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민 Jan 30. 2024

사람들이 보는 나, 내가 보는 나

일본에 오래 산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텐데 이 나라 정말 답답할 정도로 통제적인 부분이 있으면서도 희한하게도 자유롭다. 이들은 타인의 삶에 이렇다 저렇다 훈수 두지 않는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런 생각을 말로 공공연히 표현하는 사람들이 적다 보니 '그런 삶도 있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좀 더 만연해있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 일본에서의 나는 타인으로부터의 라벨링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1 나에게 부여된 라벨

아마 어릴 적 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지금의 내가 사뭇 신기하게 느껴질 것이다. 내 기억 속의 너는 부끄럼 많고 겁이 많은 새로운 것을 싫어하는 아이였는데 지금의 너는 의외로 개성적이고 도전적이며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사람이 되었구나라고. 


타고난 성향에 대한 라벨로써는 동의하지만 사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정해진 이미지로 내가 소비되는 것이 싫었다. 아마 그 시절에는 이끄는 리더십과 적극성이 각광받는 것에 반해 정적인 성격들이 비교적 부정적인 이미지로 소비가 되는 경우가 많아 더욱이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있는 나인데 '얘는 이런 아이예요'라고 한번 라벨링을 당하니 뭔가 그것에 반하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꺼내기가 쉽지 않았달까. 그렇다 보니 어느 순간 상대방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추어서 나를 한정 짓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본인 앞가림 잘하는 장녀, 성실한 학생, 트러블 안 일으키는 무던한 친구. 사실 내 안의 나는 반항적인 면모도 있었고 독특한 취향도 있었으며 의외로 숨은 관종 끼도 있는 아이였다.  


그래서일까 별로 기쁘지 않았던 칭찬은 「근면 성실」.  분명 좋은 말이지만 딱히 인상적인 부분이 없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꼬리표처럼 느껴져서 나에겐 썩 달갑지는 않은 칭찬이었다.   



#2 내가 부여한 라벨 

그랬던 내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처음 일본에 왔을 때 한 가지 마음먹은 게 있었다. 지금까지의 라벨을 벗어던지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나 스스로를 정의 지어보겠다고. 어차피 일본에는 아는 사람도 없으니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20대 때는 나 자신에게 외향인이라는 라벨을 스스로 붙이고 싶었던 듯하다. 인간관계에 좀 더 적극적이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다. 그런 성향이 좋은 성격이라고 생각했고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여러 가지 대외 활동도 많이 해보고 외국인 친구들도 사귀어보며 적극적인 부분 모습들을 많이 키워나갈 수 있었지만 의외로 생각만큼 즐겁지는 않았다. 


결국 시간이 지나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릴 적 질색하던 남들이 나에게 부여한 「조용한」「성실함」과 같은 라벨이 결국 나의 본질적인 성향의 일부분이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 주자고. 


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 라벨을 무리하여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나의 취향과 생각들은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나 이런 사람이다라고 표현하자고.   



#3 일본에서 자유로운 이유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성과 이방인이라는 특이점 때문에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는 사회적인 잣대가 적다 보니 지금의 나는 그 나이대에 해야 하는 것들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그렇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을 이것저것 시도해 보며 나라는 사람에 대해 더 잘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 살고 있는 덕분에 나 자신을 도화지 위에 자유롭게 풀어놓고 내 가능성을 넓힐 수 있었다 생각하니 이 나라에 대한 애증이 조금은 줄어든다. 




작가의 이전글 결핍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