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ow김정숙 Oct 21. 2024

생명 마중

고2때 사촌언니의 셋째 출산을 돕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마도 중간고사를 마치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꽃동네 같은 곳에 보리마당이라 불리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그 보리마당에 이르면 시야에 우리 지역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희미한 산, 그 앞에 파아란 바다와 떠 있는 배,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곳과 연이은 신작로를 따라 오밀조밀 붙어있는 큰 성냥곽 같은 건물들이 보였다. 바다의 끝과 시가지를 이은 선창가에는 수많은 배들은 머리를 박고 있었다.



작지만 넓은 마당에서는 아래로 내려가는 서너 개의 갈래길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새로운 생각이 피어나곤 했다. 

나의 길이 생명을 살리는 길인지, 죽이는 길인지를 고민하는 심연의 길도 있었다. 

언제나 그분처럼 나는 생명을 살리는 길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  



나의 발걸음은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고종사촌 언니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약속도 없이 , 느닷없이, 뜬금없이, 언니집을 가고 싶었다.

전에도 가끔 하굣길에 들려서 인사를 하고 목이라도 축이곤 했던 집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언니!”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서 돌아서려는데 안에서 언니의 다급하면서도 힘이 없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나는 잽싸게 문을 열었다.



언니는 셋째를 임신하여 만삭이었는데 바로 그때 아기가 나오고 있었다. 

언니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슴 조이며 누군가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같았으면 119로 전화했거나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텐데, 

그 당시에는 전화가 있는 집이 흔치 않았으니 하늘에서 구조의 손길을 보내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아기를 낳을 것 같다.”

“언니, 그러면 어떻게 해요?”

“네가 좀 아기를 받아줄래?”

“내가요? 내가 해요? 언니, 어떻게 해!”

누군가에게 도움요청하러 갈시간이 없다고 했다. 

갑자기 나타난 내가 출산을 도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가방을 던져버리고 부엌으로 갔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입으로는 징징거렸다. ‘나 어떻게 하냐?’고 징징거리며 뱅뱅 돌았다.

나는 온몸이 떨렸다. 목소리도 손도 떨고 있었다.

가정 시간에 배운 지식을 동원하기로 했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장을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 이렇게 써먹는 산지식이 될 줄은 몰랐다.

출산에 대해 배우면서 이렇게 빨리 적용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연탄불 위에 물을 데웠다. 가위를 소독했다. 그리고 울었다. 내가 울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은 동동 거렸고 눈물 없는 거짓 울음은 멈추질 않았다. 

다행히도 언니가 두 번의  출산 경험이 있어서 출산의고통을 참으며 나에게 산파의 일을 지시했다. 


얼마 후 내 손안에는 아이가 있었다. 거룩하고 숭고한시간이었다. 

소독한 가위를 이용해 탯줄을 잘랐다. 힘이 들어갔지만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너무 조심스럽고 무서웠다. 나로 인해 한 생명이 다치거나 아프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섰고,

언니는 괜찮은지 아이는 건강한지 머릿속은 복잡했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산파의 일에 집중했다. 

흥분이 되면서 기쁨의 눈물이 나왔다. 

생명을 만나는 일, 구조하는 일, 살리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상황이 참으로 거룩했고 신비했고 자랑스러웠다.

아이를 씻겨서 언니의 팔 안에 안겨주었다. 언니는 고맙다는 말을 거듭거듭 했다. 



해가 어둑어둑해졌나 세상이 달라 보였다. 정신이 몽롱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긴장을 한 탓으로 온몸이 굳어진 듯 발걸음이 뛰어지질 않았다. 

그렇지만 언니의 출산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나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달렸다.

다른 언니 집까지 숨도 쉬지 않고 달렸다. 



그리고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 앞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나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졌지만 내가 너무 장하고 대견스러웠다.

그날 하루가 내게 얼마나 가슴 뛰는 날이었는지 모른다. 

생명을 마중하는 일에 동참하고 나니 내가 한 층 커진 느낌이 들었다. 

심장 소리는 여전히 쿵쾅거렸고 조카의 눈망울이 내게 들어오며 나는 잠이 들었다.



여러갈래 길을 보여주며 나에게 길을 선택하라고 했던 보리마당,

그 생명 마중 일화가 지금도 나를 쿵쾅거리게 하고 새로운 선택을 꿈꾸게 한다.

이전 19화 국화꽃과 민들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