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괜찮다고 할 것인가

ep.5 약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우다

by bella

단약 2주차가 지나고 있었고, 나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오늘은 무너질 것 같았지만

어쩐 일인지 저녁이 되면 하루가 지나가 있었고, 나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

약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토론 원시적이고 날것인 경험일 줄은 몰랐다.

모든 감각이 증폭되어 있었고, 세상은 너무 밝거나 어두웠으며

소리는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았다.

도무지 중간이란 없었다. 균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주 작은,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변화였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단약 초기의 그 극심한 불안과 공황은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다.

여전히 잠은 오지 않았고, 여전히 눈물은 불쑥 터져나왔으며,

여전히 몸은 무겁고 머리는 흐릿했지만,

그것들이 나를 완전히 집어삼키지는 않게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거센 파도 속에서 허우적대다가 간신히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법을 배운 것 처럼,

나는 조금씩 숨 쉬는 틈을 찾아가고 있었다.


어느날 아침, 무작정 산책한답시고 걸어 가면서 문득 깨달았다.

눈물이 흐르지 않고있다는 것을.

여전히 가습은 답답했고, 불안은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그것이 자동으로 눈물로 전환되지는 않았다.

감정과 신체 반응 사이에 아주 작은 틈이 생긴 것 같았다.

그 틈은 머리카락 한 올 만큼 작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틈 사이로 나는 숨을 쉴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조금씩 다라지고 있었다.

여전히 집중력은 형편없었고, 업무 효율은 약을 먹던 시절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책상에 앉아 있을 수는 있었다.

글자들이 여전히 흐릿하게 보였지만, 몇 번을 다시 읽으면 의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말이 여전히 물속에서 들리는 것 처럼 왜곡되어 들렸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할 수는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저녁이 되면 모든 것이 무너졌다.

집에 들어와 현관문을 닫는 순간, 하루종일 애써 유지하던 가면이 벗겨졌다.

침대에 몸을 던지면 돌덩이가 되었고,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온 몸을 짓눌렀다.

남편이 저녁을 차려도 먹을 수 없었고, 샤워를 하고 싶어도 욕실까지 가는 몇 걸음이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자정이 되어 있었고,

남편은 그런 내가 너무 조심스러워 그저 어깨를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잠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새벽 2시, 3시, 4시까지 뒤척이다가 겨우 얕은 잠에 빠졌고,

5시 반이 되면 몸이 자동으로 깨어났다.

6년동안 새겨진 루틴은 약이 사라진 후에도 몸에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눈이 번쩍 뜨이지 않고 진흙속을 헤메듯

무겁고 느렸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어났다. 매일 아침 일어나고 출근했다.

일하고 버텼다. 그것이 전부였다.

잘 살아가는것도 행복한것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있는 것

하루하루를 넘기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단약 3주차가 되었을 때, 산부인과에 갔다. 남편과 함께 진료실에 앉아있는데

의사가 초음파 화면을 보여주었다.

작고 희미한 점이 보였다. 심장이 뛰고 있다고 했다.

깜빡이는 작은 빛, 그것이 생명이라고 했다.

남편은 내 손을 꽉 쥐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나는 울지 않았다.

울 수 없었고 그저 화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진료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남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잘하고 있다고,

대단하다고, 고생하고있다고 말해주었다.

그의 말들이 귀에 들어왔지만 가슴까지 도달하지는 못했다.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가 없었다.

기쁨, 슬픔, 감동, 사랑 그 어떤것도 느낄수 없고 그저 텅빈 공허함만이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이것도 단약의 증상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정의 둔화와 무감각, 하지만 아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달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과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이었다. 나는 그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은 없었지만 감각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는 완전히 죽지 않았다. 아직 살아있다.


그날 밤, 잠이 또 오지 않았지만 문득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어딘가에는 나처럼 힘겹게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얼굴은 모르지만, 그들의 고통은 안다.

왜냐면 나도 그 안에 있으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약 없이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연대.


다음날, 회사에서 팀장이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최근 업무 효율이 크게 떨어진 것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나는 죄송하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고, 곧 나아질거라고,

팀장은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그의 배려가 고마웠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웠다.

나는 누군가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이제 느리고, 고통스럽고, 불완전하지만 나는 약없이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감정의 파도가 밀려올 때 그것에 휩쓸리지 않고 지켜보는 법

불안이 찾아올 때 도망치지 않고 그것과 함께 앉아있는 법

무기력이 몸을 짓누를 때 그래도 한 발 한 발 걷는 법

이 모든것이 새로운 배움이었다.


6년동안 약은 나를 대신해서 모든것을 조절해 주었다.

감정, 수면, 각성, 모든것을.

나는 약에게 내 삶의 통제권을 넘겨주었고, 약은 나를 안정적으로 유지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나의 삶이 아니었다.

약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삶이었다.

지금 내가 격고 있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은, 나 자신을 되찾는 과정이었다.

진짜 나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 길은 비록 험난하고 매일매일이 전쟁일지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제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배 속 아이는 내가 버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약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었다.


- 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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