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에 대한 변명
- 사람이 잘아서인지 크고 화려하거나 아름다운 물건, 풍경 앞에선 곧잘 주눅이 든다. 반대로 만만한 것들, 예를 들어 손에 쥘만한 화분 위로 떨어지는 작은 빛 같은 것들 앞에선 마음이 편타. 물건이나 풍경과 달리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게 무엇이든 두꺼운 치장을 한 꺼풀 걷어내면 한 치도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 내겐 아주 못된 버릇이 있다. 상대의 말이 두서없거나 골자가 없으면 바로 흥미를 잃고 집중을 못한다. 글밥 먹고 산 핑계를 대기에도 지나친 병증이다. 뱉어낸 말을 곧장 원고지에 옮겨도 손색없을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유별을 떠는지, 친구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정작 말맛이 좋은 축에도 못 들면서 그러고 산다. 또 다른 증상이 있다. 글을 오래 쓰거나 책 읽은 시간이 길어진 날엔 말이 거칠다. 올여름처럼 장마나 더위보다 뉴스 상단 기사들에 욕지기가 올라올라치면 상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나와 대면하는 몇 안 되는 이들에게 미안한 일이다. 상대 입버릇은 꼬박꼬박(속으로) 따지면서 상말을 달고 사는 내 꼬락서니가 그렇다.
- 말 나온 김에 한 마디 덧대자면, 내게 욕은 일종의 정신적 배변이자 자기 방어다. 90년대인가, <상말속담사전>의 서평을 쓴 적이 있다.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음담패설류의 색담과 육두문자에 능했는지 그때 알았다. 민초들은 가난과 억압을 그렇게 해소했고, 21세기의 나도 그렇게 풀고 산다. 염두에 두는 것은 육두문자에는 풍자와 해학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 요즘 괜찮은 문장론 몇 권을 다시 읽고 있다. 말도 그렇지만 글도 오염되기 쉽다. 적당한 때, 스스로 교정하지 않으면 글투는 어긋나고 표현은 투박해진다. 한적한 카페에 앉아 김현, 김화영 같은 분들의 책을 읽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 사람은 누구나 '말의 풍경' 속에서 산다. 내가 만드는 말의 풍경은 어떤 모습인가, 두려울 때가 잦다. 땡볕을 피해 자전거 바퀴를 굴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빠진 공기질과 전염병으로 입과 눈을 가려야 살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생각의 버튼을 눌러 말없이 대화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만화 같은 상상을 해봤다. 훗날을 살게 될 이들이 가엽다. 사랑하는 이의 눈꼬리에 달린 웃음을 볼 수도, 다정한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