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을 간 첫날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앉아야 할 자리를 지정해 주셨다. 내 짝은 피부색이 거무스레한 이유로 별칭이 ‘껌둥이’였다. 껌둥이는 친구들이 별칭을 불러도 담담하게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친구가 기분 나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와 짝은 금방 친해졌다. 우리 둘은 수학을 잘했다. 섬마을 선생님이 인정한 수학 실력을 보일 수 있어서 좋았다. 칠판에 적힌 방정식 수학문제를 푸는 순서대로 하교를 하라고 하셨다. 우리 둘은 그 분야에서는 선두를 지키며 하이파이브를 외치며 집으로 갔다.
한 친구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 섬마을에서는 들어보기 힘든 성씨를 가지고 있었고 이름도 아주 특이하게 도시스러운 아이였다. 나는 도시와 시골의 차이점이 너무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적응보다 빠르게 점점 위축되어가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일요일에 만나자고 했다. 거절할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서 친구가 이끄는 대로 갔다. 그곳은 교회였다. 그리고 나의 운명이 달라졌다. 그곳에서 ‘예수’에 대한 복음을 들었다. 이웃사랑을 실천하며 33년의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 달리신 위대한 분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 벅찬 감동을 주었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멋진 사람이 있다니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감동을 주고 마음에 깊이 자리했다. 이후로 난 50여 년을 그분의 삶을 닮아가려는 노력으로 살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교회를 알지 못하는 섬마을 소녀의 슬픔이, 아픔이 느껴졌다. 그와 비슷한 일들이 때론 수치심으로, 때론 열등감으로 자리 잡았다.
나의 문화 지체의 삶은 언어, 생활, 풍습으로 나타났다.
친구에게 100원 종이돈을 10원짜리 동전과 교환하는 상황이었다.
“낱전 있어?”
“뭐라고? 낱전이 뭐야?”
“낱전 말이야~”
친구는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키웠지만 뭐라고 설명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한참 후에야 나의 언어를 알아차린 친구가 말했다.
“동전 말이니?”
“으응, 동전...”
얼굴은 벌써 붉어졌다.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자존감이 떨어지는 시기에는 부끄러움이 크고 말았다.
또 다른 이야기는 촌티의 극치였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오늘 졸업앨범 찍으러 가는 것 알지? 모두 집에 갔다가 시간 맞춰서 오도록 해!”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왜 집에 다녀오라고 했지?’
궁금증만 안고 집에 갔다가 다시 학교로 갔다.
그런데 아이들의 의상이나 머리모양이 단정해 보였다.
여자애들은 예쁘게 단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왜 그런지 몰랐다. 입만 열면 촌티 날까 봐 꾹꾹 눌렀다.
선생님은 우리를 데리고 어딘가로 갔다. 도착한 곳은 사진관이었다.
한 사람씩 들어가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일이었구나!’ 하고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았다.
나는 양갈래로 땋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니 언제나처럼 잔머리가 삐죽삐죽 삐져나와서 산발이 되어 있었다. 사진 찍기 전에 집에 다녀오라고 한 것은 단정하게 머리도 빗고 옷도 갈아입고 오라는 것인 줄도 모르고 놀다가 왔으니 얼마나 황당한가!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그때서야 집에 갈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얼마 후 졸업앨범을 살 사람은 신청하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애들이 산다고 하니 나도 사겠다고 했다.
그것이 실수였다. 아는 친구들이라고는 우리 반 학생들 뿐인데, 사실 우리 반 60명의 친구들도 다 알지도 못하는데 앨범을 사고 말았다.
졸업식날이 되었다. 선생님은 졸업앨범이라는 것을 나눠주셨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사진을 보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앨범 속 내 사진을 보고는 앨범을 재빠르게 덮고 말았다.
머리가 산발한 시골소녀가 거기 있었다. 부끄러워서 앨범을 더 이상 열어보지 않았다.
모든 졸업생들이 내 사진을 긴직한다고 생각하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내 손에서 뽑히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만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한동안 사춘기의 자기중심성을 보이며 친구들의 앨범 속에서 내 모습을 지울 방법은 없을까?하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때가 예민한 사춘기의 시작이었으니 참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것 같다.
‘졸업앨범’이라는 말을 몰라서 생긴 일이었다. 졸업앨범이라는 말을 듣거나 본 적이 없는 나에게는 생전 처음 접하는 말이었기에 생긴 일이었다. 사진만 찍고 나만 간직하는 사진이었으면 정말 다행일 텐데, 500여 명의 졸업생 친구들의 모습을 모두 담아 한 권의 사진첩으로 나온 것이 졸업앨범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섬마을에서는 사진을 찍는 일조차도 흔치 않았고 사진첩을 만드는 일은 없었기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연탄을 보고, 전깃불을 보고 놀래는 일과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