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은 … 사슴 출몰 지역입니다. …. 하시는 분들 … 출입을 금합니다.’
원담은 글자가 떨어져 나간 경고 표지판 옆에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A4 용지를 차지하려고 아수라장이 된 회사에서 도망쳐 나온 지 6시간째. 산길로만 달렸으니 더 이상 추격자를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원담은 매고 있던 백팩을 벗어 꼭 끌어안았다. 안도감에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데려가달라고 살고 싶다고 애원하던 서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짝사랑했던 탓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사랑 타령할 때가 아니었다. 원담은 과감히 서연을 밀쳐냈다. 백팩에 매고 나온 A4용지 네 묶음은 혼자 쓰기에도 빠듯한 분량이었으니까.
“바스락~.”
잠시 생각에 잠겼던 원담은 눈을 뜨고 백팩을 더 꼭 끌어안은 채 몸을 낮추고 사방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원담은 굵은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바스락~.”
사슴이었다. 동물원이 아닌 곳에서 사슴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사슴의 눈동자는 평화롭고 고요했다. 잠시 원담을 바라보던 사슴은 조용히 숲 속으로 사라졌다. 멍하니 보고 있던 원담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4시. 회사에서 탈출한 지 6시간이 지났다. 공포의 목소리가 말한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6시간. 그때까지 웃기는 이야기를 세 편 이상 지어내지 못하면 염소가 되고 만다. 웃기는 이야기를 지으라는 명령에 지랄한다고 욕하다가 그 자리에서 염소가 되어 매애매애 울던 앞자리 김대리처럼 말이다. 목소리는 꼭 A4용지에 좌우상하 여백 1.5센티미터를 두고 손글씨로 적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요건까지 지정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필기도구는 상관없다는 점이었다. 복사기 옆 자리에 앉아 있던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원담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옆에 있던 A4 용지 박스를 낚아채 백팩에 쑤셔 넣고 사무실 밖으로 달렸고, 한 발 빠르게 행동한 덕분에 안전하게 이곳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죽으면 도망쳐 온 보람이 없다. 업무 시간에 몰래몰래 인터넷 유머 사이트들을 섭렵했던 실력을 십분 이용해 반드시 살아남으리라. 그러려면 최대한 빨리 안전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했다. 초조하게 산속을 헤매던 원담은 산 중턱을 둘러 이어진 교통호를 발견했다. 교통호를 따라 걷던 원담의 눈앞에 벙커가 나타났다. 몸을 숨길 수도 있고 은밀하게 밖을 살필 수도 있으니 안성맞춤이었다. 산을 헤매고 다니는 내내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아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4시간. 원담은 자동차에서 가져온 손전등을 켜고 A4 용지 한 묶음을 꺼냈다. 판촉물로 받은 볼펜을 꺼내 들고 첫 한 줄을 적어내려 갔다. 터진 둑처럼 이야기가 콸콸 쏟아져 A4 용지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신들린 듯 춤추던 원담의 볼펜이 멈췄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웃기는 이야기 열 편이 채워진 60장의 A4 용지. 이제 살았다. 마감 시간까지 마음 편히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긴장이 풀리니 소변이 마려웠다. 소변을 보는 원담의 귀에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지퍼를 올린 원담이 뒷 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 어둑어둑한 산속을 비췄다. 손전등 불 빛 안에서 수 십 마리 사슴들이 입을 질겅거리고 있었다. 멋진 뿔을 가진 사슴이 원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낮에 마주쳤던 바로 그 사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사슴 역시 입을 질겅거리고 있었다. 벙커 안을 들여다보던 원담이 비명을 질렀다.
“내 종이, 내 이야기!”
사슴들이 질겅거리고 있는 것은 원담이 쓴 웃기는 이야기였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악에 바친 원담의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 사슴들은 원담이 그러든 말든 천연덕스럽게 주둥이를 질겅거릴 뿐이었다. 남은 시간은 이제 6분.
벙커 안에 종이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5분.
이성을 잃은 원담이 악을 쓰며 주변에 있는 사슴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남은 시간은 4분.
사슴들은 원담의 주먹을 요리조리 피하면서도 달아나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3분.
날뛰던 원담이 헉헉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은 시간은 2분.
뿔이 멋진 사슴이 원담에게 다가왔다. 남은 시간은 1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원담이 사슴을 올려다봤다. 남은 시간은 30초.
코 앞까지 바짝 다가온 사슴이 썩소를 날리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10초.
“야, 좀 심하게 베꼈다. 지어낸 건 맛이 다르거든. 있어서 먹긴 먹는데 영 맛이… 제대로 하지 그랬냐… ”
원담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남은 시간 0초.
세상의 곳곳에서 염소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벙커 앞에 나타난 염소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남기고 산 아래쪽으로 달려갔다. 벙커 앞의 불길을 바라보던 사슴들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불 켜진 손전등이 바닥에 쓰러진 표지판을 비추며 뒹굴었다.
‘이 산은 이야기를 먹는 위험한 사슴 출몰 지역입니다.
창작에 자신 없는 분들이나
남의 이야기를 베끼는 분들의 출입을 금합니다.’
* 한 줄 소개
웃기는 이야기를 쓰지 못하면 염소가 된다고? 근데 워드는 안되고 A4 용지에 꼭 손으로 쓰라고? 살기 위해 유머를 짜내야 했던 한 남자의 아주 공갈 염소 똥 같은 이야기.
* '오늘비'의 한 마디
아침마다 감사한다. 염소가 아니라 사람으로 깨어났다는 걸. 아싸, 오늘 하루 더 벌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