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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수 Mar 21. 2024

Video Killed the Radio Star

기억해야할 것들과 나의 다섯번째 이야기

 

비디오는 정말
라디오 스타를 죽였는가?


 인턴과 레지던트, 펠로우를 거치는 수련의 시절을 보내면서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의사라는 길이란 정말 쉽지 않구나 하는 것이었다. 연차가 높아질수록 육체적으로는 조금 덜 힘들어지긴 했지만, 권한에 따른 책임이 더 커지기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져만 갔다.


 작은 실수라도 환자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기에 매일 이어지는 당직 근무와 부족한 수면 속에서도 한 순간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게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2006년 개봉한 영화 <라디오스타>는 거의 1년 내내 병원에서 살던 인턴 시절에 봤던 몇 안되는,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 영화이다.


 1988년 가수왕 출신으로 전국구 스타였지만 대마초 사건, 폭행 사건 등에 연루되어 잊혀진 가수 '최곤'이, 자신을 발굴하고 키웠으며 몰락한 현재에도 함께 하고 있는 충실한 매니저 '박민수'와 함께 강원도 영월의 지역 라디오 방송 DJ를 맡아 청취자들과 함께하며 다시 재기한다는 이야기다. 스토리 자체는 사실 좀 뻔한 휴먼스토리 정도였지만, 최곤 역의 박중훈 배우와 매니저 박민수 역의 안성기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영화였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여전히 기억속 깊이 남아있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영화에 나온 음악에 공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박중훈 배우가 직접 부른 OST '비와당신'이 그랬고, 극중 라디오 프로그램이 전국 방송으로 편성되고 첫 곡으로 튼 영국의 뉴에이지 밴드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그랬다.




 누구나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면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익숙해지게 된다. 익숙하다는 것은 편안함과 여유를 주는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가끔 '나'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잊게 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한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고 매일 병동과 당직실 외에는 달리 바라보는 풍경도, 걷는 길도 없었던 나의 인턴 시절도 조금은 그랬다. 매일 새로운 환자와 케이스를 접했지만 내가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거나 치료를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저 단순한 일상이 반복되는 것에 대해 꽤 익숙해졌던 것 같다.


 그렇게 인턴 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때쯤, 소아외과 파트에 있던 나는 근무 마지막 날이 다가오던 어느날, 평생 잊을 수 없는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작고 연약해보이던 아이는 간기능 선천 이상이 있었고 경과가 좋지 않아 중환자실에 입원한 상태였다. 누군가의 목숨, 그것도 아직 세상의 빛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아이의 목숨을 지켜내는 일은 듣기에는 그저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직접 그 일을 하는 의사의 입장에서는 책임감과 불안감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환아의 상태는 아직 인턴이었던 내가 봐도 좋지 않아 보였고, 나를 호출한 4년 차 선생님의 얼굴에서도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가 읽힐 정도였다. 입원 전 검사 기록과 차트, 그리고 바이탈 수치를 몇번인가 번갈아 살펴보던 선생님은 내게 급박해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애써 감정을 숨긴 목소리로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한수야, 우리 이 환아 꼭 살려야 해, 가서 옷 갈아 입고 밥부터 먹고 와. 오늘 우리 둘이서 이 환아 지킨다."


 나는 처음에 선생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환아를 살려야하는데 밥을 먹고 오라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시 되물어야하나 머뭇거리고 있을 때 선생님이 눈짓으로 카트 위를 가르키셨다.


 앰부백(Ambubag, 인공 수동 호흡 장치의 약자로 주로 의학 드라마 등에서 응급상황 시 환자의 호흡을 돕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장치)을 달라는 의미였다. 그제야 나는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인지 이해하고 앰부백을 건네드리고 식당까지 최대한 빨리 달렸다. 환아의 상태가 몹시 좋지 못하고, 너무 작은 유아라 산소호흡기 사용이 어려워 선생님과 내가 둘이서 직접 밤새 앰부백을 짜야하니 먼저 식사를 끝내고 오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날 급하게 저녁을 먹고 의국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간 후부터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시간이 오래돼서가 아니라 그 4년 차 선생님과 1시간씩 교대로 온 신경을 집중해 앰부백을 짜고 바이탈을 확인하는 것에만 모든 정신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사투가 끝난 것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흐른 뒤였다.


 다행히 환아는 기적적으로 상태가 좋아졌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잊고 있었지만 그 날은 나의 인턴 근무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출입증과 가운 등을 반납하고 퇴근하기 전 한 번 더 병동에 들러 부모님을 보며 웃고 있는 환아를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병원을 떠났다.




 그날 근무가 끝나고 며칠 후에 나는 영화 <라디오스타>를 봤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들었던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가 화면에서 흘러나오자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막연히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과학고에 진학했던 일, 수준이 다른 경쟁자들에게 좌절했지만 '성실함'을 무기로 공부하며 의사의 꿈을 키워가던 시절, 그리고 의과대학 재학 시절 다짐했던 의사로서의 자세, 매일 업무에 치이며 익숙해진 인턴 생활까지. 그리고 바로 며칠 전 밤새 앰부백을 짜며 계속 되뇌었던 '살리고 싶다. 실수하면 안돼'라는 말이 떠올랐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는 미국 MTV 개국 당시 처음으로 전파를 탄 뮤직비디오로 영상매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곡이 됐지만, 사실 곡이 담고 있는 의미는 'VCR은 라디오 스타를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TV의 시대가 왔지만 그 흐름이 라디오 스타들을 죽이지 못했다는 것은 상황이 변하더라도 존재의 본질이 가진 가치는 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더 발전하고 싶고, 성실함을 통해 인정 받고자 하는 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이제 해야할 일은 명확했다. 성실함을 통해 환자에게 가장 완벽한 결과를 선물하는 의사가 되는 것, 이것이 지금도 내가 수술실에서 만큼은 완벽주의자가 되는 이유이다.




 성형외과 의사라고 하면 보통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멀끔한 인상에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의사들이다. 나 역시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이력만 보면 그런 스테레오 타입에 가까워 보이겠지만, 사실 성형외과는 의외로 밤 늦은 시간에 수술을 하는 경우도 많고 업무 강도가 높은 과이기에 오히려 똑똑함보다는 체력과 집중력, 성실함이 더 필요한 전공이다.


 특히나 안면, 유방 등에 대한 재건 수술은 성공하면 손상된 부위에 대한 불편과 상처를 조금이나마 잊고 살 수 있지만, 실패하면 환자에게 불필요한 조직 결손과 흉터를 남기게 되니 수술 이후 환자가 살아갈 삶의 질을 위해 반드시 성공해야한다는 압박감이 더 심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의사로서 완벽주의를 가지고 산다.


 인턴을 마치고 군의관 입대를 준비하고 있던 때, 그날 함께 했던 4년 차 선생님으로부터 전달 받은 곶감 한 상자와 덧붙이신 한 마디 말을 기억하면서.


 "받아. 그 환아 보호자가 주셨어. 선물은 사람 살린 사람이 받아가야지."



I heard you on the wireless back in fifty two
1952년에 무선 라디오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Lying awake intent at tuning in on you
깨어있고 누운 채로 주파수를 맞추며 듣곤 했죠

If I was young it didn't stop you coming through
내가 젊으면 당신의 목소리를 계속 들을 텐데

Oh, a, oh

They took the credit for your second symphony
그들은 당신의 두 번째 연주를 듣고 극찬했어요

Rewritten by machine on new technology
새로운 기술로 만들어진 기계로 방송된 거 말이에요

1979, The Buggles,  <Video Killed the Radio Star>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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