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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서 만난 사람들

by 벨찬

2박 3일 일정으로 고성에 다녀왔다. 더워지기 전에, 성수기가 시작되기 전에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집안일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연락들, 시간을 죽이는 스마트폰 세상 속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일상을 벗어난 자연 속이라면 가족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적하고 풍경이 좋은 곳을 찾다 유난히 바다가 파란 곳으로 기억되는 고성으로 결정했다. 2025년 봄의 끝자락, 고성의 바다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진한 파란색.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이다. 푹푹 꺼지는 모래 위를 걷는 것이 무서웠는지 선이는 나의 손을 꼭 잡고서 해변을 걸었다. 머리 위로 솜사탕 같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파도는 하얗게 부서졌다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피곤한 발을 씻어주었다. “바다가 반갑다고 인사하나봐.” 다가오고 멀어지는 물결을 보며 선이게 말했다. 선이도 바다가 반가웠는지 쓸려가는 물결을 따라가다, 이내 다시 밀려오는 파랑에 뒤돌아 뛰어오며 “바다다!” 소리쳤다. 선이를 따라온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쳐 가는데, 고성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할 때마다 꼭 하는 일 중 하나는 숙소 근처를 도보로 걸어보는 일이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보면 동네의 정취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다. 골목골목을 거닐며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흔적을 엿보는 재미는 덤이다. 그러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이 있으면 훌쩍 들어가 본다. 그러면 여지없이 마음에 드는 공간을 만나곤 한다. 숙소에서 도보로 3분 정도 떨어진 카페도 역시 그랬다. ‘고성에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던 여유와 자연과의 공존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입구에 쓰여 있는 글귀가 발을 멈춰 세웠다. 단순한 상업적 문구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철학에서 나는 이곳에 취향 저격당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입구를 통해 들어가니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브런치를 먹을 수 있는 카페가, 맞은편에는 직접 제작한 의류, 액세서리, 엽서 등을 판매하는 편집숍이 있었다. 마당에 깔린 캠핑 체어와 테이블 옆으로 이곳에 사는 강아지 ‘번보리’가 한가로이 누워 있었다. 한쪽에 세워진 서핑보드와 곳곳에 놓인 소품들에서 주인장의 감성과 취향을 느낄 수 있었다. 인위적이지 않으면서 세심하게 배치된 모든 것들에서, 애정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주인장의 손길이 느껴졌다. 평소 소비를 멀리하는 아내도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편집숍을 한참 구경하다 모자와 셔츠를 구매했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푸른 동해가 코 앞에 있었다. 서퍼들의 무대가 될 바다였다. 여름이 오면 천진 해변 앞의 작은 마을에는 파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이 모인 곳은 어떤 모습을 그려낼지 궁금해졌다.


바다 다음으로 고성에 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건 책방이었다. 책방이라 하면 왜인지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며,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로 선택한 사람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있다. 그런데 심지어 인적 드문 강원도 북쪽 끝에 위치한 책방이라니. 무엇이 책방지기를 이곳으로 이끌고 어떤 연유로 책방을 열게 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마음을 붙잡고 교암해변 근처에 위치한 동네 서점을 찾았다. 넓지 않은 공간에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자기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책장에는 각 층마다 어떤 책들이 모여있는지를 알려주는 푯말이 책방지기님의 손 글씨로 적혀 있었다. 어떤 책들에는 작은 메모지가 꽂혀 있었는데, 책에 대한 책방지기님의 감상과 추천 이유가 적혀있었다.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좋아하는 것을 건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많은 책 중에 메모가 꽂혀 있는 책들에 더 눈이 갔다. 선이에게 통밀쿠키도 주시고, 올여름 첫 수박도 맛보게 해주시고, 스탬프 놀이도 시켜주신 친절한 책방지기님은 고성이 고향이 아니지만 남편을 따라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낯선 곳에서 책방을 열게 되었는지 묻자 좋아서 하고 있다며 단순한 진심으로 답했다. 책방지기님 눈에서 어딘가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졌다.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다. 동네 대형서점에 갈 때는 빈손으로 나오곤 하는데, 책방을 떠나는 손에는 네 권의 책이 들려있었다.


이 밖에도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돌아온 자식들과 그 부모가 함께 운영하는 펜션에 머무르며, 할머니가 살던 고택에서 전통차를 파는 카페에 들러 오미자 차를 마시고, 서울과 전주를 거쳐 고성에 자리 잡은 사장님의 돈가스를 맛보며 시간을 보냈다. 고성에서의 시간이 즐거운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러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여행을 끝내기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다에 들렀다. 아야진 해변에는 바위가 파도를 막아 바닷물이 잔잔하게 흐르는 해안이 있다. 그곳에서 선이와 바다에 발을 담그며 놀았다. 우리 옆에는 흰머리에 뽀글파마를 하신 할머니께서 잠자리채를 들고 물밑을 두리번거리고 계셨다. 무엇을 하고 계신지 궁금해서 슬쩍 곁으로 다가갔다. “작년에는 물고기가 많았는데, 이번엔 안 보여~” 할머니께서는 내가 묻기도 전에 궁금해하던 질문에 답을 해주셨다. “그런데 내가 한 마리 잡았어.” 할머니께서 잠자리채를 들어 보였다. 안에는 검은 줄무늬가 있는 검지 손가락만 한 물고기가 있었다. 우리 동네 오금천 산책길을 걷다 보면 잠자리채로 올챙이를 잡는 어린이들을 자주 만나는데, 할머니의 표정이 오금천 아이들과 같아 보였다. 할머니와의 짧은 대화 이후 우리도 물밑을 보며 걸었는데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순식간에 발밑을 돌아 지나갔다. 저렇게 빠른 물고기를 할머니께서 어떻게 잡으셨을까 신기했다.


고성으로 향하는 길에 사람들이 왜 여행을 하는지, 여행을 떠나는 나는 왜 기분이 설레는지 궁금했다. 고성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남들이 정해놓은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의 소리를 따라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사람들, 스스로 선택한 길을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이 좋은 이유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길이다. 선이가 가졌으면 하는 삶의 태도다. 인생은 깔때기가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선택의 폭이 좁아져 마지막에는 한 길로만 걸어가는 여정이 아니다. 정해진 삶은 없고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 선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 그렇게 살아야 한다. 바다를 보면 막힌 것이 없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어디로 가고 싶은 걸까. 아무래도 고성에 다시 한번 오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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