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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Mar 05. 2024

회야강 따라 흘러 흘러

해파랑길 5코스 걷기

어젯밤. 걷는 김에 하루나 이틀 더 걷는 건 어떠냐고 k에게 묻다가 다음날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원래 계획대로 이번에는 5코스까지만 걷자고 했다. 점심때쯤 덕하역에 도착해서 점심 먹고 헤어지기로 하고 둘 다 차표를 예매했다. 금요일이라 차표 구하기가 쉽지 않은 데다 혹시 늦어서 못 탈지 모르는 상황이 생길 걸 대비해서 k가 조언해 준 대로 나는 기차표 두 개를 예매했다.      


 ‘길이 17.7km, 소요시간 6시간, 난이도 쉬움’     


두루누비에 난이도가 쉬운 길이라 소개되어 있어서인지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니 아쉬워서인지 마음이 유난히 가벼웠다. 짓무른 양쪽 새끼발가락과 네 번째 발가락에 밴드를 붙이고 7시에 출발했다.





진하 해변에서부터 덕하역까지 회야강을 따라 평길을 쭉 걷는 길. 누적된 피로에 다리는 무거웠지만 오르막도 없고, 비도 없고, 바람도 없어서 걷기에 좋았다. 해가 쨍하면 급격히 신체 배터리가 소진되는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흐린 날이라 생각하며 눈으로 풍경을 즐기며 걸었다. 다만 한 가지, 가도 가도 화장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불편했다. 훤히 트인 평야를 물줄기 따라 걷는 코스라 어디 숨어서 볼 일을 볼만한 곳도 없어서 화장실이 나오길 고대하며 걸었다. 숙소에서 나선 지 2시간 40분 만에 공중 화장실을 발견했을 때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회야강을 벗어나 차도를 따라 걸을 때는 대형 화물차들이 휙, 휙 지나가서 무섭기도 했다. 큰 도로를 벗어나 들판길을 걸을 때는 초록색 농촌 풍경에 마음이 푸근해지기도 했다. 위쪽 지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겨울 밭 풍경이었다.





동천교를 건너서 걷다 보니 어느 순간 또 빨간 리본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두루누비앱을 켜서 되돌아왔다. 덕하역이 가까워질 때쯤 k가 갑자기 우리 이번 여행에서 감사한 거 몇 개만 이야기하자고 했다. 누가 모범적인 교사 아니랄까 봐. 낯 간지러운 건 싫어하지만 그냥 맞춰서 한 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k가 먼저 시작해서 나도 감사한 것을 말하다 보니 별의별 감사한 게 다 떠올랐다. 신이 난 내가 더 하자고 하면서 한 번에 하나씩 말해야 되는 규칙을 어기고 혼자 연속으로 생각나는 대로 마구 말했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마쳐서 감사하다, 배려해 주고 맞춰줘서 감사하다, 힘들다고 숙소에서 뻗어 있을 때 내 짐까지 정리해 줘서 감사하다, 밖에 나오면 배탈 날까 봐 걱정인데 우리 둘이 좋아하는 음식이 비슷해서 감사하다, 부산 왔으니까 돼지 국밥 먹자 했으면 억지로 먹었을 텐데 돼지 국밥 먹자 안 해서 감사하다, 식당에서 반찬 더 달라고 할까 했을 때 나온 반찬 일단 깨끗이 다 먹고 모자라면 더 달라고 하자 했을 때 그래 그러자 해줘서 감사하다, 간식이랑 비타민까지 많이 챙겨 와 나눠줘서 감사하다... 온통 감사한 것 투성이었다.


 그렇게 감사와 덕담을 주고받는 사이 12시쯤 덕하역에 도착했다. 어디 마땅히 쉴만한 곳도 없었고 편의점 가서 뭐라도 사 먹고 싶었을 때는 편의점이 가까이 보이지 않았다. 길가 벤치에 앉아서 신발끈 고쳐 매는 정도의 시간만큼 두 번 쉬고, 동천리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서 잠시 쉰 것 말고는 계속 걸었더니 두루누비에 소개된 시간보다 1시간이나 덜 걸린 것이다. 덕하역을 지나 해파랑길 6코스 시작점 위치까지 가서 인증 큐알코드를 찍고 점심을 먹으러 시장 쪽으로 되돌아갔다.




덕하시장 어귀 이통일반 식당에서 7,000원짜리 된장찌개백반을 먹고 나와서 바로 옆 분식가게에 가서 순대도 한 접시 먹었다. 떡볶이와 어묵도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배가 불러서 2,000원짜리 쌈장 찍어 먹는 순대만 맛을 봤다. 둘 다 예매한 차표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덕하시장이 내려다 보이는 카페에 갔다. 어제밤에 예매한 표 중에서 뒷 시간 표를 예매 취소하고 쉬었다. 따뜻한 레몬차를 마시고 눈을 감고 있으니 온몸이 노곤해졌다. 고개를 앞으로 꺾었다 뒤로 꺾었다 하며 편안하게 졸았다.    





점심 후 후식(좌)        /   아침(중)            /     점심(우)




트랭글 기록 : 18.75km, 6시간 5분, 760kcal, 걸음 수 : 31,476보

날씨 : 흐림, 비(6도~10도)

걸은 날 : 2023년 1월 19일



[해파랑길에서 만난 디카시]


길 위에서

해 쨍쨍한 날만 있진 않았겠지

파랑이 이는 날도 있었을 거야


그럼에도 잘 걸어왔어

앞으로도 지금처럼 천천히 걸어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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