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의 추억과 나의 네번째 이야기
그 해 '우리'의 여름은 뜨거웠다.
세대를 넘어 한 시절을 살아간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같은 기억을 가지는 것은 역사에 기록될만한 큰 전쟁이나 가능한 일이고, 그 기억마저도 각자의 위치나 입장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은 그 시대를 살던 우리 모두에게 같은 추억을 공유하게 해주었다. 불과 얼마 전에 나라가 망했다는 절망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우리도 할 수 있다', 정확히는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만큼 그 해 여름은 우리 모두를 뜨겁게 만들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의대생으로 지내는 일은 제법 즐거웠다. 봄에는 축제를, 가을에는 연고전을 즐기며 연세대학교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가장 즐거운 일은 대학생 미팅 시장에서 우리가 제법 높은 인기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공부만 하던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좋은 향기가 주변에 항상 가득했고 풀 내음 가득한 캠퍼스만 걸어도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그땐 몰랐다. 이렇게 즐거운 날들이 벌써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2학년까지의 예과 과정이 끝나고 본과 과정에 돌입하자 모두의 눈빛이 바뀌었다.
의과대학의 경우 본과 때의 성적으로 후일 전공 과목 선택의 우선권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어제까지 같이 미팅 자리에서 실 없는 농담을 던지던 동기들이 갑자기 치열한 경쟁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와중에도 왜 그렇게 수업만 들으면 잠이 오던지, 유난히 내게는 친절하게 대하는 친구가 많았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2001년 1월 12일 울산, 거스 히딩크 감독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팀 감독 부임 첫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 첫 훈련에서 그가 2002년 월드컵까지 대표팀을 이끌며 내내 강조했던 '강한 체력'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지금은 잘 알려져 있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국가대표 팀에 대해 "체력과 투지는 좋지만 기술이 부족하다."라는 평이 주류였으나 거스 히딩크 감독과 그의 사단이 보기에는 정반대로 '기술은 괜찮지만 체력과 멘탈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체력 훈련 과정에서 연령별 대표팀과 올림픽 대표팀을 거치며 한국 축구의 미래라고 평가받던 선수들인 수비수 박동혁(현 경남FC 감독, 훈련 중 지쳐서 휴식을 요청했다가 바로 퇴소 조치 당했다), 우측 풀백으로 '천재'라는 평을 받던 박진섭(현 부산아이파크 감독) 등이 국가대표 팀에서 무더기로 퇴출 되었고 이영표조차 후보 선수로 내려앉았다.
'강한 체력'을 보유하지 못하면 경기 후반에 집중력을 잃게 된다는 간단한 진리 하나로, 거스 히딩크 감독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넘어 한국 축구를 근본적으로 바꿔놓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밤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정작 수업 시간에는 꾸벅꾸벅 조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은 당시 나에게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당연히 성적이 잘 나올 리도 없었고 불안해지니 밤에는 또 더 늦게까지 공부를 놓지 못하게 되고, 공부에만 치여서 사는데 막상 수업 시간에는 졸기만 하니 제대로 된 결과를 얻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펼쳐질 길이 더 험난해질 것을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불안을 참고 밤이 아닌 낮의 시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처음에는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정신이 맑아진 덕분인지 성적이 오르고 능률적인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엄청난 양의 서적과 학문적 이해를 위한 공부가 본과 과정의 시작을 알린다면, 이어지는 의과대학 재학 시절의 꽃은 역시 해부학 실습이다. 피부에 닿는 느낌이 지금도 생생한 차갑고 건조한 실습실의 공기, 그것보다 더 건조하고 차가웠던 긴장감, 실습이 있는 날이면 식당에서 쫓겨날 만큼 깊게 배이던 코를 찌르는 시신 보관용 포르말린 냄새까지. 모든 것이 여전히 어제 있었던 일처럼 떠오르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은 시신을 기증해 주신 분들을 위한 추도식이다.
"단 한 줌의 조각도 함부로 버리지 말고 잘 모아 드려야 한다. 그게 고인의 거룩한 뜻을 기리는 길이다."
시신을 해부하는 실습 과정에서 해부학 교수님은 모든 기증자분들이 거룩하고 숭고한 뜻으로 스스로의 마지막을 우리에게 기증해 주셨다는 것과 함께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강조하셨다.
해부학 실습에서 나와 함께 한 실습 조의 기증자는 시골에 사시던 할머니 분이었다. 당신은 못 배우고 돈도 없어서 사회와 의료 발전을 위해 줄 수 있는 것이 당신뿐이라며 스스로를 기증하셨다고 했다. 그분의 시신을 정말로 피부 한 조각, 손톱보다도 작은 간 조직 하나까지 모두 잘 모아 드렸고, 추도식 때 만난 기증자 할머니의 가족분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난다. 그 눈물이 내가 의사가 되는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자각하게 하였고, 의사로서 지금도 가지고 있는 완벽주의를 만들었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은 체력 훈련과 위닝 멘탈리티에 대한 동기부여 이외에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서양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것 같은 규율들을 만든다. 이를테면 국가대표팀 소집과 이동 시에 정장을 갖춰서 입고 오게 한다든지, 식사 시간을 정해놓고 장소 이탈이나 휴대폰 사용 등을 금지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랬다. 게다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플레이 스타일이 독불장군 같은 선수는 대표팀에서 배제했다.
"얼마나 팀을 위해 기여하느냐, 얼마나 팀을 위해 희생하느냐."
이 두 가지 기준을 두고 선수들을 차출했고, 그래서 연습 경기든 실전이든 어시스트를 한 선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장이자 팀의 맏형이었던 홍명보가 팀을 장악하려고 하자 그를 한동안 대표팀에서 배제하기도 했다. 슈퍼스타이자 대표팀의 최고참이었던 홍명보는 모든 것을 버리고 겸손하게 경기에 임하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다시 차출될 수 있었다.
2002년의 축구 국가대표 팀은 그들이 개인이 아닌 '국가'를 대표해서 경기에 임한다는 것에 대한 책임감을 플레이뿐 아니라 마음가짐으로도 단단하게 다져왔던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그 자리와 역할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 노력한다. 내가 의사로서 가지고 있는 완벽주의 역시 그런 책임감에서 나온 것이다. 해부학 실습과 추도식에서 느꼈던 그날의 감정은 절대 연민이나 단순한 슬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의료 발전을 위해, 한 사람의 의사를 키워내기 위해, 스스로의 마지막 순간을 기증한 기증자 할머니가 품으셨던 뜻과 기대를 이제 내가 책임지고 이루어 내야 하기에, 나는 그 뜻을 이해하고 책임을 받아들였기에 눈물을 흘렸다.
2002년 여름의 단 8경기를 치르기 위해 각자의 모든 것을 다해 훈련에 임하고 자기 자신을 버리며 국가대표의 책임을 다했던 그 선수들과 감독, 코치, 모든 스태프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명료한 믿음처럼, 나 역시 환자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여 매일 가장 완벽한 수술을 준비하며 살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책임이며 소명이기에.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
뛰어라 내 다리야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게 섯거라 이 세상아 내 노래 끝날 때까지
멀어지는 저 노을빛 어두워가는 세상에
노래하자 내 친구야 폭풍처럼 가자
2002, 꿈★은 이루어진다, <오 필승 코리아, 크라잉넛>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