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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요한 Feb 15. 2024

Ep. 6 마지막 희망, 그리고 사랑


 대한민국 최고 명성의 아산병원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시술을 했으나 결국 실패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다고 느낄 찰나, 어머니의 친구 분이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한방병원을 소개 시켜주었다. 소문에 의하면 정말 다양한 부류의 환자분들이 치료를 받고 갔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지금으로써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믿어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서울 아산병원에 있는 어머니를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한방병원으로 옮겨드리기 위해 또 서울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아산병원에서 퇴원을 했고, 환자복이 아닌 일상복을 입고있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택시를 타고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한방병원으로 이동했다. 아파트 앞 상가 건물에 3개의 층으로 자리잡은 병원이었다.


 나는 두 손 가득 어머니의 짐을 들고, 어머니는 내 팔목을 붙잡은 채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너무나 밝고 쾌적한 시설에 숨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로비에서는 잔잔하게 피아노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직원 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셨다. 그 전에는 진료를 받기 위해 사람이 붐비는 병원에서 전쟁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이 병원에서는 어머니를 진료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원장님이 계신 진료실에 들어갔다. 원장님은 바로 진료를 하시지 않고 어머니와 신앙에 관한 대화를 먼저 하셨다. 어머니를 환자로 보기에 앞서 한 교회의 사모로, 한 사람의 아내로, 자식들의 어머니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원장님은 아산병원에서 받아온 진료 기록을 보시고는 이곳 저곳 혈자리를 짚으셨다. 어머니는 통증을 호소했고, 원인을 정확하게 짚고 계시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장님은 어머니가 음식을 드실 때마다 증세가 심해지는 것은 음식이 원인이 아니고 음식을 씹을 때 턱 관절이 움직이며 잔뜩 부어있는 혈관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지금껏 거쳐왔던 병원에서는 듣지 못했던 진단을 듣고 어머니와 나는 더욱 병원에 신뢰가 갔다.


 어머니의 입원실은 4인 1실에 어머니 혼자 쓰시는 방이었으며 화장실이랑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또 유리창이 크게 있어 밖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이전에 비하면 호텔 수준의 방이라며 정말 좋아하셨다. 

 대신 이곳에서는 양방병원처럼 단번의 시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침과 고주파치료, 식이요법 등을 해야하기 때문 최소 한 달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분위기가 너무나 포근한 이 병원에서 어머니를 오랜기간 보살펴 주며 치료를 해준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나는 병원에 죽을 시켜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한 뒤, 다시 대전으로 내려갔다.


 나는 어머니가 병원에 한 달 계실 동안 아버지를 평소보다 더 많이 챙겨드리며 내 학원일과 전공 발전에 매진했다. 어머니는 내가 유튜브에 올려놓은 찬송가 기타연주를 매일 듣는다고 하셨는데, 매일 똑같은 찬송가만 듣는게 아닌가 싶어 새로운 연주들을 녹음하고 올리는데도 힘썼다. 나는 가끔 어머니가 생각날 때면 전화로 안부를 물었고, 어머니는 그때마다 병원에서의 일들을 얘기하셨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병원 근처 강변으로 겨우 산책 다녀온 이야기, 불안해 하는 자신을 다그치며 믿음으로 견디게끔 도와주시는 원장님 이야기, 자신을 잘 챙겨주시는 간호사님들의 이야기 등 어머니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 주가 지날 수록 혈압 수치도 낮아지고 어지러움 증세도 점점 줄어든다고 하셨다.


 어느새 어머니가 입원 한지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대전에 내려오기 위해 퇴원 전날 밤에 미리 남양주로 올라갔다. 어머니는 병원에서의 마지막 밤이었기 때문에 한 간호사님을 끌어안으며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를 했다. 긴 병실 생활을 마치는 것에 대한 후련함은 있었겠지만 그동안 자신을 사랑으로 돌봐준 병원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몹시 섭섭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오후 9시가 되니 잘 준비를 마치셨다. 나에게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다음날 학원 수업 준비도 할 겸 병원 근처 카페에 가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는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잠이 오지 않는다며 나에게 언제 오냐고 카톡을 보내오셨다. 나는 어머니께 먼저 주무시라고 했고, 근처 편의점에 들러 허기진 배를 달래고 자정이 넘어서야 병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의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는 잠에 깊게 빠져들어 계셨고, 머리맡 핸드폰에서는 내가 유튜브에 올린 찬송가 기타 연주가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병실에 나지막이 울리는 내 찬송가 기타 연주가 너무 슬프게 들렸다


어머니는 선병원에 계실 때부터 내 찬송가 연주가 위로가 된다고 하셨고 

나는 그저 막연하게 생각 했을 뿐이었다.


내 찬송가 연주를 들으며 잠에 든 어머니의 모습을 보니

한치 앞을 모르는 불안한 시간 속에서

매일 같이 주삿바늘을 꽂고

홀로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나의 찬송가를 닳도록 들으셨을 모습들이 떠올라

가슴이 너무 아팠다.


노래 재생이 끝나 빛만 새어나오고 있는 어머니의 핸드폰을 끄고, 

어머니를 꼭 안아준 후에 내 자리에 가서 잠에 들었다.




퇴원 날 아침이 밝았다.

어머니는 과일을 배달 시켜 병원에 계신 분들에게 돌리며 인사한 후 퇴원 절차를 밟으셨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대전에 도착하였다. 

어머니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너무나 행복해 하셨고, 베란다에 키우는 꽃들을 보며 반갑게 인사 하셨다. 


정말 다행인 것은 아버지가 재임용된 직장에서 들었던 보험 덕에

그동안 치료비로 인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그동안의 힘겨운 시간이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니,

모든 것이 감사했다.


이 세상에는 나의 어머니보다 훨씬 더 심한 투병 생활을 하는 분들도 계실테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어쩌지도 못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게다가 지금껏 우리 가족 중 누구도 이런 긴 병원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감사였다.


 그동안의 힘들었던 시간 덕분에 나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달았다. 또, 살아있을 동안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사랑했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살아있을 때는 이것 저것 따질 것도 많고 중요한 것도 참 많은 것 같지만, 막상 죽음의 문턱 앞에 서면 살아 있는 것, 사랑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완전하게 다 나은 건 아니지만, 이전보다 더 좋아진 어머니를 하루 하루 볼 때마다 너무 감사하다. 또 신기하게도, 어머니가 병원 생활을 마치자마자 나는 어떤 계기로 인해 학원 일을 그만 두게 되었고 대학교 교직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비록 계약직이긴 하지만 내 개인 음악 활동을 하는데에 있어 전보다 넉넉한 경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가 더 많이 회복되어 아버지와 행복한 노후를 보낼 때 쯤 나도 독립을 하여 자리를 잡고 부모님께 더욱 효도할 수 있는 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혹여 저의 이 긴 글들을 관심있게 읽어주신 분이 계시다면 정말로 감사 드립니다. 짧은 몇개월 안에 다양한 감정을 느꼈던 그 시간들을 정리하고 싶어 개인 블로그에 글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글로 적다보니 조금 어수선하기도 하고 미쳐 적지 못한 일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제 글에 관심 주시고 공감 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절망 가운데 저희 어머니를 치료 해주시고 사랑으로 돌봐주신 남양주 다산하나한방병원 원장님 내외분과 간호사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에 공감하시고 도와주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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