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레바퀴에 관하여
- 1970~80년대에 생산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 소련(USSR)産 올드 렌즈 하나를 수중에 넣었다. 일단 팬케이크 사이즈라 작고 가벼워 어깨와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았다. 데일리 카메라 장착용으론 그만이다. 어림잡아 출시 50년도 더 된 친구라 성가신 수동 초점에 선예도 등의 기능은 떨어진다. 그런데 이 정도의 니즈를 충족시켜 주다니. 그 세월을 버텨 준 이 친구가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은 것보단 낡은 것이 낫나 보다.
- 최근에 마주친 타인 중에 기억에 또렷한 인물이 있다. 이름도 성도 모른다. 지난겨울, 그리고 며칠 전 딱 두 번 본 것이 전부다. 동네 친구들과 들른 식당에서 그녀는 겨울엔 비빔밥을 6월 초하루엔 냉면을 먹고 있었다.
- 알이 두텁고 큰 안경을 쓴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그녀가 내 시선을 끈 이유는 몸짓의 속도 때문이었다. 마치 슬로모션으로 촬영된 필름 속에 등장한 배우처럼 그녀의 모든 움직임은 거짓말처럼 굼떴다. 비빔밥을 뜨던 숟갈질이나 냉면을 들어 올리던 젓갈질이 모두 그랬다. 두 번 다 그녀에겐 동행이 없었다. 그녀의 속도에 맞춰 함께 밥을 먹어주기 힘들어서일까? 모수가 너무 적어 단정할 순 없지만. 하긴 나도 그녀에게 보조를 맞추긴 힘들 것 같았다.
- 그녀의 몸짓이 느린 것은 일종의 행동장애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그녀 자신과 주변인들은 일상이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매사 경망스럽고 호들갑 떠는 군상들 속에서 그녀는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흡사 도심 한복판에 판타지처럼 등장한 바다거북이가 두 눈을 껌뻑이며 우리의 속도를 관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 만약에 또다시 그녀와 마주치게 되면 눈길을 주지 않으련다. 천박한 눈을 가진 나는 도무지 그 눈빛에 담긴 함의를 읽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부디 그녀가 혼자서라도 자주 외식을 즐기길 바랄 뿐이다, 자신의 속도대로.
- 누구나 몇 개의 정원을 갖고 산다. 누구는 앎의 정원이 크고, 또 다른 누구는 정서의 정원이 크다는 차이가 있을 뿐. 크기 차이는 차치하고 나는 몇 개의 정원을 갖고 있을까? 정원이랄 것이 있긴 한가. 추려보니 내겐 정원이 없다. 보다 정확하게는 정원이랄 것도 없는 볼품없는 그 무엇이 있었으나 그곳에 심었던 꽃들은 목이 꺾였고, 나무는 부러지고 말았다. 정원이 머리에 이고 있던 하늘도 점점 가뭇하게 저문다. 부디 그대들의 정원엔 꽃이 만발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