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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민 Feb 23. 2024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아

'큰일 났다.. 전시회 오픈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단 1시간뿐인데, 아무런 세팅이 안 되어있다!!!'


2시간 일찍 도착하여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오는 길에 사 온 좋아하는 빵집의 빵을 다 같이 나눠먹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 나의 아주 큰 오산이었다.


멤버들이 책임감 충만한 성인들이라 생각했지만 그것도 나의 오산이었다.


이들은 아직 사회 경험이 없는 영락없는 어린 친구들이었다. 직장 생활 10년 차의 나에겐 당연한 프로세스가 대학생 친구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인생은 실전,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눈 오는 날 밖에서 벌벌 떨며 1시간을 기다렸다.


대체 왜 갤러리 주인에게 대문의 자물쇠 패스워드를 미리 받아두질 않은 거니? 갤러리 주인장과 연락이 닿기만을 기다리며 길거리에서 시간을 낭비해 버린 우리는 이제 단 1 시간 만에 모든 세팅을 끝내야 했다.


예상 밖의 트러블로 빵 먹을 여유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미리 생각해 둔 배치도에 맞춰서 벽에 사진과 포스터를 걸기만 하면 되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어제 N군한테 사진 받아왔는데, 얘 스티로폼 판넬에 사진을 안 붙여놨는데요??"


N군은 전시회 당일 오전 중의 동아리 활동으로 인해 세팅 준비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모델 역할을 해준 W양에게 본인이 전시할 사진을 미리 맡겨두었다. 작품 세팅을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입장이라면 상대방이 사진을 걸기만 하면 되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전달하는 게 당연한 상식이라고 생각했지만, 상식이 아니었나 보다.


인쇄된 사진 13장과 그 사진을 붙여야 할 스티로폼 판넬 13개를 인쇄소에서 배송된 그야말로 날 것의 상태로 모델 W양에게 전달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사진 13장을 울지 않은 완벽한 상태로 판넬에 붙이고, 판넬의 남는 부분을 정확하게 커터 갈로 제단 한 뒤에, 배치도의 각도에 맞춰서 벽에 걸어야 한다.


이제 40분 남았다 - 째깍째깍


혹시 몰라 집에서 가위, 양면 테이브, 커터 칼을 챙겨 온 건 나뿐이었다. 이 순간 나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TY는 급한 불 먼저 꺼야 하는 일을 내팽개치고 나중에 해도 될 일에 매달려있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총체적 난국의 상황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화를 최대한 억누르며 일단은 멤버들에게 일을 분배시키고 해결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나도 모르게 조금은 차가운 말투로 퉁명스럽게 지시한 것에 미안함을 느끼며 어느 정도 일이 수습이 된 뒤 덕분에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었다며 조금은 머쓱했지만 재밌는 에피소드 하나 생겼다 생각하며 다 같이 분위기를 풀었다.


일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거나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났을 때 스트레스를 받는 편인 나에게 오전의 준비과정은 짧았지만 꽤나 강렬한 기억이었다. 그래 인생이 호락호락할 리가 없지! 


하지만 무슨 일이든 어떻게든 끝맺음은 맺어지게 되어있다. 물론 준비성과 계획이라는 게 있으면 좀 더 수월할 수는 있겠지만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또 다른 배움을 얻으며 우리는 11시 정각에 아슬아슬하게 맞추어 오픈을 했다. 




해프닝은 뒤로 하고, 드디어 오픈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에 누군가 올라와주지 않을까?라는 기대감과 더불어 우리의 모든 감각이 쏠렸다. 예상외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주었다.


동네에서 인기가 많은 카페였는지 브런치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카페는 금방 만석이 되었다. 주문을 기다리는 동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윗 층의 전시회를 보러 올라와주었다.





비좁은 계단 사이로 아는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너무나도 반가웠다. 대학생 코찔찔이 시절부터 나를 알아온 친구들이, 귀중한 주말에 하루는 집에서 쉬어야 할 직장인들이! 다음 날 출근을 앞둔 일요일에 위치가 애매한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준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살면서 친구가 많다는 소리를 들어볼 일이 없던 비교적 좁은 인맥을 가진 나지만, 나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 멀리서 찾아와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인생을 헛살지는 않았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준 친구, 선배, 동생들 모두 다 말이라도 맞춘 듯이 한 손엔 꽃과 나눠먹으라며 사 온 자잘한 간식들에 축하한다는 따뜻한 말까지 이렇게나 센스 있고 배려심 있는 사람들과 긴 인연을 함께 해올 수 있었다는 것에 새삼스레 감사함을 느꼈다.



- 일본 사는 친구 집에 놀러 왔다가 우연히 들어온 카페에서 하는 전시회를 보러 올라온 한국분들

- 평소 커뮤니티 SNS를 눈여겨보기만 하다 처음 열린 전시회에 찾아와 준 분

- 일본 여행을 왔다가 카페에 들를 겸 전시회를 보러 온 프랑스 분

- 나의 믹싱에 관심을 보여준 두 일본 청년


한 명 한 명 다들 너무나 고맙고 소중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리고 그들에게는 금방 잊힌 하루의 일부분이었을 테지만 나와 멤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소중한 기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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