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만에 -4kg
나는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다. 경제 활동을 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식으로 '출근'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프리랜서로 일해본 경험이 전부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대사님의 배려 덕분에 독립기념일을 온전히 즐기고 직장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독립기념일은 정말로 멋졌다. 미국인이 아니라 그런지 약간 소외감이 느껴지긴 했지만서도.
어색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대사관의 문을 두드렸다. 자켓도, 셔츠도, 정장 바지도. 모두 서먹하기만 했다. 각 잡힌 정장이 편안치 않은 탓에 몸이 굳어갔다. 스스로가 뚝딱거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뚝딱뚝딱 걸어 사무실에 입장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됐구나.
통렬한 자기반성이 이어졌다. 영어 공부를 좀 더 해 놓을 걸, 놀지 말 걸, 나는 뉴욕에 관광객으로 온 것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거의 모든 후회는 뒤늦다. 더디게도 찾아온 자성과 회개의 시간에 절망하며 원탁에 앉았다.
제가요?
그 업무를요?
해도 되는 거예요?
안보리에 가요?
제가?
총회요? 가서? 레포트를?
기사를 써요? 진짜?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리며 속으로 물음표를 남발했다. 인턴의 임무가 이리 막중할 줄은 몰랐던 탓이다. 다들 커피나 마시러 다니고, 설렁설렁 미팅에 참석해 앉아있기만 한다고 들었는데. 아, 그 쪽은 무급 인턴이고, 나는 유급 인턴이구나.
나는 대학교 학부생이다. 그러니까 내 최종학력은 '고졸'인 셈인데 이런 중대한 업무를 맡아도 되는 걸까. 걱정이 앞섰다. 제대로 해내지 못할까봐, 그래서 이 원대한 조직의 사명에 누를 끼치게 될까봐 무서웠다.
점심 식사와 투어를 위해 UNHQ로 향했다. 10년 전 뉴욕에 관광을 왔을 때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곳이다. TV로도 본 기억이 희미해, 신기하진 않았다. 그저 현실감이 없었을 뿐이다.
UNHQ의 곳곳에는 각 회원국이 기부한 전시품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의 경우 1991년에 UN에 가입하며 금속활자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인쇄동판을 기부한 바 있다. 나름 꽤나 중요한 대회의실 출입구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다는 점시 못내 뿌듯했다.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총회의 대회의실을 두루 누비며 '관광객' 행세를 했다.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는데 이스트리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위치해 전망이 아주 좋다. 경비행기가 수상착륙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 그런 낭만이 있는 식당이다.
근방 물가를 생각하면 가격도 굉장히 합리적인 편이라 늘 인산인해를 이룬다. 큰 회의가 끝나고 나면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이다. 뷔페식으로 운영되며, 담은 무게에 따라 계산을 하면 된다.
맛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가 잘린 파프리카임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안타깝게도 이 날의 UN 출입증 발급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권이 수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UNHQ의 모든 방문객(visitor)은 여권을 안내데스크에 맡겨두어야 한다. 나 역시도 여권을 안내데스크에 맡겨두었다. 그리곤 나오는 길에 되찾아오는 것을 잊었다. 딱 1분이 늦어서, 출입증 발급 사무소에 들어설 수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인생 첫 출근날이 지나갔다. 귀가해서는 집안 전체에 정전을 일으키는 큰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불안정한 전력 사정 탓에 에어컨을 켠 채로 헤어드라이기를 사용할 수 없는데, 그만 에어컨을 끄는 것을 깜빡하고야 만 것이다. 온 집안이 어둠에 잠긴 와중에도 소파에 앉아 업무 관련 공부를 했다.
HLPF(High-level Political Forum)가 열린 주간이었기 때문에 SDGs(Sustainable Development Goals)에 대한 강의를 수강하기 시작했다.
[SDGs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목표들이다. 총 17개의 목표들이 있고, 169개의 세부 사항들이 있다. 2015년부터 2030년까지의 장기 계획에 해당하기 때문에, Agenda 2030라고 불리기도 한다. UN 내에서는 정말 중요한 의제이기 때문에 헬로키티와 콜라보레이션이 진행 중이다. 실제로 UNHQ의 지하에 가면 헬로키티가 홍보대사로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7개의 목표들은 다음과 같다.
1. NO 빈곤
2. ZERO 기아
3. 건강과 웰빙
4. 양질의 교육
5. 성평등
6. 깨끗한 물과 위생
7. 저렴하고 깨끗한 에너지
8. 양질의 일자리와 경제 성장
9. 탄력적 인프라 구축
10. 차별의 감소
11. 지속 가능한 도시와 공동체
12. 책임감 있는 소비와 생산
13. 기후 행동
14. 해양 보존
15. 육지 보존
16. 평화와 정의
17.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협력
문제는 2030년까지 채 6년이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나 코로나의 여파로 계획이 크게 일그러졌다. 오는 9월에 열리는 Summit of the Future에서 후속 논의가 이어질 예정이다. 근래 참여한 거의 모든 회의가 'Summit of the Future에서 두고 봅시다'라는 식으로 마무리지어졌는데, 과연 얼마나 실효성 있는 논의가 이뤄질지는 미지수이다.
관련된 추가 정보를 얻고 싶다면 다음 사이트를 방문하면 된다.
(이렇게 중요한 의제에 대한 정보를 UN의 공용어 6개로만 제공하는 싹바가지 없는 행태를 규탄하고 싶다. 회의가 6개국어로 진행되는 것은 어쩔손 없다고 치더라도, 온라인 홈페이지에 번역본 정도야 제공할 수 있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