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임의로 짝지어주어서 만난 동성인 친구가 있다.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귀어 온 펜팔 친구다. 펜을 잡으면 할 이야기들이 앞다투어 나왔다. 줄줄 써 내려갔다, 주 2회는 정기적으로 펜을 들었고, 필요하면 언제든 편지지와 펜을 들고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펜팔친구라는 이름을 넘어 영혼의 의미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영혼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서로를 위한 도고의 기도로 연결되는 베프다. 그리고 가끔 말로 할 수 없는 고백을 한다. “너로 인해 나는 너무 행복하고 풍요로웠고 벅찼으며 감사한 인생이었다”라고 친구에게 고백할 때 너무 좋다. 친구의 존재가 얼마나 귀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나는 처음부터 우리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생일에 있는 숫자가 같다. 친구는 1126, 나는 1216이다. 나는 그 숫자가 주는 의미를 남다르다고 여기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나의 성향이 의미를 찾는 것에 의미를 둔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여러 가지 일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살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교회가 무엇인지 모를 때 친구를 만났고 전학을 한 후 친구의 초대를 받아 교회라는 곳에 갔다. 그리고 지금껏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께 몸을 맡기고 살고 있다. 중학교 때 친구와 내가 종교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너무 반갑고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왜냐면 우리는 믿음의 주체에 대해서는 이야기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믿음의 대상이 같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이 아니라 그분의 이끌림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기도 했다.
아주 작은 낙도에도 우체부 아저씨는 오셨다. 어쩌면 내 친구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한 통의 편지만을 가지고 방문하셨을 것을 상상해 보니 내 삶이 얼마나 특별한 선택을 받았는지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친구는 나의 자존감을 올려준 두 번째 존재였다.
친구와 나는 3일에 한 번씩 편지를 주고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반기는 할머니께 하는 인사말이 있었다.
“할머니~ 편지 왔어요?”라고 골목 어귀에서부터 소릴 지르면 할머니는 서운하다는 듯 바라보며 깔고 앉아 숨겨둔 편지를 내놓으셨다.
“여기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친구의 편지를 받아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취미요 낙이었다. 편지를 읽은 후에는 즉시 답장을 썼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할 수 있는 편지라는 도구가 있음에 너무 감사했다. 특별함이 없는 날에도, 전할 말이 없어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다른 친구들과는 차별된 느낌, 우월감도 느꼈다. 나의 비밀스러운 행복감을 감추고 마음속 깊은 곳이 자라고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펴고 저 멀리 날아다녔다. 친구 역시 같은 마음을 전하곤 했다.
친구와 나는 대면하여 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처음으로 대면했던 때를 생각하면 그 또한 영화 같다.
6학년 여름방학이 무르익어갈 때였다. 친구는 나의 낙도를 그리워했고 상상만으로는 성차지 않아서 직접 찾아왔다. 하필이면 내가 섬을 비운 그때에. 친구는 나의 섬을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전학을 앞두고 도회지로 나와서 방학의 한 자락을 보내고 있었다. 친구가 온다는 소식을 받지 못한 이유였다. 내게 온 편지를 누구도 뜯어보면 안 된다는 우리 가족의 철칙이 있었으니 친구의 방문 소식을 담은 편지는 주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고, 친구의 방문을 미리 알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나는 도회지에서 친구가 언니와 함께 섬에 왔다는 소식을 인편으로 들었다. 너무 반가우면서도 놀랍고 떨렸다. 친구의 실행력에 감탄하기도 했다. 그 먼 곳까지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친구를 내가 가장 먼저 보지 못한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친구가 나의 섬까지 오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할 때 너무나 놀라워서 책을 읽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오면서 나에게도 이런 멋진 경험의 주인공이 되게 하는 친구로 인해 무척 행복했다. 미안함, 고마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여정을 돌아본다.
여름방학 8월 어느 날, 아침 일찍 기차로 목포역까지 왔다. 그리고 배를 타기 위해 여객선 타는 선창으로 갔다. 오전 9시 이전에 나의 섬으로 가는 배가 출발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거기까지는 정보가 맞았다. 배 위에서 파아란 바다를 보며 자신들을 기다리고 반길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 둘은 어느 섬에 내렸다. 내가 사는 작은 낙도가 아닌 다른 섬에. 면 소재지에서도 나의 섬은 더 여러 개의 섬들을 찍고 내려야 하는데 친구는 면 소재지 다음 섬에서 내리고 말았다. 나의 섬으로 가는 배는 하루에 한 번뿐인데 어쩌랴? 다음날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듣고는 너무도 황당하고 실망하고 두렵고 무서웠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히 미지의 그 섬 주민들은 친절했고 내일이면 다시 배가 온다고 안심하라고 했다.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하룻밤을 보냈고, 다음날 다시 목포에서 오는 전날 탔던 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나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섬에서 하행선을 기다리면서 그곳의 바다 체험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곳 주민들의 따뜻하고 친절함을 잊을 수가 없다고 추억했다. 덤으로 얻은 추억 보따리가 더 귀했다고 한다.
드디어 나의 섬에 도착했다고 한다. 우리 엄마와 가족들도 너무 반가우면서도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는 손님을 대접하기에 누추한 집, 음식 준비에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다. 나는 둘의 무모함과 호기심과 탐구심을 칭찬하면서도 두려움과 고난을 동반한 험난한 여행 이야기를 들을 때 나와 관련한 이야기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광주에서 나의 섬까지 오는 길을 쉽지 않다는 것을 친구는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생각만 하면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여겨 실행에 옮긴 친구와 언니의 대범함에 놀람을 금하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도 무모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모험을 자처한 일들이 생겨났다. 나를 찾아올 때 겪은 모진 고난을 영원히 좋은 추억으로 기억해 주는 언니와 친구가 다시 고맙기만 하다.
친구는 나의 섬에서 이틀을 머물며 나의 편지글 속의 풍경을 확인하며 나를 상상했다고 했다. 그리고 나를 만나기 위해 도회지로 온다고 했다. 편지로만 소통을 하던 주인공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요동을 쳤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여객선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마중을 나갔다. 배가 도착했고 저 멀리 내 여동생이 보였다. 여동생이 친구를 동행하며 왔다. 여동생 옆에 있는 아이가 친구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너무 반가우면서도 시골쥐와 서울쥐의 만남처럼 어색했다. 우리는 눈으로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다시 조용해졌다. 부끄러웠다. 친구는 내가 자기의 집으로 가기를 권했다. 누가 샀을까? 기억이 가물거린다. 친구와 나는 원피스를 샀다. 우리 둘은 쌍둥이처럼 같은 원피스를 입었다. 그리고 광주에서의 친구와의 추억을 만들었다. 끊을 수 없는 우정의 끈을 다시 동여 메고 좋은 추억을 만들며 서로를 기억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후로도 얼마간 우리는 더욱 편지 쓰기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두 번째 우리는 만났다. 입시 면접일 전날이었다. 광주에 있을 곳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친구가 자기 집으로 오라고 강하게 말해서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면접시험보다 더 떨리는 상황이었다. 우리 집의 생활환경과는 너무나 달랐다. 친구는 국문학과에 합격했고 나는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그때부터인가? 어느 때부터인가? 더 이상 ‘편지 왔어요?’라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편지를 가져다주는 집배원 아저씨는 나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거의 무소식이 희소식으로 여기며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생일에는 소식을 알렸다. 서로에게 진심으로 ‘당신은 소중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