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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Jul 02. 2024

빨간 맛 카레

8시부터 학부모회 행사가 있는 날이다. 7시 40분쯤 출근해서 혼자 행사용 테이블을 꺼내놓고 사무실에 와서 잠시 쉬고 있었다. A에게 전화가 왔다.


"선생님, 학교 오셨죠?"


내가 평소에도 학교에 일찍 오는 걸 알고 전화한 것이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오면 또 뭔가 나에게 떡고물이 떨어지는 게 확실하다. 정말로 떡을 갖고 올 때도 있고(A는 떡을 안 좋아해서 떡을 받으면 나에게 갖다 준다), 쿠폰 만기일이 다가와서 샀다며 빵과 음료를 들고 올 때도 있고, 반찬을 만들어 갖다 줄 때도 있다. 어떤 날은 생과일을 갈아서 일회용 플라스틱 컵에 담아서 갖고 올 때도 있다. 우렁각시가 따로 없다. 오늘은 또 뭘 주시려나 김칫국을 마시며,


"아, 네, 오늘 학부모회 행사가 있어서 지금 밑으로 내려가려고요"


"제가 선생님 드리려고 뭘 좀 갖고 왔는데 지금 군청 앞이에요"


학부모회 행사하는 장소로 내려가니 학부모회장님이 벌써 나와서 학생들에게 줄 2회 고사(기말고사) 응원 간식을 세팅하고 계셨다. A의 자주색 스파크가 들어왔다. 보조석 쪽 창문을 열며 인사를 나눈 A, 뒷문을 열어서 쇼핑백을 꺼내 가라고 했다. 카레를 만들었는데 김치랑 같이 좀 갖고 왔다고 했다.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니 음식이 담긴 플라스틱 통과 그 위에 빨간 수건과 하얀 양말이 보였다. 의아했지만  묻지 못했다. 자주색 스파크는 이미 떠났고 나는 학부모회 행사 세팅을 도와야 했다.


한 시간 동안의 학부모회 행사가 끝난 뒤 쇼핑백을 챙겨서 사무실로 왔다. 냉장고에 쇼핑백을 통째로 넣으려다 쇼핑백을 열어서 사진을 찍었다. 사용감이 많아 보이는 빨간 수건과 하얀 양말을 정말로 나에게 주는 건가 궁금했다. 준다면 받을 마음도 있었다. 카톡으로 사진을 찍어 보내자마자 1초도 안 돼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선생님이 신던 하얀색 양말 이거 저 신으라고 선물로 주신 거죠?"


"흐흐흐 , 그게 왜 거기 있어요, 오전에 운동하고 갈아입으려고 챙긴 거예요, 흐흐흐"


"아, 저는 저 신으라고 선물로 주신 건 줄 알고요. 흐흐흐"


A가 숨넘어가는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양말은 갈아 신는다고 말하지 갈아입는다고 말하지 않는데 말이 잘못 나왔나 생각했다. 통화를 하면서 한쪽 손은 계속 움직였다. 음식을 냉장고에 넣은 뒤 빨간 수건과 하얀 양말을 따로 챙겨놓으려고 빨간 수건을 들었다. 그때 빨간 수건에서 한주먹도 안 되는 빨간색 천 쪼가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팬티였다.


"근데 선생님, 빨간 수건 안에, 저거, 빨간 팬티 저건 뭐예요? 흐흐흐"


"흐흐흐 아침에 나오려는데 신랑이 빨리 나오라고 해서 급해서 거기다 넣었나 봐요, 챙겨놨다가 나중에 주세요. 흐흐흐"


만난 지 만 2년째, 체육회 소속 체육관 관리 매니저로 방과 후에 우리 학교 체육관을 관리하며 학교 선생님들에게 배드민턴을 가르쳐 주는 분이다. 운동이라고는 모르고 살다가 자녀들이 초등학생 때 배드민턴을 알게 되어 결국은 A조(최상급 레벨)가 된 분, 배드민턴 전 국가대표에게 레슨 받은 실력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시는 분, 이웃 학교 배드민턴 클럽에서 데리고 가려고 눈독을 들이는 분, 59세에 배드민턴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고 60세인 올해 우리 학교 스포츠 강사로 일하시는 분, 살고 있는 집 마당 조경 공사도 직접 하시는 분, 남편이 사다리를 잡아주면 그 사다리에 올라가서 과일나무 전지를 직접 하시는 분. 그분은 팬티 색깔마저도 열정적인 빨강이다. A가 준 카레는 먹어보지 않아도 무슨 맛일지 알 것 같다. 그 맛은 A를 닮은 빨간 맛일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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