 있을 만큼이었다. 그리고 가볍게 2코스를 시작했다.


 첫째 아이가 (?)라고 하는 것은 '똥'이다. 식당에서 출발해서 꽤 걸었다고 느꼈을 때, 아이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고,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기엔 더 힘들고 어려울 것 같아 1코스의 마지막지점까지 일단 참을 수 있을 때까지는 참으며 걷자고 했는데, 중간중간 힘든 고비가 찾아와 아이와 풀숲에 처리를 해야 하나? 가방에 짐을 넣어둔 지퍼백을 꺼내 처리를 해야 하나 등등 여러 고민에 빠졌고,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아이도 그런 상황이 불편했던지, 끝까지 참겠다고 했고 두포까지 10분? 정도 남아있던 시점에 첫째 아이에게 '마지막 고비'가 왔고 결국 남편은 첫째 아이의 가방을 들고, 첫째 아이의 손을 잡고 뛰어 산을 내려갔다.


 그렇게 남편과 첫째 아이가 앞서 산을 내려가고서야, 나는 주변이 눈에 들어왔고, 둘째 아이와 발걸음을 조금 늦추며 걸을 수 있었다. 두포가 가까워질수록 산에서 벗어난다는 느낌이 들었고, 옆쪽으로 에메랄드 빛 바다가 보였다.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 크레파스에 '에메랄드'색이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 닳는 것이 아까워서 아주 조금씩 아껴 쓰던, 내가 무척이나 좋아하던 색깔이었는데.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니 그때의 추억이 순간 떠올랐다. 아껴 썼던 크레파스처럼, 아껴두며 계속 보고 싶은 바다의 모습이었다.   


 둘째 아이와 나는 무사히 두포, 1코스의 마지막지점까지 내려왔고 첫째 아이도 무사히 화장실을 다녀왔다.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져 하늘높이 날 수 있을 것 같은 첫째 아이와는 반대로 남편은 기진맥진 상태였다. 1시간 전, 방풍막걸리 마신 것의 취기가 살짝 올라오는 것이 다 깼다며 이야기를 했다.


 일기에 아이는 1시간 30분이라고 적어놓았는데, 우리가 식당에서 1코스의 마지막지점까지 걸린 시간은 총 50분 정도였고, 실제 아이는 25분가량 참은 것이다. 25분의 시간이 1시간 30분이 걸렸다고 느낄 만큼 아이에게는 그 시간이 힘들고 길었던 시간은 아니었을까.


 1코스만 걸었는데, 비렁길의 모든 코스를 다 걸은 것처럼 지쳐갔다. 조용한 두포바다 앞 작은 슈퍼가 하나 보였다. 문이 잠겨있어서  "계세요?"를 몇 번이나 외치며 문을 두드렸지만, 끝내 주인분은 나타나지 않으셨다. 우린 슈퍼 안, 냉동고에 있는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었지만 끝내 먹지 못했고, 나무그늘아래 가방을 내려두고 한참을 벤치에 앉아, 아니 누워서 쉬었다. 그러다 개미떼들의 습격에 급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우리에게 얼른 출발하라고 얘기하듯 느껴졌던 개미떼였다.



 

 비렁길 2코스는 두포-굴등전망대-촛대바위-직포로 이어지는 코스다. 총 3.5km로 평균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이다.


 2코스의 초입은 넓은 산길로 서서히 고도를 높였다. 산을 오르는 중간엔 마당에 잔디가 깔려있고 보기에도 깔끔해 보이는 펜션이 있었다. 아이들은 오늘 우리가 있을 민박집은 어떤 곳이냐며 나에게 물어왔다.

"얘들아. 여기는 펜션이고, 우리가 있을 곳은 민박집인데..(생략)"  

아이들에게 펜션과 민박집을 비교해 가며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며 길을 걸었다. 사실 우리가 가는 민박집은 '잠'만 있는 곳이다. 3코스 직포마을에 있는 민박집으로 작은 단칸방형태로 되어있으며, 취사는 불가능하고 다행히 화장실은 딸려있다. 5월 5일 어린이날이고 공휴일이지만 7만원으로 저렴한 편에 속한 민박집이다. 야외텐트보단 안전하고 아늑한 잠자리를 기대하며 직포마을로 향했다.

 전체적인 2코스의 길은 벼랑길보다, 산길의 비중이 많았다. 1코스보다 길은 훨씬 험하게 느껴졌지만 거리가 1코스보다 짧았던 탓인지 아이들은 훨씬 기분 좋게 걸었다. 안내표지판이 나올 때마다 줄어드는 거리에 즐거워했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마다 기뻐했다.


 사진 속 웃고 있는 아이는 1코스 때 (?)때문에 힘들어했던 첫째아이다. 촛대바위까지 도착해서 아이는 지금 기분이 너무 좋은 상태다. 멀리 보이는 해변과 마을이 우리가 걷는, 오늘의 마지막 지점이라 더 기뻐했을지도 모르겠다.


촛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

 촛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다. 비렁길을 걷는 것이 쉽진 않지만, 힘들 때마다 이렇게 바다를 보며 쉬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일상을 보내며 힘든 순간들이 올 때, 베란다 창문을 열어 이런 풍경을 보며 커피 한잔 마시며 쉬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욕심이 내 마음속에 자라났던 순간이었다.  


민박집 앞, 바다풍경

 드디어 3코스 시작지점인 직포에 4시 40분쯤 도착을 했다. 우린 민박집으로 갔고, 민박집에 도착하여 우리가 쉴 작은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엄마~TV가 있어요!"


 우린 그날 TV와 둘도 없는 단짝친구가 되어, 밤이 늦도록 TV를 보며 웃고 떠들다 잠이 들었다.




2022년 5월 6일


 "엄마~배고파요"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우리 아이들의 배꼽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비렁길 3코스시작점에 있는 '3코스 식당'으로 갔다. 우린 낙지볶음과 전복라면을 주문했다. 우리가 갔을 땐(5월 5~6일) 3코스식당만 영업을 하여, 그 전날에도 3코스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오늘아침도 3코스 식당으로 아침을 먹으러 왔다.

주부의 삶을 사는 나에게 누가 차려주는 밥이란 이 세상에서 우리 엄마 두 분(친정, 시댁) 밥 다음으로 제일 맛있는 밥이다. 항상 어디를 가든 미니 전기밥솥을 들고 다니며 밥을 해 먹었는데, 걷는 여행을 하며 이렇게 호사를 누리는 날이 있다니! 


 든든하게 밥도 먹었으니, 이제 3코스를 걷기로 했다. 지금 시간은 9시 50분이다. 

 금오도 비렁길의 총 5코스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3코스로 출발해 보자. 3코스는 직포-갈바람통전망대-매봉전망대-비렁다리-학동까지 총 3.5km 거리로 평균 2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오늘도 half 배낭도보여행의 '짐'들을 짊어지고 출발을 해본다. 처음부터 계단길이다. 어제 8.5km의 거리를 산을 올라가고 내려오듯, 반복되는 길을 걸어서인지 다리의 뭉침 정도가 '극상'이었다. 매 코스마다, 산을 넘 듯 다음 마을로 가는 것이라, 이번에도 높은 고도를 향해 출발하는 초입이 오늘은 조금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계단길을 지나면, 나무숲길이 한참 동안 이어진다. 사람의 손길이 아닌 자연이 만들어 낸, 여러 나무숲길의 모습들이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볍게 만들어주어 걷는 내내 감탄을 하게 만든다. 

경사가 있는 같은 숲길이어도 '거칠다' 느껴지는  1, 2코스와는 다르게, 3코스는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길이었던 같다. 


 하지만 비렁길은 비렁길이다. 중간중간 '위험! 내려가지 마시오'라는 안내표지판이 많이 있었고, 숲 깊을 걸으며 나무틈사이로 보이는 바다 옆이 절벽인 경우가 꽤 많았던 터라, 걸으며 아찔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직포에서 학동까지 이어지는 3코스를 꼭 가 볼 필요가 있는 그 이유는!


갈바람통 전망대와 매봉전망대 사이.

 

 이곳 때문이다. 사실, 이곳은 어떤 전망대도 이름이 붙여진 곳도 아니다. 한참 동안 숲길을 걷다가 바다가 보이는 트인 길로 나오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본 금오도의 풍경 중,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기 때문이다. 추천하고 싶은 금오도 3코스, 나만의 '핫플' 이라고나 할까.

기이한 모양의 암석들과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바다가 어우러진 그곳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이 아닐까 생각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다 그림이었고, 어떻게 찍어도 다 작품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 얘기하는 매봉전망대에 도착했다. 금오도 비렁길을 걸으며 모든 바다가 아름답다 여겨졌지만 역시는 역시였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떤 곳이 바다인지, 어떤 곳이 하늘인지 구분이 어려울 만큼 바다의 조각들과 하늘의 조각들이 함께 어우러져, 내 마음속 깊이 '바다의 한 조각'으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린 1시쯤, 3코스의 종점 학동마을에 도착을 했고 어제부터 먹고 싶었던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으며 가족회의를 시작했다. '4코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아이들은 다수결로 결정해야 한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주장했고 가족회의 결과 3:1의 과반수 결과로 4코스와 5코스는 다음번을 기약했다. '1'이 바로 나다.




 그렇게 학동마을에서 여천여객선터미널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남편이 나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화장실 가고 싶다."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20분 정도 여유가 있어서, 남편은 버스정류장 건너편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갔고, 나와 아이들은 화장실 옆 정자에서 잠시 짐정리를 하며 쉬고 있었는데, 저 멀리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오고 있었다.  


'헉' 

'내가 헛 것을 본 건 아니겠지?'


나는 그 순간, 길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갔다.

"기사님. 버스가 2시에 온다고 해서 기다리다가 남편이 조금 전에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조금만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빨리 나오라고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나는 남자화장실 문을 열고 큰소리로 얘기했다.

"자기야. 버스 왔어. 빨리 나와"

아이들도 급히 자신의 배낭을 챙겼고, 남자화장실로 가서 큰소리로 얘기했다.

"아빠. 빨리 나오세요"


우린 1분? 도 채 안되어 무사히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기사님: "화장실에서 끊고 나오신 거 아니죠?"

남편: "끊고 나왔습니다."

25인승 마을버스라 이미 소문은 퍼질 때로 퍼져있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여기저기 퍼졌다. 

빈틈없이 사람들을 태운 금오도 마을버스는, 빈틈없이 웃음을 가득 채운채로 여천항으로 신나게 달렸다.




이번엔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둘째 아이의 일기를 살짝 들여다보자.


 갑자기 버스가 왔다. 그래서 엄마가 막 뛰어가서 "기사님! 기사님!" 하고 말하니까 기사님이 "빨리 타세요. 지금 사람들이 많아서 빨리 왔어요."라고 말하셨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가 화장실에 가 있으니까, "화장실에 갔는데!"라고 말했다. 그래서 엄마는 어쨌든 허둥지둥 뛰어와서 "얘들아! 빨리 짐 챙겨!"라고 말하고 아빠한테 버스 왔다고 하셨다. 그래서 아빠도 빨리 닦았다. 언니는 나와 보고 있던 탭을 챙기고 나는 가방(배낭)을 먼저 메고 엄마 핸드폰을 챙겼다. 그러고는 아빠한테 나오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나와서 우리는 버스를 겨우 탔다. 




 1박 2일 동안 '금오도 half 배낭도보여행'을 하며, 여러 멋진 풍경들을 보며 걸었던 것도 기억에 남았지만, 첫째 아이와 남편의 (?)이 나에겐 '비움'이라는 특별한 추억을 남겼던 걷기 여행이었다.  


 비단, '비움'이라는 것이 (?)에만 있을까.

법정스님의 명언 중,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며, 가볍지 않은 일들에 부딪힐 때도 있다. '단순한 삶의 기쁨'을 내 인생 모토로 여기며 사는 나에게, '비움'이라는 것은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하여 '단순한 삶'을 살아가고픈 나의 희망이 담긴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금오도 비렁길을 걷는 것만큼이나, '비움' 또한 늘 어렵다. 

아직 나는 초보등산러이자, 초보비움러니까.   






1박 2일 동안 걷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늘 함께 동행해 주는 나연이 나예 너무 고마워.






아이들과의 열세 번째 여행 중, 어느 한순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계속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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