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당근 Apr 15. 2024

비가 온다, 감자를 심어야겠다

처음 쓰는 텃밭 일지


지난주 국회의원 선거일에 관사 앞 텃밭에 비닐을 씌웠다. 비닐 씌우기는 한 사람이 비닐을 끝에서 잡아주고 한 사람이 펴면서 하면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연출하기 딱 좋은 그림이 나오지만 혼자 했다. 남편이 학교를 옮기고 힘든 지 한 달째 감기로 골골댔기 때문이다.


작년에 만들었던 이랑 모양 그대로 두고 호미로 고랑의 흙을 설렁설렁 긁어 올려서 이랑을 다듬었다. 흙을 삽으로 뒤집어서 다시 이랑을 만들면 씨앗들이 뿌리내리기 더 좋겠지만 나도 아직 몸이 정상이 아니라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텃밭 오른쪽 두 이랑은 작년부터 같은 관사에 사는 아기(5살 정도) 아빠가 가꾼다. 작년 봄, 혼자 텃밭에 퇴비를 뿌리는 나에게 밭주인이냐고 아기 아빠가 물어왔다. 아기랑 같이 상추 같은 걸 키워보고 싶다고 하여 얼마나 필요하냐고 했을 때 두 이랑이면 된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내 땅도 아니면서 선심 쓰듯. 부지런한 아기 아빠네 이랑에는 벌써 상추, 파, 고추, 딸기, 쌈채소 모종이 심겨 있었다.


해마다 텃밭을 혼자 한 적은 없었다. 손바닥만 한 땅에서 나오는 얼마 안 되는 채소를 나눠 먹는 재미도 있지만 모종을 심어놓고 날마다 조금씩 자라는 걸 함께 보는 재미가 더 컸다. 작년에도 직장동료에게 한 이랑을 줬다. 그랬더니 자기는 꽃을 키우겠다며 샤스타데이지를 삼만원어치나 사서 한 이랑 전체에 40포기를 심었다(모종을 더 사서 더 촘촘히 심겠다는 걸 내가 간신히 말려서 그 정도). 샤스타데이지는 모종을 심고 1년이 지나야 꽃이 제대로 핀다는 걸 그때는 둘 다 몰랐다. 동네 샤스타데이지들 다 필 때 우리 텃밭 샤스타데이지는 간신히 작은 꽃 몇 송이를 피워 올려 보는 사람 애를 태웠다(그 샤스타데이지는 내가 올해 원주로 갈 줄 알고 작년 가을에 원주집에다 옮겨놨다). 올해는 옆집에 사는 새로 전입해 온 직장동료 두 분께 한 이랑을 드리기로 했다.


인제로 오던 첫해, 쓰레기 분리수거장 옆 지금의 텃밭 자리는 풀만 무성했었다. 지나가면서 볼 때마다 놀고 있는 땅이 아까웠다. 그전에 관사 살던 어떤 분이 텃밭으로 쓰다가 이사를 간 뒤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서 4년 전부터 내가 사용하고 있다. 텃밭으로 만들던 첫해에는 몇 년 묵은땅을 뒤집어서 이랑을 만드느라 고생을 좀 했다. 딱딱해진 땅을 뒤집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땅에 묻혀있던 비닐을 끄집어내거나 자잘한 비닐과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골라내는 일도 힘들었다. 3년 동안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쓰레기들(병뚜껑, 사탕봉지, 녹슨 철, 유리 파편, 플라스틱 조각, 노끈 등)도 골라내고 농업기술센터에서 농작물용 EM을 받아다 뿌려가며 공을 들인 텃밭이다.


올해 남편이 발령이 나서 다른 지역으로 가고, 텃밭을 꽃밭으로 만들겠다며 샤스타데이지 모종을 심던 직장동료도 다른 지역으로 가서 혼자서 텃밭을 무슨 재미로 하나 싶었다. 올해는 텃밭을 안 할 생각으로 남편 이삿짐 옮겨갈 때 비닐, 삽, 호미, 비료를 모두 원주집에 옮겨놨었다. 그랬는데 개학날 저녁에 갑자기 올해도 텃밭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텃밭 용품들은 원주로 간지 한 달도 안 돼서 다시 인제로 왔다.


손바닥 만한 땅에서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텃밭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기쁨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주말내내 초여름 날씨더니 오늘은 비가 온다. 감자를 심어야겠다.


작년 6월 6일, 감자꽃과 샤스타데이지




[디카시]



매거진의 이전글 '핸지열시안'을 챙기는 남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