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또는 비 온 뒤 아내와 걷는 산책은 짧은 거리라도 한참이 걸린다. 길가에 달팽이가 너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달팽이도, 이미 밟혀 죽은 달팽이도 많다. 아내는 달팽이의 숨이, 그것에 조금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의 발검음으로, 너무나 쉽게 사라지는 것을 마음 아파한다. 그래서 아내는 아직 살아있는, 위태롭게 느릿느릿 길을 횡단하는 달팽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 걸음에 한 마리씩 달팽이를 집어 근처 풀밭에 놓아주어야 한다. 집을 곳이 마땅치 않은 민달팽이는 주변의 나뭇가지와 풀잎을 이용해 옮겨준다. 나는 달팽이를 잡지 못해서, ‘여기도 달팽이 있어’라고 알려주며 바닥에 쪼그려 앉아 달팽이를 구조하는 아내 곁을 천천히 걷는다.
요즘 선이는 산책할 때 버찌를 줍느라 바쁘다. 벚나무 밑에는 보라색으로 익어 떨어진 열매가 많다. 작고 동그라며 보랏빛이 도는 게 선이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같다. 선이가 하나를 주워 입에 넣으려고 해서, ‘이건 버찌라고 하는데 참새들이 먹는 거야’하고 알려주었다. 그 이후로 선이는 산책하다 벚나무 밑을 지날 때면 버찌를 주워 ‘참새 먹어’라고 외치며 풀밭에 던진다. 힘껏 던진 버찌는 얼마 못 가 떨어지고, 선이는 다시 그것을 주워 던지기를 반복하느라 벚나무 밑을 지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땅에 떨어져 있는 버찌는 많이 무른 상태라 곧잘 터지는데, 나는 손에 보랏빛 버찌 물이 묻는 게 싫어 잘 줍지 않는다. 그래서 선이에게 ‘여기도 버찌 있다’라고 알려주며 참새에게 먹이를 주는 선이 곁을 천천히 걷는다. 그러다 보면 마치 작은 아내와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선이와 아내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 예를 들어, 둘은 입안에 맛있는 것이 들어오면 소리로 표현한다. 아내는 음식이 맛있으면 ‘음~ 맛있어’라고 하는데, 맛있으면 맛있을수록 ‘음~’하는 음의 높이가 높아지고 소리가 길어진다. 선이도 가끔씩 달콤한 케이크나 빵을 먹여주면 ‘음~ 빠빠’하고 반응하는데, 아내처럼 음의 높이와 길이가 맛에 따라 달라진다. 선이가 춤을 잘 추는 것도 분명 아내를 닮은 점이다. 나는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어깨와 골반을 흔들며 리듬을 탈 줄 아는 감각은 나에게는 흐르지 않는 피다. 반면에 아내는 세상의 모든 소리에 맞춰 춤을 출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둘이 함께 덩실거리며 춤추는 모습을 보는 건 나의 웃음 버튼인데, 때로는 나만 보는 게 아깝게 느껴지기도 할 정도다. 옥수수와 감자를 좋아하고, 팔다리가 길쭉하면서도 살결이 부드러운 것도 둘이 서로 닮은 부분이다.
나를 닮은 건 선이의 눈썹, 눈두덩이, 볼살, 그리고 웃는 표정.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선이로 바꾸면, 지인들로부터 나랑 똑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아내는 선이가 웃을 때 입꼬리에 볼살이 밀려 올라가는 모습이 나를 닮았다고 한다. 선이의 여러 얼굴 중 웃는 얼굴을 가장 좋아하는데, 이런 게 나를 닮았다니 기분이 좋다. 애정 표현이 많은 것도 나를 닮았다. 지금의 선이는 ‘뽀뽀’하면 뽀뽀해주고, ‘안아’하면 안아주는데, 부디 이 모습이 오래 변치 않기를 바란다. 선이가 나와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사용하는 말도 나를 닮아가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괜찮아’라는 말. 좋든 싫든 해야 하는 것들을 대충 ‘괜찮아’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이가 보고 배운 걸까. 선이도 ‘괜찮아’라는 말을 제법 자주 한다. 언제인가 선이가 꽤나 아프게 넘어졌는데도 괜찮다고 하는 모습을 보고, 안 괜찮을 땐 안 괜찮다고 얘기하는 법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달팽이를 구조하고 버찌를 줍는 집 앞의 산책길은 선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아내와 둘이 자주 걷던 길이다. 둘이 가던 길을 셋이 걷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새삼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와 아내 사이에 우리를 닮은 작은 아이가 있다는 게 아직도 신비롭다. 둘이었을 때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거라 느껴질 만큼 더없이 행복했지만, 이제는 선이가 없던 때로 돌아가는 일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서로에게서 서로를 발견하며 우리가 함께 한 시절을 보낼 수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