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low김정숙 Oct 28. 2024

저 장미꽃 위에 이슬

J의 애창곡에 젖어드는 가을날에

며칠 전 중고등학생 때 같은 교회에 다녔던 여자친구들을 만났다. 가끔 번개팅으로 보는 친구들이다.

한 친구가 사진 한 장을 가져왔다. 교회 예배당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이름이 기억나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기억나지 않고 얼굴만 기억나는 친구들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찍은 사진으로 추측되었다. 나는 친구들의 이름을 생각해 내며 불렀다. 그중 한 명의 남학생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불렀다. 친구는 나의 기억력에 놀라며 신기해했다. 40년이 넘은 사진이니 놀라기도 했다.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지난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J라는 남학생의 이름을 잊을 수는 없다. 그 이유는 그 아이가 중학생인 어린 나에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이성 친구를 사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과 서약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나는 그 아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어색했고 미안하기도 했고 아무도 모르는 미묘한 감정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사귀지 않는다고 해놓고 오히려 나는 그 아이에게 마음을 쓰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우리는 새벽송을 하기 위해 성도들의 가정을 돌았다. 바닷가 허술한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몸이 불편한 여자분이 나왔다. 그 뒤로 그 남학생이 따라 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이고 다른 사람 뒤로 몸을 숨겼다. 그 아이가 보면 부끄러워할까 봐 배려를 한 것이었다. 그때 내 가슴에서 쿵쾅거리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J는 머리가 좋고 똑똑하고 공부를 잘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원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갔다고 했다. 왠지 마음이 아팠다. 한 번도 서로 얼굴을 맞대어 보지 않고 졸업했고 우리는 만나지도 못하고 헤어졌다. 좋아하는 감정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책임감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때 사귀는 것을 생각해 본다고 했기에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후 더 이상 그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이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J는 내 눈에서 사라졌다.     

     

25살, 어느 날 S라는 고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우린 처음이었다.  그 친구가 물었다. J를 아느냐고 했다. 나는 그 이름을 잊을 수는 없었다. 마음에 두고 살았던 사람인 것처럼 급하게 안다고 대답했다. 그 친구의 남편이 J의 절친이라는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우린 친하게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갔다. S는 이성 친구를 사귀면 안 되었던 학교 규칙을 어기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어쨌든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솟아났다. S는 J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를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순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J의 소식이 궁금했다. S는 J와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서울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나를 만나기 위해 무진 노력했다고 했다. 친구의 아내가 나와 같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재빠르게 만남을 재촉했다고 한다. 나는 J를 필연처럼 다시 만났다. 중학교 때 J는 나에게 사귀자고 했다가 거절당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스무 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만나지 않겠다고 할 이유가 사라졌다.          

 

우리는 걸었다.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그리고 내가 거절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J와 나는 가을날 억새가 피어있는 지금처럼 어느 동산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신앙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친구는 자신이 좋아한다는 찬송가를 불러주었다. 


“ 1.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2.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울던 새도 잠잠케 한다. 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3.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내가 모르는 찬송이었다. 처음 들어본 곡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리고 지금은 나의 애 찬송가중 하나가 되었다.          

그와 나는 편지로 우정을 쌓아갔다.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편지가 전해주었다. 

일 년 정도 시간이 지났다. J는 고향으로 나를 만나러 왔다. 1년 전에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어느새 내 마음속은 수많은 이유로 갈등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나만의 남자 친구로 만나야 할지 망설임이 생기고 있었다. 함께 걷고 있는 시간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만남을 이어가지 않기로 마음을 먹어가고 있었다.  

         

일 년 전에 망설임 없이 그 친구의 손을 잡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에 잠겼다.

중학교 때 그 친구의 손을 잡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두 번째 요청은 거절할 수가 없지 않았을까? 

또 하나는 순정 영화 속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점점 웃음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할 때에는 서로가 말이 없어졌다. 더 이상 만나지 않을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그날 J는 저녁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갔다. 나는 그 친구에게 차표를 사 주었다.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을 각오한 나의 무서운 처사였다. 


그리고 며칠 후 J에게서 편지가 왔다. 

나중에, 환갑의 나이쯤 되었을 때 만나러 오겠다는 글자로 마지막 인사를 했었다.          

헤어진 진짜 이유는 나의 이기심이었다. 가난해서 가난을 거부했었다. 나는 J를 보내며 잘 살아가라고 응원하기로 했다. 

가을의 어느 한 자락을 잡고 설 때면, 시를 잘 썼고, 찬양 잘하고, 성실하게 보였던 J가 생각난다. J의 애창곡 “저 장미꽃 위에 이슬~”을 듣는다. 

 예수님을 생각하며 듣는 이 찬양을 알려 준 J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이전 20화 생명 마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