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도 내게 준 적 없는 평안함이었다.
입사이 후 6년째 항공업무만 계속했다.
3.3.3이랬던가 6년 차가 된 요즘의 나는 정말 매일매일이 숨 막히는 지겨운 일상이다. 갑작스러운 시급인상으로 입사년수가 꽤 차이나는 후배와 월급이 10만 원도 차이가 나지 않게 되니 대리라는 직함을 달고 그에 대한 무게에 합당하는 업무를 하는 것이 부당하게까지 느껴져 슬럼프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내게 그 사무실의 공기는 감옥보다 더한 숨 막힘을 주었다. 대화 없는 키보드소리와 팀장님 차장님 총괄팀장님과 같이 직급이 높은 분들은 죄다 창문을 등지고 책상에 앉아계시는 통에 하루가 지는 모습과 바깥공기를 맡으며 일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삼성전자 공장을 그만두었음에도 창문을 여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이제 곧 12월도 끝나간다. 오늘도 나의 퇴근길은 바로 집이 아닌 술집이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어떤 날은 기분이 좋지 못해서. 어떤 날은 심심해서. 사실은 아무도 없는 그 집에 바로 들어가기 싫어서. 언제나처럼 반갑게 맞아주는 사장님을 향해 주문을 했다.
은빛 동그란 테이블 위에 파채와 마늘 쌈장 그리고 동그란 땡 반찬이 하나 둘 놓이고 끝으로 오는 이 초록색병은 마치 내게 오늘 고생했다며 주는 상처럼 내려온다. 소주병을 손에 쥔 회사 후배이자 나의 술친구인 그녀는 천천히 내 앞에 있는 소주잔에 술을 채워나갔다.
이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잔이 채워질수록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마쳤다는 작은 안도감이 들며 한두 번 온 가게가 아닌데도 긴장을 풀어 대화를 시작하는 이 공간을 애틋하게 둘러보며 행복함을 느꼈다.
나는 본래 어릴 적부터 술을 먹는 어린이 되지 않을 거란 다짐을 했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그 다짐은 너무나 가볍게 꺾이게 되었지만.
교복을 입고 마트를 가서 맛있어 보이는 음료를 샀고 나중 알보고니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알코올이 살짝 들어간 과음료였다. 술을 마시고 울고 세상 다 무너진 듯 괴로움을 토하는 것이 일상인 엄마를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엄마를 볼 땐 오늘의 하루가 어떻게 끝날 지를 알기에 두렵고 괴로웠다. 그때의 나는 10살쯤이었던 것 같다. 밤에는 취기를 담아 소리치는 슬픈 엄마의 외침에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되어 곁에서 떨어지지 못한 채 전전긍긍으로 보내고 난 다음 날 낮에는 내게 있었던 지난밤과는 너무나 달랐을 평온한 친구들과 일상을 보내는 게 가끔은 괴리감마저 느껴져 적응이 안 되기도 했다.
이게 술맛이었구나. 입에 머금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다 생각했지만 뱉지는 않았다. 이게 무엇이길래 그리도 찾고 그리도 변하나 싶은 호기심은 잘못되었다는 이성을 꺾었다. 볼에 작은 홍조가 오르고 열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져 살아 처음 긴장이 풀려가는 느낌이 들자 형언하기 어려운 평안함이 왔다.
누구도 내게 준 적 없는 평안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