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아이의 자기결정성을 위하여

by 벨찬

안방에 들어가 선이 침대에 누웠다. 침대라곤 하지만 얇은 토퍼에 이불을 깔아놓은 정도다. 아직 난방 텐트를 치우지 않아 내부가 제법 아늑하다. 내 침대가 아니라 선이 침대에 누운 이유는, 여기에 울타리가 쳐져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선이를 이곳에 재우려고 했는데, 요즘 들어 이 시간에 도통 낮잠을 자지 않는다. 아침에 깬 지 대략 5시간 정도 지났고, 밥과 간식도 든든히 먹고 똥도 누고 산책도 다녀왔는데. 한동안 지켜오던 루틴이 깨졌다. 선이야 잠이 오지 않으면 더 놀면 그만이지만, 나는 오전 11시만 되면 심각한 졸음이 밀려온다. 그래서 선이 대신 내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선이는 내게 놀자고 보챘지만, 울타리를 넘어오지 못해 이내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거실에서 혼자 노는 중이다.


누워서 눈을 감고 있긴 하지만 잠에 들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린다. 선이가 혼자 거실에 있는데 잠들어버릴 수는 없다. 식탁 위로 올라가거나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노는 건 아닌지, 아니면 화분 흙을 파헤치거나 아내가 아끼는 책을 찢는 건 아닌지. 귀로 선이의 움직임을 따라가 본다. 몇 분간 열심히 들어보니 제법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 책장을 넘기다 혼자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피노 그림책 <생일 축하해!>를 보고 있는 것이라 확신한다.), 의자에 앉았다가, 책상을 밀었다가, 블록을 쌓고 무너뜨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선이는 내가 거실에 함께 있을 땐 나를 가만히 두질 않는다. 책을 가져와 읽어달라 조르거나, 작은방으로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거나, 물이나 바나나를 달라고 요청하는 식이다. 그런데 내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일 때, 가령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 중이거나 화장실에 있을 땐 신기하게도 나를 잘 찾지 않는다. ‘얘가 왜 나를 안 찾지?’ 볼일을 마친 후 슬금슬금 다가가 뭐 하고 있나 보면, 책을 보거나 장난감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놀고 있다. 그러다 내가 온 걸 알아채면 하던 걸 내팽개치고 내게 달려와 매달린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울타리 안에 들어가 있으니, 선이는 거실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 선이는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이 부쩍 커졌다. 그래서 아기 의자에 앉지 않으려고 하는 듯하다. 스스로 앉을 수 없어서. 내가 선이를 들어 아기 의자에 앉히려 하면 온몸으로 버둥거리며 거부한다. 하지만 일반의자에는 선이가 혼자서도 올라가 앉을 수 있다. 자기 가슴 높이만큼 되는 의자에 앉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온 힘을 다하더라도 자신의 힘으로 오르는 그 과정을 선이는 더 좋아한다. 포크로 메추리알을 찍는 걸 어려워해서 내가 도와주면 선이는 손으로 다시 빼내어 자기가 찍어보려 애쓴다. 그러는 동안 메추리알이 미끄러져 날아가면 다시 그걸 주워 와 그릇에 담고 재차 도전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선이에게 높아 보이는 계단을 내가 안아서 내려주면, 거꾸로 계단을 올라가 맨 위에서부터 직접 한 계단씩 내려오고야 만다. 이러다 보니 밥을 먹는 데도,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될 수 있으면 선이 스스로 해보도록 하는데 기력이 떨어지거나 시간에 쫓기는 날에는 주도권을 빼앗아 내가 마무리해 버릴 때도 있다.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을 존중받지 못한 선이는 곧잘 울음을 터뜨리고 나는 이내 미안해진다.


며칠 전 선이가 신을 욕실화를 구매했다. 새것이 하나에 팔천 원인데 당근에서 두 개를 오천 원에 팔고 있었다. 개당 이천오백 원밖에 안 하다니. 냉큼 사 왔다. 토끼가 달린 것과 공룡이 달린 것중 선이가 고른 토끼 슬리퍼를 화장실에 두었다. 삼천 원짜리 유아용 변기 커버를 변기 위에 올려놓고, 구천 원짜리 디딤계단을 세면대 아래 두었다. 삼천 원 하는 다이소표 수건걸이는 선이 눈높이에 맞춰 벽 한쪽에 달았다. 선이가 걷고 뛰기 시작한 지 한참 되었지만, 지금까지 화장실에서는 혼자 움직일 수 없었다. 손을 씻고 세수를 할 때나, 똥 묻은 엉덩이를 닦고 목욕 할 땐 내가 선이를 안아 세면대로, 욕조로 이동시켰다. 그동안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 선이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아직 표현이 서툰 선이는 속이 더 터졌을지도 모른다. 이제 화장실은 나와 아내만의 공간이 아니다. 선이도 그 땅을 두 발로 딛고 설 수 있는 존재다. 선이에게도 마땅히 화장실에서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집 화장실을 유아-성인 공용 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단돈 만 칠천오백 원으로. 선이의 스스로 하고 싶은 마음을 위하여.


지금 내게 포근함을 주는 침대 울타리도 선이에게는 장애물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잠잘 시간이 되면 억지로 재우려는 요령으로 울타리를 치우지 않았는데, 이제 허물 때가 되었나 보다. 이걸 다 해체한 뒤 얼룩을 지우고 당근에 올리는 일이 꽤 번거롭겠지만, 그래도 해야지. 대학생 시절 배운 교육학 이론이 생각난다. 자기 결정성 이론.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때 더 크게 만족을 느끼고 성장한다는 내용이다. 삶의 주도권을 선이에게서 빼앗으면 안 되겠다. 거창한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고 부딪쳐 보길, 그 안에서 경험을 쌓고 배워나가길, 곁에서 지켜보며 오래 참고 기다리겠다는 말이다. 나는 다만, 아주 넓은 울타리가 되어주면 된다. 나의 울타리 안에 있는 동안은, 있는 줄도 모르게 마음껏 자유로워라. 물론, 내가 더 애써야겠지. 시간에 쫓기지 말고, 체력에 부치지 않도록 바지런히 움직여야지. 그러니까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 밥을 하는 건 아직 나의 몫이다.




KakaoTalk_20250514_035936253_03.jpg
KakaoTalk_20250514_035936253_04.jpg
KakaoTalk_20250514_035936253.jpg
KakaoTalk_20250514_035936253_01.jpg
keyword
이전 21화아이의 생일이 나에게 더 큰 축복인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