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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Apr 30. 2024

곰배 이야기

약간의 19금 포함

나의 어릴 적 별명은 곰배다. 내 머리가 앞뒤로 튀어나와서 곰배라고 부른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그때는 곰배가 뭔지는 모르지만 아주 못생긴 메줏덩이 같은 것일 거라 생각했다. 주로 언니 오빠들이 나를 놀릴 때 곰배라고 불렀기 때문에 곰배라고 불리면 화가 났다. 특히 오빠가 “곰배야~ 떡 쳐라~ 낼모레~ 시집간다”라고 음을 실어서 노래를 부를 때는 약이 바짝 오르는데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씩씩 거리기만 했었다. 그러면서도 나보고 시집가라는 말인가, 시집가는 날이면 잔칫날이니까 나한테 잔치에 쓸 떡을 만들라는 말인가, 내가 시집가는데 잔치 떡을 내가 만들어야 하나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 곰배가 무슨 뜻인가 궁금하여 사전(인터넷이 없던 시절)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곰배가 머리가 앞뒤로 튀어나온 짱구처럼 생긴 농기구라는 것을 알고 아예 근거 없는 별명은 아니었네 싶었다. 며칠 전에 갑자기 머릿속에 곰배라는 단어가 스쳐서 네이버에서 곰배를 검색해 봤다.


곰배

팔이 꼬부라져 붙어 펴지 못하거나 팔뚝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

곰배 2

방언 ‘고무래’의 방언(강원, 경상, 충청, 전북).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곰배 3

방언 ‘곰방메’의 방언(충북).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곰배 4

방언 ‘흘레’의 방언(경북).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곰배

방언 ‘교미’의 방언 (경북). 우리말샘


고무래

농기구의 하나. 논밭의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린 후에 밭의 흙을 덮으며, 곡식이나 재 따위를 긁어모으거나 펴서 너는 데 쓰인다. 긴 네모꼴의 널조각에 긴 자루를 박아 ‘T’ 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표준국어대사전

곰방메

흙덩이를 깨뜨리거나 씨 뿌린 뒤 흙을 덮는 데에 쓰는 농기구. 지름이 두 치 남짓하고 길이가 한 자쯤 되는 둥근 나무토막에 긴 자루를 맞추어 박아 ‘丁’ 자 모양으로 만들었다. 표준국어대사전

흘레

생식을 하기 위하여 동물의 암컷과 수컷이 성적(性的)인 관계를 맺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교미

생식을 하기 위하여 동물의 암컷과 수컷이 성적(性的)인 관계를 맺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관련 단어들이 보였다.


흘레, 교미.


오빠는 흘레, 교미의 뜻을 알고 그 노래를 불렀을까. 아마 곰배가 아주 못생기고 놀려먹기 좋게 생긴 무엇일 거라 생각했겠지, 설마. 구전가요가 그렇듯 오빠도 어른들한테 그 노래를 배웠을 텐데 어른들은 그 노래에 그 뜻이 담긴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불렀을까. 곰배가 원래 떡 치는 기구이고 그 곰배한테 떡 치라고 하는 단순한 노래일 수 있다. 누구 말대로 머릿속에 온통 음란한 생각이 가득하니 그런 것만 눈에 들어와서 확대 해석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뭔가 야릇하고 절묘하다.


어릴 때 곰배라 불리던 나는 지금 누운 곰의 배를 닮았다는 곰배령이 있는 인제에 산다. 곰배령은 예약해야 하고 인제읍에서도 한 시간 넘게 가야 하는 거리에 있지만 지인들이 오면 꼭 곰배령을 권한다. 곰배령은 소박하고 푸근한 인제를 많이 닮아서 내가 좋아하는 산이다. 곰배령을 오를 때면 어김없이 ‘곰배야~ 떡 쳐라~, 낼모레~ 시집간다~‘ 노래가 귀에 맴돌곤 한다. 발걸음에 맞춰 속으로 노래를 부르면 박자가 발걸음에 딱딱 맞아서 걷을 때 힘이 덜 드는 느낌이 든다.


곰배령을 오르다 어떤 사람이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걸으며 혼자 씩 웃는 모습을 본다면 “곰배야~”하고 작은 소리로 한 번 불러보시라. “아, 혹시 이 노래 아시나요? 곰배야~ 떡 쳐라~ 낼모레~ 시집간다~”하며 기다렸다는 듯이 노래를 부르며 돌아보는 곰의 배를 닮은 체형의 중년 여성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


<사진 출처:문화재청 국가유산 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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