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처녀와 연애 중입니다.

환승의 계절

by Jerome 예롬

사랑에는 연령과 국경이 없다 했다.

그러니 요즘 봄처녀와 사랑에 빠진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중학교 다닐 때쯤일까.

음악시간에 불렀던 <봄처녀> 노래에 나 바로 그 여인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 찾아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볼까나.


이 노래를 갑자기 기억해 낸 것은 울에서 봄으로 옮겨가는 환승의 계절, 바로 이때쯤이다.



처음부터 봄처녀와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알프스 소녀와 같이 청순한 겨울 아가씨 좋아했다.

환승연애인 셈이다.

환승연애는 젊은이만 하는 게 아니다.

나도 할 줄 안다.

아무리 밴쿠버 겨울이 우기라고 하지만, 지난겨울은 소담스럽게 내리는 눈 경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겨울 아가씨는 심했다.

두꺼운 옷을 입고 밖에서 서성여도 겨울 아가씨는 딴청만 피워 얄밉게 굴었다.

짓궂게도 며칠 동안은 하염없이 비만 내려 산책을 거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겨울 동안 의욕이 떨어지고 우울해졌다.

가끔은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겨울 아가씨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녀를 생각하며 글도 쓰고 음악도 들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이렇게 지루하고 답답한 나날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게 가 내리더니 오후에는 찬란한 햇살이 거짓말처럼 타났다.

아직도 쌀쌀한지라 후두(hood)가 달린 옷을 입고 호숫가로 나갔다.

앙상한 가지 끝에 아주 작은 연둣빛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생각을 비우며 걷 중, 갑자기 숫가 조그만 숲 안쪽에 탐스러운 흰 꽃봉오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계절에 흰 장미가...?

그런데 잎과 줄기를 보니 장미꽃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동백꽃(Camellia)이었다.

소설이나 노래, 드라마에서 자주 들어보았던 그 꽃이다.

대지와 주변은 아직도 칙칙한데 짙은 초록빛 잎사귀 사이로 눈이 시릴 만큼 그 꽃은 나의 시선을 빼앗고 말았다.

차가운 겨울 끝자락, 두터운 잎사귀 사이로 피어난 흰 동백의 순백은 고요하지만 단단해 ​였다.

더구나 꽃말은 비밀스러운 사랑이니, 공원에 있는 그 꽃은 나를 위해 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번 산책 때가 기다려졌다.

다시 그곳을 지날 때 가슴설레게 꽃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세 개의 동백꽃 봉오리가 땅에 떨어 너무 타까다.

날씨가 다시 차가워져서 그런지 동백꽃마저 새침하게 잔뜩 움츠려있었다.

나도 내 마음 들킬까 봐 옷 깃을 여미고 모른척하고 지나쳤다.

그녀는 꽃샘추위라는 이름으로 심술을 부리 것 같다.

따뜻해졌다고 방심한 내 마음을 차가운 바람으로 툭 건드리며 밀당을 하는 거 같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와도 애련한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한국에 갈 일이 생겼는데, 거기서도 날씨 여전히 쌀쌀해 밴쿠버 두고 온 동백꽃의 봄처녀가 생각났다.

가만히 보니 동백꽃의 봄처녀 변신 중이었다.

'네가 바다 건너와서도 날 생각하는데 나도 뭔가를 보여줄게.'

동해 바다의 봄바람을 타고 산자락에 흰 매화 모습으로 나를 유혹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썸 타는 걸까.

그녀의 가녀린 꽃잎과 은은한 향기는 또다시 나를 애타게 만들다.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던 날, 화단과 담장 아래 여기저기서 노란색과 보라색의 히아신스가 을 길게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다.

새침한 모습은 사라지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제 보니 봄처녀는 내가 가는 곳마다 형형색색의 얼굴로 나를 홀리고 있다.

나는 이미 짝사랑에 빠졌다.


어떤 날은 노란색의 개나리와 산수유 되어 겨울을 이기고 난 소녀의 모습로 피어난다.

어떤 색의 수선화 되어 Narcissism의 꽃말럼, 남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초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집 앞에 막 피어나는 목련꽃봉오리는 내가 가까이 가면 밀당하듯 고고하게 딴청피며 봄바람과 수다를 떨고 있다.


뭐라 해도 봄처녀 겹벚꽃으로 피어날 때가 제일 아름답다.

따스한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힐 즈음 그녀는 연분홍 실크 드레스를 입고 수줍은 듯 온몸을 흔들며 화사하게 웃는다.

멀리서부터 색깔이 찔해, 향기에 취해 내 발걸음도 벼워진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집에 돌아와 조용히 혼자서 꺼내본다.

시인 나태주가 시에서 말했듯이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말에 공감한다.

녀의 ​화려운 모습로 내 사랑의 상처가 떠오까 두렵다.

그녀의 화려한 모습만큼이나 왠지 의 사랑도 지독히 짧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나뭇잎이 나기도 전, 가장 눈부신 순간에 미련 없이 자신을 던져 흩날리는 그녀의 찰나의 모습 불안해진다.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나의 봄도 같이 서러워질 것이다.

가끔 멀리 구름에 잠긴 만년설을 보면 겨울 아가씨가 생각나기도 한다.

아침저녁이 쌀쌀하고 차가운 비가 내리거나 생뚱맞게 눈빨이라도 날리면 겨울아가씨에 미련이 긴다.


하지만 이제는 봄처녀가 좋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가볍고 밝은 옷으로 맞춰 입고 산책해야겠다.

나의 연인, 봄처녀가 진달래 꽃이나 철쭉꽃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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