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 뚜~.’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다. 최신 유행 컬러링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좀 의외다. 그래, 신경 쓸 일이 어디 한 두 가지겠어? 그래도 사람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 이건 좀 곤란하다. 이번에 만나면 최신 유행하는 컬러링 몇 개쯤 선물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기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네, 홍 해산물식당입니다.”
“지은 씨?”
“네 그런데요. 어디시죠?”
“지은 씨, 저예요, 저!”
“저요? 저가 누구예요? 장사 준비하느라 바쁜데 장난하지…! 왕… 아니 선배? 선배 맞아요?”
석 달 전 마니산에서 내려와 김포공항 주차장에서 헤어질 때 호칭을 정리했다. 형님이라는 호칭은 풍백의 것을 빼앗는 것 같아 나도 지은 씨도 내키지 않았다. 오빠라는 호칭은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은 씨가 제안한 호칭이 ‘선배’였다. 학연은 없지만 인연은 맺었으니 딱히 안될 것도 없는 호칭이었다.
“지은 씨! 잘 지냈어요?”
“선배, 석 달 동안 연락 한번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어요. 옛날 번호 아니네요. 번호 바꿨어요?”
“그렇게 됐어요. 그나저나 지은 씨! 저 지금 어디게요?”
“어디…! 선배, 혹시 제주도 왔어요?”
“오오, 지은 씨 대단한데요!”
“공항이에요? 조금만 기다려요 차 가지고 나갈게요. 이 번호로 전화하면 되죠?”
“안 나와도 돼요. 지금 창문 밖에 한번 내다봐요. 빨리!”
식당 창문 안쪽에서 지은 씨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그리고는 눈이 둥그레지며 다시 사라졌다. 곧이어 현관문이 열리고 지은 씨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달려 나왔다. 우리는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지은 씨 그동안 잘 지냈죠?”
“선배는요? 별일 없었어요?”
“나야 뭐! 여기저기 다니면서 수련 좀 했죠. 참 그때 지은 씨한테 이거 안 보여줬죠?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나는 양쪽 팔목 안쪽과 목 뒤를 지은 씨한테 보여주며 호들갑을 떨었다.
“삼재 문신 새겼어요? 좀 유치한데….”
“무슨 말씀을… 내가 새긴 게 아니라 죽을 뻔했던 그날 새겨진 거라고요. 근데 되게 잘 그려졌죠? 신기하죠?”
“그건 그렇고, 여기까진 어쩐 일이에요? 그냥 놀러 온 건 아닐 테고…. 지난번처럼 또 무슨 일 생긴 거예요?”
“아뇨, 아뇨. 아무 일 없다니까요. 그냥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서….”
의아해하는 지은 씨를 등지고 서서 대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
“자자, 들어오세요. 뭘 그리 부끄러워해요. 다 같은 식구들인데.”
대문 뒤에서 두 사람이 슬그머니 나타났다. 때 묻은 캡 모자를 쓴 노인과 알록달록 색동옷을 입은 남자아이였다.
“아이고, 어서들 이쪽으로 와요. 자, 여기는 내가 말했죠? 청동검 보관자 지은 씨! 이쪽이 방울 보관자인 색동동자, 이쪽… 아니 이 어르신은 청동거울 보관자인 박모루님. 서로 처음 보는 거죠? 아이고, 결국 이제야 만나네요. 서로 인사들 하세요.”
지은 씨와 색동동자, 박모루 어르신이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가게로 들어온 우리들은 아직 장사 준비가 한창인 식당 가운데 테이블에 둘러앉아 지은 씨가 내온 시원한 녹차를 마셨다.
“제가요, 지은 씨, 진짜 기가 막힌 걸 생각해 냈거든요. 근데요. 이 두 사람이 전혀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그냥 막 안된다고만 하고. 하도 답답해서 지은 씨한테 온 거예요. 지은 씨는 이 두 사람하고는 다르게 세상 물정도 잘 알고 똑똑하잖아요. 지은 씨가 이 분들한테 설명 좀 잘해주세요.”
맞은편에 앉은 색동동자와 김모루 어르신이 헛기침을 하고 찻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내 말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아이고 알았어요 알았어.
“제가 무슨…. 아무튼 기막힌 거? 그게 뭔대요?”
“잘 들어봐요, 지은 씨! 두 분도 다시 잘 들으세요! 이게 SNS해시태그 같은 거거든요.”
“아, 해시태그요?”
“봐봐, 지은 씨는 벌써 다 알아들었잖아. 역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자 지은 씨가 손을 옆으로 치우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요즘 SNS가 대세잖아요. 살면서 세상을 복되게 하는 일을 하면 큰 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상관없어요.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인증샷을 찍어서 자기 계정에 올리는 거예요. 게시물에는 ‘널리’, ‘복되게’라는 해시태그를 꼭 달게 하는 거죠. 해시태그 단 사람들 중에서 몇 명 뽑아서 홍 해산물식당 무료 식사권이나 색동동자 무료 점괘 이용권 주는 거 같은 이벤트도 해볼까 고민 중이에요. 이건 좀 이따 다시 설명하고요.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해요. 다음번 복된 일을 할 사람을 실명으로 지명하는 것! 이 사람 저 사람 돌다 보면 유명한 스타들도 지명당하게 될 거고 그러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너도나도 따라 하다 보면 이 세상에 복된 일이 가득 차고 그러면 삼재의 힘이 세상에 널리 퍼지고, 우리가 바라는 새로운 세상이 마침내 열리게 된다! 이건 챌린지라고 부르면 어때요? 끝내주죠?”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은 씨가 무표정한 얼굴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안 돼요. 꿈 깨요. 턱도 없어요. 이미 있는 거예요. 게다가 유행 지났어요.”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이 거보라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충격적이었지만 이대로 순순히 물러설 내가 아니다.
“역시, 좋은 건 나만 아는 게 아니었어. 봐봐 이미 사람들이 다 알고 하고 있었잖아. 그럼 방법이나 말을 좀 바꾸면 어때요? 그래서….”
지은 씨가 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돼? 그럼 어떻게? 다시 생각해야 된다고요? 아, 몰라 몰라. 촌스러운 저는 조용히 빠질 테니까. 세 분이서 잘해봐요. 무슨 왕검이 이런 거까지 다 직접 짜. 다른 사람들이 짜오면 허락하고 잘해보라고 격려하고 그러는 거지…. 이게 뭐야, 거꾸로 됐잖아! 기껏 생각해 왔더니 오랜만에 만나서 면박이나 주고 말이야…. 저요? 절대 삐친 거 아니거든요! 아니, 보관자 역할 끝났다고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런 게 어딨어? 나는 정말 못하겠으니까, 세 분이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뭘 어떻게 할 건지 보고하세요! 영양가만 없어봐, 그냥…!”
토라져서 돌아 앉아 있는 등 뒤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슬쩍 돌아보니 지은 씨가 싱싱한 회와 한라산 소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있었다. 흥, 이런다고 내 마음이 풀릴 것 같아! 이건 음식이 아까워서 그냥 먹어주는 거야. 절대로 마음 풀고 그런 거 아니라고. 우리는 천년 동안 알고 지내왔던 사람들처럼 반갑게 웃고 떠들며 회와 술을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날이 저물고 다시 밝도록.
이렇게 해서 언제 그 기운을 다 모아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겠냐고? 내 몸에 깃든 삼재의 힘을 쓰면 되지 않겠냐고? 내 안에 깃든 삼재의 힘은 분명 무궁무진할 것이다. 하지만 그 힘을 쓰기에 나는 그리고 세상은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 그 준비가 언제쯤 끝날 것 같냐고? 낸들 아나? 내일 될지 모레가 될지, 100년 후에나 될지. 아니면 영원히 안 올지도.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 그게 언제가 됐든 나와 이 세 명의 보관자들은 새로운 세상을 위해 절대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