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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한수 Feb 29. 2024

달팽이

얼터너티브의 시대와 나의 두번째 이야기

Alternative
: 대안적인, 대안의 


 서울 과학고와 연세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했다는 프로필만 놓고 보면 나의 학창 시절은 얼핏 온실 속에서 보낸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 부산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중학교 시절을 보냈던 동네는 서울에서 상대적으로 교육 여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3년 내내 더 넓고 높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중학생에게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리 없었지만, 막연히 언젠가는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1992년 1월 11일, 결성 후 5년 간 무명에 가까웠던 언더그라운드 밴드의 앨범이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오른다. 마이클잭슨의 신화를 상징하는 앨범 중 하나인 <Dangerous>를 밀어낸 그 앨범은 <NEVERMIND>, 

'너바나'가 메이저에서 처음 왕좌에 오른 날이자 '얼터너티브 록'이 전 세계 대중음악 시장의 판도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순간이었다.


 1990년대를 정의하는 여러 단어가 존재하겠지만, 나에게 1990년대는 한마디로 '얼터너티브의 시대' 였다. 너바나의 등장과 함께 메인스트림을 대체하는 얼터너티브, 즉 '대안'이라는 개념이 전 세계를 휩쓸던 시대.

 

 신자유주의의 대두와 부의 분배 실패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 같은 복잡한 개념을 설명하지 않아도, 요즘 유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90년대 서울 사람' 캐릭터만으로 충분히 얼터너티브의 시대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얼터너티브 뮤직(Alternative Music)
: 그 시대의 주류 음악의 규칙과 관습과는 다른 대안적이고, 실험적인 음악 장르. 



 그랬기 때문일까, 무언가 더 나아지고 싶다는 생각, 그러기 위해 주변을 벗어나 넓은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 그것을 실현시킬 방법을 나는 생각보다 쉽게 찾아냈다. 


 지금 내 프로필에서 한 줄을 차지하고 있는 '서울 과학고'는 그 시절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내 인생을 바꾸기 위해 반드시 이루어야할 목표이자 가서 닿아야할 장소, 꼭 그곳에 도착해야만 좋은 친구, 좋은 선생님, 좋은 라이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내가 서울 과학고에 진학한 이유가 지금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는 보다 나은 대안을 찾기 위한 아주 현실적인 이유였다.




 1995년 결성된 '패닉'은 1집 타이틀 곡 <아무도>를 정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팬들이 발견한 곡 <달팽이>가 대히트를 치며 각종 가요프로그램 1위에 등극했다. 이후 2집에서 이어진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가장 패닉답지 않은 음악'이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달팽이>는 당시의 나를 잘 표현해주는 곡이었다. 


 그때 나는 '작은 달팽이' 그 자체였으니까.


 서울 과학고에 진학하고, 그 다음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유년기의 많은 남자 아이들이 그랬겠지만 나도 레고와 로봇 장난감을 조립하며 로봇 공학자의 꿈을 키웠었다. 우선 과학고에 간 후, 서울대에서 기계공학이나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유학을 떠나 외국의 유명한 기업에서 무언가 인류에 도움이 될만한 로봇을 만드는 상상. 


 꿈은 막연했지만 노력은 현실이었기에,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던 공부를 통해 매일 한 걸음씩 느리더라도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이 1995년의 '작은 달팽이'가 본 적 없는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를 따라 갈 길이라고,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2024년의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있다. 


 너바나의 <NEVERMIND>는 3천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고 201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지만, 커트 코베인은 1994년 4월 5일 그의 밴드 이름인 'NIRVANA'처럼 열반에 들었다. 헤로인에 중독돼 죽음을 맞이한 사람에게 열반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떠났다. 패닉은 2005년 4집 <Panic 4>를 끝으로 더는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다. 해체한 것은 아니라지만 최소한 그들이 다시 얼터너티브 록 앨범을 발표할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얼터너티브의 시대는 끝이 났다. 하지만 나는 이제 두 사람의 '작은 달팽이'들에게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줘야한다.


 의사 아버지를 둔 자녀들이 어떤 교육을 받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몇년 전 크게 히트했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등장한 의사들처럼, 자녀도 당연히 의대를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자녀들에게 해주는 말은 사실 딱 두 가지 뿐이다.


"영어 공부를 해라."


"운동에 취미를 가져라."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영어와 운동 두 가지만 잘 해두면 세상을 즐겁게 사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 말고는 별다른 참견을 하지 않는 편이다. 


 나는 단지 자녀들에게 AND와 END를 책임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AND'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인 이유, 환경적인 이유, 또는 어떤 이유로든 하고 싶은 일을 타의에 의해 멈추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END'란, 하고 싶은 일에 충분히 도전했지만 이제 다른 일에 시작하고자 할 때 먼저 끝을 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비용이 아까워서, 할 줄 아는 일이 그것 밖에 남지 않아서, 당장 그만두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서 무언가를 멈출 수 있는 때를 놓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아버지로서 곁에서 돕고 싶다.



 우리 생에서 '얼터너티브', 즉 대안은 어느 순간에나 끊임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선뜻 대안을 고르기는 쉽지 않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네비게이션이 대안 경로를 제시해도 과연 저게 더 좋은 선택일까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니까.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늘 대안을 선택하기 위한 '용기'가 필요하다.


 어딘가에서 파도소리가 들릴 때, 그 길이 인생의 정답이 아니더라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면 얼터너티브의 시대에서 나는 결국 길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달팽이'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존재는 가족뿐이다.



작은 달팽이 한 마리가 내게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줬어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거라고 

아무도 못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1995, 패닉 1집 'PANIC', <달팽이>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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