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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수 Mar 07. 2024

My Name Is

세기말의 우리와 나의 세번째 이야기

1999년 7월 바로 이번달에
지구의 종말이 온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때문에
지구촌 곳곳이 떠들썩합니다.
 
<1999년 7월 지구의 종말 예언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고향, 평온해> / 사진=1999년 7월 11일, KBS 9시 뉴스 보도 화면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는 일은 어쩔 수 없는 공포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에서 살아갈 일에 대한 걱정, 전혀 새로운 경쟁자들 사이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리스크, 경험해본 적 없는 시간을 겪게 될 것이라는 공포, 이런 공포들이 하나라도 현실로 와닿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 마음 속의 괴물에 집어삼켜질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1990년대 말, '세기말'의 세상은 설렘보다는 공포로 가득한 분위기였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무책임한 예언들은 차치하더라도 2000년이 오는 순간 모든 컴퓨터 시스템이 마비될 것이라는 꽤 그럴듯한 이론적 뒷받침까지 있던 Y2K 문제는 실제로 지구 종말, 혹은 그에 준하는 대혼란이 올지도 모른다는 실질적인 공포를 불러왔다. 심지어는 지상파 뉴스에서 조차 '라면과 생수를 구비하고 현금을 인출해두라.'는 보도가 나올 정도였으니, 공포에 삼켜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중학교 시절 내내 꿈에 그리던 서울 과학고에 합격했을 때, 나에게도 공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합격 이후 진학 전까지는 기쁨이 더 컸지만, 막상 교정에 들어서서 상상만 해왔던 '좋은 경쟁자'들을 만나 부딪히게 되자 가장 먼저 나에게 다가온 감정은 좌절이었다. 분명 나 역시 자격이 있기에 이곳에 함께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일텐데, 친구이자 경쟁자로 만나게 된 그들은 마치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더이상 우수한 학생이 아니었고, 오히려 성적이 부진한 학생이었다. 당연하게도 오로지 서울 과학고 진학만을 목표로 공부를 해온 나에게는 생애 처음 겪는 좌절이었고 자신감은 바닥에 떨어지고 스트레스로 매일 악몽을 꿀 정도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경쟁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다는 사실은 17살의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압박감이었다.


 담임 선생님과 면담이 잡혔을 때도,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을거라는 생각만 들었다. 단 몇 달만에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면담에서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나는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잘할 가능성조차도 사라지게 돼."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당연한 말일 뿐이고, 완전히 포기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제자에게 해주는 격려 정도였겠지만, 이 한마디 말은 이후 나의 고교시절 전체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머리가 좋은 게 아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책상에 앉아 있어야한다.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부족함을 인정하고 무조건 외우자.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책 한권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많이 들더라도 여러권의 문제집을 사서 문제를 많이 푸는 것으로 이해하자. 과학고 출신 성형외과 전문의에게 기대할만한 공부법은 아니겠지만, 나는 다소 무식하더라도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1999년 2월, 자선단체에서 나눠주는 후드 티를 입고 다니던 허여멀건한 백인 소년 하나가 힙합 앨범을 내놓는다. 닥터 드레의 말에 따르면 '바나나 같았던' 비주얼을 가진 그 소년은 가정에서의 학대와 심각한 수준의 왕따를 동반한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과거를 가지고 있었고, 17살 때 고등학교를 자퇴하고는 디트로이트의 클럽들을 전전하며 음악 활동을 이어갔지만 별다른 주목은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들리는 비난과 야유에도 계속해서 가사 쓰는 법과 비트 만드는 법을 익혀나갔고, 어느날 무대에서 야유하는 관중들에게 라임 세 마디를 뱉어 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조용하게 만들자 드디어 자신감이 생겼다고 한다.


 모두가 알겠지만 그 백인 소년의 이름은 'Slim Shady', 바로 에미넴이다. 


 그의 메이저 첫번째 앨범인 <The Slim Shady LP>는 빌보드 200 2위를 달성하고, 현재까지 전세계 2,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에미넴은 어렸을 때 만화가를 꿈꾸기도 했지만, 11살이 됐을 무렵 외삼촌 로니로부터 '아이스 T'의 앨범을 선물 받고, 백인 힙합 그룹이었던 '비스티 보이즈'의 음반을 들으면서 흑인 음악이라고 여겨졌던 랩 장르에 백인도 도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랩은 그의 어두운 청소년기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힘이었으며, 그렇기에 그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나서도 랩을 포기하지 않았다.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지만, 여전히 나는 서울 과학고에서 성적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 친구들은 진짜 세상이 말하는 '천재'였고,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계속해서 좌절을 경험해야했다. 


 그래서였다.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내가 성실하게 노력하면 최고는 아니더라도 환자들에게 인정 받는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천재가 아닌 내가 노력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자체로도 나에게는 매력적이었다.


 의대가 6년 과정이라는 것도, 가족들 중에 의사가 많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을만큼 의대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나이지만 목표가 생기니 그제야 다시 나아갈 길이 보였다. '목표'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명분이자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고, 고등학교 3년을 마치고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서울 과학고 시절에 대해 너무 좌절과 공포만 이야기한 것 같아 덧붙이자면, 그때 만난 '천재'들은 지금도 나에게 훌륭한 친구로 남아있다. 함께 대화를 할 때면 마음 편히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천재'들은 IBM에서 일하기도, 아산병원이나 서울대 병원 교수이기도, 미국에서 의사를 하기도, 대한민국 최고 로펌에서 일하기도 하는 여전히 닿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들과 친구이자 라이벌로 경쟁하는 것만으로 나에게는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삶의 자극이 된다. 이것이 내가 서울 과학고에 진학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The Slim Shady LP>에 수록된 에미넴의 대표곡 중 하나인 'My Name Is'는 불행했던 소년 에미넴이 'Slim Shady'로 각성할 수 있었던 이유를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기말 우리를 두렵게 했던 공포의 대부분은 별다른 문제 없이 해결되었다. 당연히 지구는 여전히 종말하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두려움에 삼켜지지 않고 그것에 맞서 싸운 이들은 승리할 수도, 패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관통한 담임 선생님의 말처럼,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승리할 가능성마저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말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아내고 있다.


Hi! My name is.. (what?) My name is.. (who?)
안녕! 내 이름은.. (뭐?) 내 이름은.. (누구?)

My name is.. [scratches] Slim Shady
내 이름은.. 슬림 셰이디

Ahem.. excuse me!
에헴.. 실례합니다!

Can I have the attention of the class for one second?
학생들 잠깐만 여기 집중해줄래요?

1999, The Slim Shady LP, <My Name Is>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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