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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하지 않아도 자라고 있어

by 벨찬

“오렌지”하며 가리키는 선이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크고 둥그런 주황빛 농구공이 보였다. 주말이면 동네 아이들로 가득한 하천 변 저류지 공터지만, 평일 오전엔 녹슨 농구 골대와 오리 몇 마리만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소처럼 저류지 옆길로 돌아 산책하던 중, 선이가 골대 밑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농구공을 발견했다. 마침 사람도 없고 날도 선선하여 선이와 공놀이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저류지로 내려가 농구공을 주웠다. 농구공을 잡아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체 몸 쓰는 일을 잘 못하기도 했지만, 학창 시절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를 할 때면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승패가 명확하게 갈리는 경기에서, 이기고 지는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또래들 사이에서, 나 때문에 우리 팀이 지는 일만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공이 내게 오는 일이 항상 두려웠다. 헛발질하거나 놓칠까 봐. 축구는 그나마 견딜 만했다. 넓은 운동장에서 공이 오지 않을 만한 구석으로 슬쩍 피해 다닐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농구는 그렇게 도망 다닐 곳이 많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받게 된 공은 백이면 백 곧바로 상대편으로 넘어갔다. 눈치 빠른 상대 팀은 적 팀의 구멍을 놓칠 리가 없고, 나를 지나는 길이 점수를 내는 가는 가장 쉬운 통로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나는 내 탓으로 몇 점이나 내줬는지 계산했고, 그 점수만큼 우리 편 아이들이 속으로 나를 욕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면 그 일을 즐길 수가 없는 건 운동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교사로 일할 때도 ‘잘해야만 한다’는 압박에서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었다. 수업이 매끄럽지 않게 흐를 때, 아이들의 어수선해질 때, 그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임용 첫해, 전공인 지리가 아닌 역사 수업을 맡았을 때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나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실제로 당시 역사를 전공한 다른 선생님께 배우는 학급의 역사 성적이 내 수업을 듣는 학급보다 훨씬 높았고, 이런 사실은 나를 더 작아지게 했다.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이 나를 무능하다고 의심할까 두려웠다. 사실 가장 큰 의심은 스스로 품고 있었다. 내가 가르칠 깜냥이 되느냐고. 1년 만에 사회복무요원을 이유로 병역 휴직을 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래서인지, 농구공을 잡아보는 게 오랜만의 일이었다. 시합도 아니고, 선이말고는 지켜보는 사람도 없었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으니, 공을 던져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바닥에 공을 한두 번 튕겨보니 느낌이 괜찮았다. 비장하게 골대를 노려보다가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 공을 던졌다. 노 골. 골대까지 가지도 못했다. 공 튕기는 소리만 민망하게 울리는데, 갑자기 선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농구공이 바닥에 ‘통통’ 튀기는 모습이 재밌었던 모양이다. 이번엔 선이 차례. 유아차에서 탱탱볼을 꺼내 오더니 골대 밑에 자리를 잡는다. 고개를 뒤로 젖혀 골대를 올려다보고, 팔을 쭉 뻗어 슛!.....? 이번엔 내가 터지고 말았다. 이걸 던졌다고 할 수 있나 모르겠지만, 힘껏 던진 공은 조금도 뜨지 못한 채 손에서 ‘툭’ 떨어졌고, 선이 이마에 ‘탱’ 부딪쳤다. 그 순간 선이의 ‘띠용’한 표정에 무방비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아이랑 함께하는 시간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 닿아있다. 잘하지 않아도, 실수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오히려 우당탕탕 굴러가는 장면들에 더 많은 웃음과 추억이 새겨져있다. 함께 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더없이 행복함을 느낀다. 선이는 내가 장난감을 밟아 고꾸라질 때처럼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순간을 좋아한다. 나 역시 선이가 열심히 보는 책이 거꾸로 들려 있거나, 한 발에 양말 두 짝을 신으려 하는 모습에서 더욱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왜인지 그런 순간마다 나는 확신하게 된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그렇게 쌓인 시간들이 우리를 조금씩, 더 좋은 사람으로 자라나게 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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