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를 키우며 알뜰살뜰 살림을 사는 아줌마인 나에겐 참을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다.
1+1, 최저가, 초특가, '온라인 단독' 행사, 마트의 유통기한 임박 '떨이 제품' 그리고 마지막 "가성비"
가성비로 따질 것 같으면 이것만 한 게 없다. 바로 '자연휴양림'.
아이들과의 여행을 계획할 때 여행할 곳을 먼저 정하고 숙소를 정할 때도 있지만, 이번 여행은 반대였다. 살면서 한 번은 꼭 그곳에서 머물며 쉬고 싶었던 곳.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가성비 인 숙소는 바로 '하동 편백 자연휴양림'이다.
일단, 이곳은 30초 컷? 아니 10초 컷(10초 만에 예약이 마감된다는 뜻)으로 예약이 매우 어렵다. (나같이 예약을 하려고만 하면 없던 수전증이 생겨, 마우스를 잡고 있는 손을 덜덜.. 떨다가는 어림도 없는 곳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평일 숙박에 초록불이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누가 취소를 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건 운명이야!' 그렇게 운명적으로 예약한 이곳의 여행을 계획하며, 나는 그곳을 감히 꿈꿔보았다. 그곳은 '지리산 천왕봉'.
평소 아이들과 내가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운동 그리고 걷기다. (12화 거제 지심도 편까지 연재를 하였지만, 그 외 매일 운동을 하는 것과 주말엔 둘레길을 꾸준히 걸으며 체력을 키우고 있다) 물론 남편의 반대가 심했다. 내가 아이'둘'을 데리고 지리산 천왕봉에 간다고 하니 걱정이 많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아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 올라가다가 많이 힘들면 내려와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하게 된 여행이었다.
D-day 2. 2022년 4월 13일
구례를 지날 쯤이었다. 하동편백 자연휴양림까지는 1시간가량 남았을 쯤이었는데, 차 앞유리에 '비'가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더니 이내 와이퍼를 작동시키지 않으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어? 비 온다는 소식은 없었는데?'
자연휴양림이 가까워질수록 비는 전혀 그 칠 생각이 없을 정도로 바람과 함께 한통속이 되어 계속 쏟아졌다. 높은 고도에 위치하고 있는 자연휴양림으로 올라가는 길은 비와 바람, 그리고 이제는 운무까지 한 편이 되어 자연휴양림으로 온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다가 말겠지?' '설마, 내일은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무사히 하동편백 자연휴양림에 도착을 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날씨 검색을 했다.
'헉' 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내일 아침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를 보았다. 속상한 마음과 사실, 짜증 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짜증을 내어본들 나만 손해다. 해결방법은 '하루 늦추기'. 비가 오면 길이 많이 미끄럽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
마음을 내려놓고 102호 마음소리방을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나는 베란다로 향했다.
하동편백자연휴양림 마음소리방 비 오는 베란다 뷰.
세상에.. 빽빽하게 하늘로 뻗은 편백나무가 내가 와있는 이곳이 편백나무숲임을 실감 나게 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며 축 늘어지는 편백나무잎,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편백나무줄기, 비로 인해 더 짙어 보이는 편백나무들이 더 운치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많은 비가 쏟아지는 날씨는 아니지만, 가는 빗줄기가 쉴 새 없이 내리는 지금,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날아오는 시원한 공기 속, 편백나무의 향이 느껴지는 듯, 나에겐 이곳의 모든 것들이 각별했다.
D-day1. 2022년 4월 14일
비가 온 후 날씨가 맑아지길 기다리며, 하동편백 자연휴양림을 산책하고 가까이에 있는 '남사예담촌'을 둘러보며 하루를 보냈다.
드디어 D-day. 2022년 4월 15일
05:20
오늘이 이곳 숙소의 '퇴실' 일이라 어제 오후에 필요한 짐 몇 개만 남겨두고, 모든 짐을 차에 싣고 정리했던 탓인지 산을 오르기도 전인데 온몸이 뻐근하고 쑤신다. 그래도 지금 일어나야 늦지 않게 준비할 수 있기 때문에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중산리 주차장까지 40분 정도 운전을 해서 가야 하고, 8시 순두류 버스(아래에 설명하겠다.)를 '꼭' 타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늦어도 7시에는 무조건 출발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첫째 아이가 천왕봉에 올라가서 먹고 싶다고 했던 볶음밥도 만들고, 우리가 먹을 아침도 간단히 준비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6시에 아이들을 깨웠다. 평소 아이들을 깨우려면 몇 번을 흔들어 깨워야 일어나는데, 오늘은 한 번만 얘기해도 벌떡 일어났다. 아마 어제 수없이 들었던 '순두류 버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버스를 놓치면 30~40분을 더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모든 준비를 끝내, 7시에 퇴실을 했고 7시 40분쯤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을 했다.
오늘 우리가 오를 '지리산(智異山)'은.
1967년 12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다. 지리산은 경남의 하동, 함양,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 483.022㎢의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둘레가 320여 km나 되는 지리산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 개의 능선 사이로 계곡들이 자리하고 있다. 동과 서, 영남과 호남이 서로 만나는 지리산은 단순히 크다, 깊다, 넓다는 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지리산은 "백두산이 크게 끝난 곳으로 산의 다른 명칭은 두류산(頭流山)이라 하였고 또한 산세가 험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육산이라 뜻하는 우리말 '두루', '두리'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두류'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지리산의 천왕봉으로 오를 수 있는 코스는 총 6개가 있다.
[지리산 천왕봉 코스]
1. 중산리(장터목) 코스 (12.4km, 9시간 소요, 난이도 중)
중산리 탐방안내소-칼바위 삼거리-장터목대피소-천왕봉-로터리 대피소-중산리 탐방안내소
2. 중산리(칼바위) 코스 (왕복 10.8km, 9시간 소요)
중산리 주차장-칼바위-로터리대피소(법계사)-천왕봉
3. 백무동-중산리코스(12.9km, 9시간 소요)
백무동 탐방지원센터-소지봉-장터목-천왕봉-로터리대피소-중산리탐방안내소
4. 백무동코스 (왕복 15km, 11시간 소요)
백무동야영장-소지봉-장터목대피소-천왕봉
5. 거림코스 (18.9km, 11시간 소요)
거림공원지킴터-세석대피소-장터목대피소-천왕봉-로터리대피소-중산리 탐방안내소
6. 유평(대원사) 코스 (왕복 32km, 16시간 30분 소요)
유평 탐방지원센터-우평마을(밤밭골)-치밭목대피소-천왕봉-중산리탐방안내소
6개의 코스 중, 아이들과 나는 지리산 천왕봉의 코스 중 2번 중산리(칼바위) 코스를 중심으로 하되, 올라갈 땐 중산리주차장에서 순두류(환경교육원)까지 버스로 이동한 후, 순두류에서 로터리대피소를 거쳐 천왕봉으로 오를 예정이다.
순두류(환경교육원) - 로타리대피소 - 천왕봉 - 로타리대피소 - 칼바위 - 중산리 탐방안내소 (10.2km, 평균 8시간 20분 소요)
왼쪽사진처럼 중산리 탐방안내소에서 칼바위코스를 거쳐 로타리대피소까지 가야 하지만, 오른쪽 사진처럼 순두류(환경교육원)까지 버스로 이동한 후, 로터리대피소까지 걸어서 올라가기로 했다. 30분 정도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뿐더러, 칼바위코스보다 조금 더 수월한 길로 로터리대피소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순두류 버스'를 타기 위한 이유.
08:00
중산리 탐방지원센터에서 순두류(환경교육원)까지 가는 버스의 첫 차는 주말 07시, 평일 08시이다. 기본 운임료는 어른은 2천원, 초등학생은 1천원이므로 현금 4천원을 준비하여 7시 55분에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어른들로 가득 찼고,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 둘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버스 안에서부터 아줌마 아저씨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버스가 출발하길 기다렸다.
버스 안,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따라라 따 라라라 따~ ♬ 삐~' 8시를 알리는 음악이 끝나자마자 기사님께서는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순두류로 출발을 했다.
그렇게 10분가량 이동을 하여 드디어 순두류에 도착을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위령비와 지리산법계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었다. 위령비는 지리산에서 등산객을 구조하여 소방헬기를 타고 돌아가던 중, 헬기의 추락사고로 소방관을 비롯한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나는 아이들과 안전하게 지리산을 오르며 절대 무리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얘기를 했다.
08:23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생태탐방로 입구가 나왔다. 로터리대피소까지는 2.8km의 거리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어제 아침까지 비가 와서 혹여나 걱정을 했는데, 오르는 길은 질퍽거리거나 미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비가 와서 지리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볼 수 있는 계곡에 흐르는 물도 많았고, 또 맑았다.
30~40분가량 오르다 보면 만날 수 있는 크고 작은 바위길, 이때는 두 발이 아닌 가끔 네 발로 기어야 할 때가 있을 만큼 길이 험하기도 해서 발목부상을 특히 조심해 가며 산을 올랐던 것 같다. 한라산에 이어 지리산도 돌이 정말 많다며 바위들을 하나하나 밟고 오를 때마다, 아이들의 이마와 얼굴에 땀이 흘렀다. 중간중간 힘들 때마다 물을 마셔가며 쉬어가기도 했다.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길도 '매점'이 없기 때문에, 한라산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아이들 가방에 나눠 짐을 들었고, 올라가면서 아이들 가방에 들어있는 물들을 먼저 꺼내마셨다.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의 가방 안에는 각각 500ml 물 3통과 간식(젤리, 초콜릿)이 들어있다. 많이 넣은 것 같지 않은데, 많이 넣은 것처럼 아이들의 가방이 꽤 무겁다.
09:50
자. 이제 엄마 가방을 비울차례가 왔다. 여긴 '로터리대피소'.
그 바쁜 새벽에 오렌지와 오이를 산에 올라가며 먹을 간식이라고 준비를 했는데, 비닐에 넣어왔더니 물러터지고 난리가 났다. 비닐이 터지지 않은 게 다행일정도였다. 달달한 오렌지와 아삭한 오이를 맛있게 먹었지만, 수분감이 많은 간식이라 로터리대피소를 지나면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조금 불안하긴 했다.
그런데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로터리대피소의 '푸세식 화장실'이다.
간식을 먹고, 다시 정비를 하여 산을 오르기 전에 이곳 화장실을 '무조건' 다녀와야만 해서 '푸세식 화장실'에 대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어서, 아마 더 난리법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화장실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몇십 분의 시간을 보냈는지... 여자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라서 더 힘들었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이들은 산을 오르는 것보다, 로터리대피소의 푸세식 화장실을 가는 게 더 힘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화장실과의 요란한 대면식을 마치고, 우리는 최종목적지 '천왕봉'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난 '법계사'
10:25
법계사는 높이 1400m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삼국시대 승려 연기가 창건한 사찰로 1405년 선사 정심이 중창한 뒤 수도처로서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고승들을 배출한 사찰이기도 하다. 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법계사도 둘러보면 좋을 것 같은데, 내려오는 길에 가능하다면 둘러보기로 하고 일주문에서 인사(?)를 드린 다음 천왕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 발로 걷는 게 이젠 익숙해질 만큼 길이 험함을 느꼈다. 경사도 급경사가 아니라, 급 급 급경사였다. 로터리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 가는 이 길이 왜! '매우 어려움' 인지 알 것 같았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다리도 아팠지만, 어깨도 너무 아프고, 가방의 무게를 분산(?)시키다 보니 가방과 연결되어 있는 내 허리, 내 골반까지 아파왔다. 산을 오르며 이렇게까지 힘든 적이 없었는데, 내 인생 최고로 산을 오르며 내 몸을 혹사시키는 순간이었다.
"얘들아. 괜찮아? 안 힘들어?"
"네. 엄마. 저희는 괜찮아요. 엄마는 괜찮으세요?"
"응. 엄마도 괜찮아. 너희들 저기 보이는 쉼터에 가서 쉬고 있어."
신기할 정도로 아이들은 잘 올라갔다. 물론 힘들어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올라가는 내내 짜증 한번 내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들과 나는 기본 20m 이상 거리를 두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늘 아이들이 먼저 앞서서 갔고, 나는 아이들을 뒤따라갔다. '심장질환'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라는 안내팻말을 지나, 저 멀리 계단 위 심장휴식쉼터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힘들었지만 한걸음 한걸음 겨우 발을 떼고 있었던 순간, 어떤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가방 많이 무겁지 않으세요?"
"아.. 네. 괜찮아요."
"가방 잠깐 내려놔보세요."
"왜.. 그러세요?"
"아이들이랑 올라가는 거 봤는데, 그렇게 걸어서 올라가면 정상까지 힘들어서 못 가요. 어떻게 하면 더 수월하게 걷는지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아저씨는 나에게 '호흡법과 자세'를 알려주셨다.
계단에 한 발을 딛고 오를 때 '잠깐 멈추고 반대쪽 다리를 뒤로 펴고 난 후, 끌어당기며' 다음계단에 발을 올리고, 천천히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가방이 무겁지만 적당히 '허리를 세우고' 걸어야 한다.
생각보다 힘든 호흡법과 자세였지만, 이전보다 훨씬 걷는 것이 수월함을 느꼈다. 아저씨는 아이들이 있는 쉼터까지 가는 동안, 무거운 내 가방을 들어주시며 호흡하는 것과 자세를 알려주셨고, 쉼터에 가서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아이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 주셨다. 그리고 무조건 알려준 대로 걸으며 천왕봉까지 올라야 한다고 몇 번이고 말씀을 하셨다.
그렇게 지리산의 개선문과 마지막 심장휴식쉼터를 지나 드디어 천왕봉에 아이들이 먼저, 나는 아이들이 천왕봉에 도착한 후 3~4분 후쯤 도착한 것 같다. 그런데, 아이들의 손에 '김밥'이 들려져 있었다. 물어보니 어떤 할아버지께서 주신 거라고 했다. 그 할아버지는 아마 내가 마지막 나무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내려가셨을 것 같았다.
13:00
지리산 천왕봉 정상석에서 아이들의 모습
우리는 가방을 내려두고 지리산을 느껴보았다. 천왕봉을 중심으로 360°로 펼쳐지는 지리산의 능선이 신기할 정도로 여러 갈래로 이어지고 있었고, 높은 하늘과 땅 사이 어중간하게 떠있는 몽실몽실한 작은 구름들도 너무 귀여웠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을 만큼 정상에서 보는 지리산은 아름다웠고, 막연히 '높다'라는 것보다, 웅장함이 느껴졌던 천왕봉이었던 것 같다.
이제 우리도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 정상의 한쪽 귀퉁이에 앉아 가방을 열었는데! 큰일 났다. 볶음밥통이 깨져있는 것이 아닌가! 새벽에 점심도시락을 준비하면서 플라스틱통에 볶음밥을 넣고, 첫째 아이가 산 정상에서 먹고 싶다고 했던 또 다른 한 가지 '김치면'을 먹기 위해, 보온병을 함께 넣어왔는데 보온병에 눌렸는지 부딪혔는지, 플라스틱통이 깨져 밥과 플라스틱이 지퍼백 안에서 함께 뒤섞여있었다. 너무 속상했다.
"얘들아. 어떡하지? 볶음밥은 못 먹을 것 같다."
"엄마. 아까 할아버지께서 주신 김밥 있잖아요. 그거 먹어요."
"그래. 그래야 할 것 같다. 할아버지 너무 감사하다."
그렇게 우리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할아버지께서 주신 소중한 김밥과 김치면의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정상에서 지리산 능선을 바라보며 먹는 점심은 최고였다. 점심을 다 먹은 후에도, 정상의 풍경에 매료되어 조금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내려가는 시간도 생각해야 하기에, 가방을 챙겨 하산하려고 하는데 어떤 아저씨가 천왕봉 정상에 들어서며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라셨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냐며 진짜 대단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내려가면서 먹어라고 '큰' 에너지바 3개를 주셨다. 우린 아저씨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드리고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14:10
보통 어른들은 올라가는 시간보다 내려오는 시간이 더 단축되지만, 우리 아이들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된다. 바위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조심해서 내려오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다. 원래 계획은 순두류로 내려가 5시 막차를 탈 수 있으면, 타고 싶었는데 아이들의 속도로 내려간다면 5시 막차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서두르진 않지만 부지런히 '칼바위코스'로 내려가기로 아이들과 이야기를 했다.
16:50 로터리 대피소와 중산리 탐방안내소 중간 그 어디쯤.
일반적인 평지길에서의 몇 미터와 산에서의 몇 미터는 꽤 차이가 크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안내표지판을 보면 '엥?'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시간 대비 걸었던 거리가 짧아서 허탈한 기분마저 드는 그 시점이 바로, 우리가 하산을 시작한 지 3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이었다.
아이들의 체력은 점점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눈이 풀릴 듯 말 듯, 다리의 힘이 풀릴 듯 말 듯한 상태였다. 이제 우리에게 먹을 거라곤 에너지바 3개와 물 밖에 없다.
사실, 우리 아이들은 견과류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산에서 먹을 행동식으로 일반 초콜릿과 젤리, 사탕 위주로 내가 준비를 했었는데 천왕봉 정상에서 만난 아저씨가 주신 견과류 가득 든 '큰' 에너지바를 아이들에게 건넸다.
에너지바를 인생 처음 맛본 아이들의 반응은,
"엄마. 초코바 이름이 왜 '에너지바' 인지 알 것 같아요."
"이제부터 산에 갈 때, 마트에서 이거 사야겠어요. 엄마."
아저씨 때문에, 아저씨 덕분에, '살았다'라는 표현 밖에 더 이상의 표현은 없다. 그 정도로 힘이 없어, 쓰러질 것 같았던 우리에게 에너지바는 귀한 음식이었다. '에너지바'라는 초코바의 이름처럼 에너지충전 제대로 하고 우린 하산에 더욱 집중했다.
18:30
"엄마. 도대체 언제 입구가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산을 오르며 짜증 한번 내지 않았던 아이들이 드디어(?) 짜증을 냈다. 아이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고, 설상가상으로 해가 지며 중산리 탐방안내소까지 가는 길에도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며 시작된 둘째 아이의 예상된 레퍼토리.
"엄마. 무서워요. 지리산에 사는 반달곰이 나올 것 같아요."
칼바위코스로 내려오며 큰 바위덩어리가 중간중간 너무 많아서 더 힘들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았고, 로터리대피소까지는 하산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었는데, 로터리대피소에서 칼바위 쪽으로 내려올 땐 우리 외에 아무도 없는 으슥하고 점점 어두워지는 분위기에 둘째가 무섭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얘들아. 많이 힘들지? 안내판에 700m 정도 남았다고 했으니까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지금부터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간다고 생각하고 우리 힘내서 걸어보자."
그렇게 우리 집에서 아파트 1층으로 내려와 아파트를 빠져나가고 집 앞 편의점을 지나 부동산 앞 등등 학교까지 가는 길을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실행시키듯, 우리는 부지런히 걷고 또 걸었다.
19:05
20분 정도 더 걸었을까? 저기 멀리 아치로 된 나무 문이 보였고 나는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나연아 나예야. 우리 다 내려왔어.. 너무 고마워."
그 순간, 나는 눈물이 났다. 힘들어도 참아내려고 노력했던 아이들이 너무 고마웠고,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던 것에도 너무 감사한마음이 들었다.
첫째 아이도 함께 울었다. 둘째 아이는 앞서 걸어가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첫째는 너무 힘들어서, 둘째는 자기까지 울면 엄마가 더 힘들어할 것 같아서 애써 참았다고 했다.
'다 키웠네. 다 키웠어.'
무거웠던 나의 가방까지 들어주시며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어떻게 호흡해야 하는지 알려주신 아저씨, 정상에서 아이들에게 김밥을 나눠주신 할아버지, 하산을 준비하는 나와 아이들에게 조심해서 내려가라고 걱정해 주시며 에너지바를 챙겨주신 아저씨, 그 외 아이들과 마주치며 좋은 덕담을 해 주신 모든 분들이 천사라고 생각한다. 그분들 덕분에 아이들과 내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11시간 동안 우리를 품고 있었던 '지리산'도, 맑았던 지리산 날씨도,
지리산을 내려와, 숙소를 구하지 못해서 결국 중산리주차장에서 3시간가량 운전해서 우리 집까지 왔던 내 '정신력' 또한 천사라 여겨질 수밖에.
그리고 내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수 있었던,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나만의 천사들 우리 나연이 나예.
엄마는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천왕봉에 오르지 못했을 거야.
울었다가 웃었다가, 그것도 하나의 추억.
11시간 동안 지리산 품에 있으며 걷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늘 함께 동행해 주는 나연이 나예 너무 고마워.
아이들과의 열두 번째 여행 중, 어느 한순간.
우리의 걷기 여행은 계속 진행된다.
[하동편백자연휴양림 예약방법]
사진출처. 하동편백자연휴양림 홈페이지 매주 수요일 오전 9시부터 4주 차 화요일까지 선착순으로 숲나들이 홈페이지에서 예약 가능하다.
매주 화요일은 휴무
사진으로 보이는 곳은 103호, 104호 (인기多)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는 뒤쪽에 살짝 보이는 102호 마음소리방이다.(독립적인 걸 좋아한다면 추천!)
비수기 기준. 평일요금 8만원/ 주말요금 11만원
⊙ TV가 없다.
아이들과 하동편백 자연휴양림 안을 둘러보며 찍었던 사진.
※ 주의사항
아이들과 돌길이 많은 산을 오를 땐, 미끄럼방지가 되어있는 '장갑' 착용은 필수인 것 같다. 돌길뿐만이 아니라, 산을 오르내리며 나뭇가지를 잡아야 할 때도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밑창이 두꺼운 재질로 되어있는 신발을 신어야 발바닥과 다리에도 무리가 덜 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2024년 4월 28일 현재 기준으로, 로터리대피소 화장실(푸세식) 철거로 이용이 불가하며, 간이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당연히 '매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