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에 약해 여름이 힘들지만, 여름이라서 좋은 순간들도 있다. 예를 들면, 달리러 나가기 전 냉동실에 이온 음료를 넣어두었다가 땀을 한껏 빼고 돌아온 뒤 살얼음 낀 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는 것. 이건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여름의 맛이다. 사계절 중 태양에너지를 가장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여름처럼, 그 이름에 태양(sun, 선이 이름의 로마자 표기는 seon이지만 발음은 비슷하니)을 품은 선이도 요즘 한창 에너지가 넘친다. 7월이 되면서 여름의 열기와 선이의 에너지에 지쳐버리는 날이 많아졌는데, 그럴 때면 육아에도 여름 맛이 있다는 걸 생각해 보게 된다.
여름이 되고 선이의 기상 시간이 빨라졌다. 커튼 틈 사이로 비춰들어 오는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공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선이는 아침에 눈을 뜨면 워밍업도 없이 발발거리며 신나게 돌아다닌다. 문제는 나는 눈을 뜨고도 기본 삼십 분 정도는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며 몸을 풀어줘야 겨우 일어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선이는 그런 나의 워밍업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말이 부쩍 는 선이는 ‘아빠 일어나’, ‘우유 줘’, ‘피노 책 읽어줘’, ‘나가자’ 같은 말들로 나를 침대 밖으로 능숙하게 끌어낸다. 가끔은 심하게 저항해 보기도 하지만 성공해 본 적은 없다.
오늘 뭐 할지 고민하는 건 매일 주어지는 숙제 같은 일이다. 그런데 여름엔 그 난이도가 좀 더 높다. 집에서 노는 것만으론 선이의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어 하루에 두 번 정도는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요즘같이 기온이 30도를 넘어가는 날에는 야외 활동이 어렵기 때문이다. 봄철 주요 활동이었던 놀이터 가기도, 킥보드 타기도, 공놀이하기도 너무 힘든 날씨다. 그래서 요즘엔 순찰 돌듯 스타필드나 이케아 같은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게 우리의 주요 일과가 되었다.
우리가 쇼핑몰로 피서를 떠나있는 사이 여름의 열기는 우리 집 베란다에 와있었다. 봄에 심어둔 블루베리 나무에 어느새 보랏빛 열매가 맺혔다. 2년은 키워야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던데, 선이가 나 몰래 애정을 듬뿍 쏟아부어 줬나 보다. 블루베리와 물을 좋아하는 선이는 블루베리 화분에 물 주는 일을 무척 즐긴다. 처음에는 물 조절이 서툴러 사방팔방 물을 다 튀기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제법 꼬마 농부처럼 화분 안에 차분히 물을 잘 뿌려준다. 초록 잎이 돋아나고, 방울 같은 하얀 꽃이 피어나고,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초록 열매가 달리고, 그게 보라색으로 익어가는 모든 과정을 선이와 함께 지켜봤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줄 때마다 ‘블루베리야 잘 자라라’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반년 전만 해도 ‘울루레뤼’라고 말하던 선이가 이제는 또렷하게 ‘블루베리’라고 한다. 아직 망고는 ‘방구’, 파인애플은 ‘파프리카’라고 하면서 블루베리만큼은 정확하게 부를 줄 알게 되었다. 그만큼 블루베리를 좋아하나보다. 수확한 열매를 씻어 그릇에 담아주었는데, 선이는 내게 하나를 주지 않고 다 먹어버렸다. 직접 키운 열매의 맛은 어떠했지는 선이만 아는 일이다.
북한산 계곡에 놀러 가는 것도 여름이라서 가능하다. 오후 5시 무렵, 적당히 기울어져 나무 틈 사이로 비스듬히 다가오는 태양 빛은 한낮과 다르게 부드럽다. 바위 몇 개를 성큼 건너 물살이 잔잔한 곳을 찾아 발을 담그면 투명하고 시원한 물 너머로 자갈도 보이고, 물고기도 보이고, 나뭇가지도 보인다. 조그만 두 손으로 이것도 잡아보고 저것도 잡아보고 싶은 선이는 계곡에 오면 항상 바빠진다.
사실 나는 계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에 몸이나 옷이 젖으면 어딘가 찝찝하고, 벌레가 많은 걸 싫어해서 내가 먼저 계곡을 찾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선이와 일주일에 한 번꼴로 계곡을 찾아 물놀이를 하고 있다. 선이가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을 여름날의 풍경이다. 선이가 기분이 좋아져 소리를 지르며 물장구치는 모습을 보면 나는 이런 시간에 한없이 오래 머물고 싶어진다. 선이가 초대한 세상은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그 행복을 지켜주는 일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는 걸 알려주었다.
어느 순간 서로 비슷하게 까무잡잡해져 있는 팔과 다리에 웃음 짖고, 같이 땀 흘리고 샤워한 뒤 선이는 기저귀 바람, 나는 팬티 바람으로 엎드려 선풍기 바람을 쐬고, 소프트아이스크림 하나를 선이 한 번, 나 한 번 한입씩 번갈아 가며 나눠 먹는 것들이 여름이라 맛볼 수 있는 육아의 여름 맛이다. 언젠가 선이가 친구랑 노는 걸 더 좋아하는 때가 오면 아마 나는 이 시절을 많이 그리워하겠지. 그러니깐 지금은 이 순간의 여름 맛을 충분히 음미해 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