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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by 벨찬

육아하는 나는 좋지만, 육아만 하는 나는 싫다. 하루 종일 육아만 하다 보면, 어딘가 헛헛한 기분이 든다. 아이가 주는 만족과 행복이 분명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다른 어떤 채워짐이 필요하다. 말로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성장에 대한 욕구나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에 가까운 무언가다.

요즘 부쩍 육아 난이도가 높아졌다. 밤잠에 드는 시간이 늦어져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아이를 재우려 애쓰는 날이 많아졌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을 내며 떼를 쓰는 일도 잦아져서, 하루에 서너 번씩은 선이 얼굴이 눈물, 콧물, 땀범벅이 될 때까지 기싸움을 벌인다. 특히나 왜 갑자기 아빠 껌딱지가 됐는지, 깨어있는 동안은 도무지 나와 조금도 떨어져 있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가오는 2학기쯤, 선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보면 어떨지 자주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운동, 독서 모임, 글쓰기처럼 나를 위한 일에 조금 더 시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집안일에 좀 더 신경 써서 먹을 것 제대로 챙겨 먹고, 집을 보다 정돈된 쾌적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연말쯤에는 여유 있게 복직 준비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선이가 집에 돌아왔을 땐 비축된 에너지로 더 밀도 있게 놀아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 길에도 또 다른 고충이 있겠지만, 지금의 상태에 힘이 많이 들다 보니 가보지 않은 길을 자꾸 상상하게 된다. 무엇보다 적어도 지금처럼 스스로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은 덜 받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엔 선이와 쇼핑몰에 갔다가, 3년 전 가르쳤던 제자를 우연히 만났다. “그대로네”라고 말은 했지만, 실은 키가 훌쩍 크고 더 어엿하고 차분해진 모습에 얼핏 보면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뻔했다. 짧은 인사를 하고 헤어지기 전, 같이 셀카를 찍었는데 멋지게 자란 제자와 달리 면도도 하지 않은 지저분한 얼굴을 한 내 모습이 너무 별로라고 느껴졌다. 티셔츠는 며칠째 입고 있던 거더라... 괜히 옷을 꼬집어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쇼윈도에는 굽은 어깨를 하고 뻗친 머리를 모자로 눌러 가린 채 아이와 실랑이하느라 땀을 삐질 흘리는 아저씨가 비쳐 보였다. 선이를 따라다니며 챙기느라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한 자리에만 맴맴 도는데, 스스로 빛나는 멋진 청춘들은 저마다 어디로 가는 건지 나를 빠르게 스쳐 가고 있었다.

멈춰있는 시간. 선이가 아닌 나를 보았을 때, 육아는 멈춰있는 시간처럼 느껴지곤 한다. 사회적으로 커리어를 쌓아가거나, 자산을 늘려가거나, 아니면 세계를 누비며 세상을 알아가거나 하며 다른 사람들은 각기 부지런히 제 갈길은 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멈춰선 듯이 보일 때가 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뒤쳐저 과연 내가 다시 본래의 일로 잘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육아인으로 지내는 이 시간이 멈춰있는 시간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죽어있는 시간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자체로 고귀하다거나 국가적으로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거나 하는 당위적인 해석이 아니다. 잠시 사회와 동떨어져 아이라는 세계에서 사는 것이 가장 낯설며 동시에 가장 원초적인 세계로의 여행과 같아서 그렇다. 그 안에서 지옥과 천국을 오가며 나라는 사람의 근원을 만나고,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며 한계를 깨부수는 경험을 할 수 있어서, 분명 나는 어떤 면에선 이전보다 훨씬 성장한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죽은 듯이 멈춰있는 번데기 속에서 가장 역동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사회적으론 잠시 멈춰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선이 아빠로 살아가는 이 시간이 나를 더 인내하는 사람으로, 더 너그러운 사람으로, 타인을 더 배려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그래서 나를 인간적으로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수없이 지나온 갈림길에서 내렸던 선택의 결과기 지금의 나다. 어떤 선택은 그것이 좋았냐 나빴냐가 선택한 이후에 만들어진다. 선택하지 않은 길이 때로는 더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그건 과거로 돌아가 다시 선택해 보지 않는 이상 실제로는 어떨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깐 나는 선이와 온종일 부대끼며 지지고 볶고 하는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나만이 갈 수 있는 이 길을 그저 살아가면 될 뿐이다. 수많은 우주 중 지금 여기의 길을 택한 나를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응원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육아인들에게도 진심을 담아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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