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저것
- 경험상 취향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굼뜬 탓에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는 일도 거의 없다. 단조로운 나의 취향이 시들지 않기 위해선 자극이 필요하다. 전시회 등에 발품을 팔아 안목(眼目)을 높이려 애쓰는 것이 그런 자극이다. 바지런을 떨면 세상이 이름 짓지 않은 보물이 널려 있다.
-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취향은 존중받아야 한다. 또 '싫음'도 취향임을 인정해야 비로소 존중이 완성된다. 그렇다고 확연히 다른 취향을 가진 이들과 교제하란 말은 아니다. 멀리하되 존중할 수 있었으면 한다. 내게 하는 말이다. 젊어서는 호불호가 뚜렷한 나의 성격을 강단 있다고 여겼다. 이마가 뜨거울 일이다. 나의 취향만 옳다고 믿는 벅수였다. 취향에 옳고 그름이 어디 있더란 말인가.
- 최근 몇몇 전시를 둘러보았다. 한국화와 민화인 문자도(文字圖)를 재해석한 홍인숙 작가와 문화재수리 단청기술자인 박근덕 작가, 그리고 레고 블록으로 다양한 작업을 해온 콜린 진(소진호) 작가의 전시회를 접했다.
- 이 세 작가는 '한국적'이란 단어로 수식될 수 있다. 대체 한국적이란 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 전통 양식을 재해석하거나 기법을 차용하면 한국적인 건가? 양식과 기법이란 것이 우리에게만 있는 고유함도 아니지 않은가? 솔직히 답을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건 세 작가의 작품들의 변용(變容)이 눈길을 끌었다는 점이다.
- 낯섦이 주는 이질성은 잠깐의 이목을 끌뿐 지속성이 부족하다. 그런데 이들 작가의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보면 볼수록 각인된다. 한국적이라서? 아니다. 이 작품들이 완성되는 과정의 시간이 보여서이다.
- 특히 콜린 진 작가의 레고 작품은 그 시간을 가늠할 수 없다. 작가는 "어떤 변형도 용납되지 않기에 구상에 맞는 크기와 형태와 색깔을 가진 조각을 기성품에서 찾아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 시는 날카로운 눈으로 쓰고, 소설은 진득한 엉덩이로 쓴다고 했다. 그들은 소설가에 가깝다. 사서 고생하는 작가들의 엉덩이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면 나의 취향은 진득한 엉덩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