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의 마지막 신인왕과 나의 첫 이야기
내 간절함이 완벽함이 될 수 있도록
내 선택이 기로의 순간에서 최선일 수 있도록
내 칼날이 누군가의 날선 시간들을 벨 수 있도록
오늘도 돌아올 곳에 즐거움이 있도록
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서 아이들이 만들어준 책상 위의 석고상을 보며 기도한다.
오늘도 안전한 수술을 해서 가족들과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짧은 기도가 끝나면 순서대로 수술 디자인에 쓰는 파란색 펜을 챙기고, 가슴 주머니에는 캘리퍼를, 수술복 안에는 까만색 타이즈를, 늘 신는 이탈리아산 수술화를 신고, 오른쪽 호주머니에는 수술 모자를 넣은 채 수술실로 향한다.
환자에게 보다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를 통제된 상태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1992년은 그 시절을 살던 모두에게, 그리고 특히 나에게 아주 특별한 한 해였다.
그 해 4월 11일 토요일 MBC <특종! TV연예>에 출연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바로 그 다음주부터 10대들에게 엄청난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던 것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건 것도 모두 대단한 일이었지만, 부산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시절을 보내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서울로 상경한 나에게는 역시, 롯데 자이언츠 마지막 신인왕 ‘염종석’과 한국시리즈 우승이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은 고사하고 PC통신조차 대중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라 롯데 자이언츠가 승리한 다음날이면 새벽에 서점에 들러 산 스포츠신문을 반 친구들과 한 장씩 돌려보는 것이 야구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절에 데뷔 후 2번째 등판에서 1실점 완투승, 시즌 9승까지 전부 완투승을 기록하고 평균자책점 2.33, 17승 9패 6세이브의 기록을 올리며 신인왕과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방어율 1위를 휩쓸었던 염종석의 존재는 적어도 부산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우리에게는 단연 서태지 그 이상이었다.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뒤 의대시절과 인턴, 레지던트, 펠로우 시절을 거쳐 전문의가 되고 나서 나는, 당시 한창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던 미용성형 시장의 메인 스테이지에 직접 뛰어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때까지 몸담아왔던 대학을 떠나 '개원가'로 나왔다. 처음에는 기회가 왔을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항상 준비된 상태로 유지하려 애썼고, 모두가 그렇겠지만 간단한 코 수술도 설레고 걱정이 되어 밤새 머릿속으로 수술하는 과정을 그리는 날들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술 일정이 매우 바쁜 달이라 '안면거상' 케이스를 맡을 사람이 없어 당시 근무하던 병원의 대표 원장님이 나를 찾았다.
“유원장님 안면거상 할 수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분에게는 일상적인 질문이고 내가 그 상황에서 못한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다. 레지던트 시절 교수님이 하시던 수술에 참관했던 기억, 학회에서 들었던 안면거상 케이스에 대한 사례, 전문의 시험공부를 하면서 배운 것들, 짧은 시간에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나서야 나는 대답할 수 있었다.
“네, 제가 하겠습니다.”
*안면거상술(Face lift surgery)
얼굴의 전반적인 처진살과 주름을 리프팅하여 개선하는 수술. 개인별 노화 상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측두부 관자놀이 헤어라인을 따라 절개 및 박리 후 당긴 다음 남은 피부를 절제한다.
롯데자이언츠의 마지막 신인왕 염종석 선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1992년의 첫 선발 등판에 대해 개막 엔트리에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해 어머니와 스포츠 신문을 보면서 부둥켜안고 울었다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롯데자이언츠의 1선발은 당연히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이었고, 2선발은 박동희였으니 개막 두번째 날 염종석은 당연히 본인이 선발로 등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후 2시 경기 직전인 당일 오전 11시, 투수코치가 염종석에게 다가왔다.
“야! 염종석, 오늘 너 선발.”
이 한마디에 그는 밥도 먹지 못하고 계속 나오지도 않는 구토를 해야 할 만큼 극도의 긴장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그날의 경기 결과는 2와2/3이닝 4실점 강판, 그러나 바로 그 다음 경기에 똑같이 당일 선발 등판 통보를 받은 염종석은 LG 트윈스를 상대로 단 1실점만을 기록하며 역대 3번째 최연소 완투승을 거둔다.
나의 첫 안면거상 케이스는 다행히 강판되지 않고 성공적으로 끝났다. 당일 선발 등판 통보를 받은 나는 그라운드 위에서 고군분투했다. 교수님 수술 어시스트 때 봤던 것들을 하나 하나 생각하면서, 실점을 내지 않기 위해 연신 칼날을 던졌다.
혼자서 진행한 수술이 잘 마무리되니 자신감이 생겼고, 이후에는 그 병원에서 안면거상 케이스를 전담해 많은 경험을 쌓으며 리프팅 집중 전문의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우연한 기회였지만 다들 쌍꺼풀이나, 코 수술만을 생각할 때 노화가 가져오는 외모의 변화에 주목해 경력을 쌓아온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던 것이다.
첫 완투승 이후 염종석 선수는 1992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어내며 정규 시즌뿐 아니라 포스트 시즌 4승 무패 1세이브1.47의 평균 자책점으로 롯데자이언츠의 지금까지도 마지막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끈다. 하지만 포스트 시즌 포함 235와 1/3이닝을 투구한 고졸 신인 투수 염종석은 그 우승을 위한 혹사로 인해 다시는 1992년과 같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한다.
그 해 그의 모습은 같은 해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히트곡 제목처럼 <환상속의 그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혹사는 혹사일 뿐이고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역사이지만, 염종석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자신이 필요하다고 불러준다면 망설임 없이 다시 등판할 거라고 말한다. 1992년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고 너무 행복했었다는 그의 말처럼 ‘환상속의 그대’ 염종석이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최고의 투수인 이유는 역시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환상’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의사로서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도 그의 1992년과 비슷하다. 아니, 어쩌면 그해 염종석 선수가 등판하는 경기를 보기 위해 국민학교 6학년 시절 친구들과 사직야구장 앞에 아침부터 줄을 서며 기다렸던 내가 영향을 받지 않은 게 더 이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서두에 이야기한 나만의 루틴을 매일 지키는 것도, 수술실에서 만큼은 냉정하고 예민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환자와 의료진에게는 절대 티를 내지 않는 것도 모두, 의사라면 ‘환상 속의 그대’였던 그 해의 염종석 선수와 같이 굳건한 신뢰와 열정을 보이는 존재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
1992, 서태지와 아이들 1집, <환상속의 그대>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