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힘의 순서
- 노화로 인한 기억력 감소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이 잊힘의 과정에 순서가 있단다. 가장 먼저 사람 이름 같은 고유명사가 지워진다. 그리고 보통명사, 형용사, 부사 순으로 알던 단어들을 잊는단다. 가장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품사는 동사라고 한다.
- 치매에 걸리더라도 왜 인간은 동사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걸까? 생명체로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씨(동사)의 허리춤을 애처롭게 붙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 자연인으로서 인간의 육신은 퇴행하고 삶을 통해 축적된 기억은 포말에 무너진 모래성이 된다. 하지만 그런 개개인들의 집합이 일군 사회라는 생태계는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 우리는 0과 1이 분자(分子)가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짧은 기간 물성을 가지지 않은 디지털은 무서운 속도로 아날로그의 영역을 대체해 가고 있다. 디지털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창작의 영역인 예술 분야는 안전지대라고 여겼었다.
- 그런데 예술의 지형이 디지털에 의해 바뀌고 있다. AI가 문학은 물론 음악과 영화, 심지어 CF까지 창작하는 세상이 됐다. 불과 1년 여 전에 발표된 AI 프로그램은 이제 텍스트가 아닌 언어로 대화가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왔다.
- 생각해 보니, AI와 예술에는 닮은 점이 있다. 문학은 물론 음악과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형식의 영상은 물성을 지니지 않는다. 종이책이 아니라면 문학은 물성이 없다. LP나 CD가 아니라면 음악도 그렇고, 현대미술의 특정한 장르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AI라는 디지털이 해당 분야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 AI는 광속으로 정교해지다가 어느 순간 인간의 재능을 뛰어넘는 창작의 툴로 자리 잡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년필과 카메라를 든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나는 인간의 창작 행위가 결과물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목적성만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상상력과 구현력이 AI를 쫓기 힘든 상황이 와도 창작의 본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보통의 경우, 은퇴 후 노후준비를 자산의 규모 정도로 얘기한다. 주말에 골프를 치고 크루즈 여행을 다니는 것이 여유로운 노후라고 여긴다. 친구들의 그런 얘기를 듣다 보면, 뭔가가 빠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다일까?
- 나는 손재주가 없어 도전하지 못하지만 노후에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며 사는 건 어떨까? 물성 없는 디지털은 할 수 없는 크래프트(craft)의 세계가 있지 않은가.
- 단견이겠지만 나는 분명 인간은 크래프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사는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 믿는다. AI도 공장도 대신할 수 없는 수공예의 문이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