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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리상상 May 27. 2024

200만 원짜리 롱패딩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왜 우리 엄마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냐고 따져 물을 경황도 없이 헛웃음이 나왔다. 조직 검사가 끝나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그 길고 지리한 시간을 견디고 병원에서 들은 첫마디였다. 뇌종양이라고 했다. 그것도 교모세포종. 교모세포종은 뇌신경세포에 생기는 암으로 진행이 빠르고 치료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환자 평균 생존 기간이 18개월, 5년 생존율은 3% 미만이라고 한다. 드라마, 혹은 책 속에서나 접했던 예후라는 단어를 실제로 들어본 것이 처음인 듯했다. 그 단어의 생소함만큼이나 모든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담당의는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 병세의 추이를 지켜보다가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으며 항암치료를 병행해야 한다고도 일러주었다.      


허공을 걷는 듯한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선 엄마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하고는 집 근처에 있는 옷가게로 가자고 했다. 개인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크지 않은 규모의 부띠끄 샵이었다. 황망함에 엄마의 마음을 가늠할 길이 없던 나는, 생의 마지막을 앞둔 엄마가 전에 없던 소유욕이라도 생긴 것인지 의아할 뿐이었다.


노란 조명 아래 가지런히 진열된 옷들을 한참 동안 이것 저것 둘러보던 엄마는 가장 길고 가장 두터워보이는 롱패딩을 가리켰다. 목 주위에 짙은 갈색 퍼가 달린 패딩이었다. 어두운 회색과 보라색이 혼합된 그 옷 색깔이 꼭 내 기분 같았다. 직원이 패딩을 꺼내 보여주자 엄마는 나에게 그 옷을 입혀 보고는 이제야 됐다는 듯한 눈짓을 보냈다.


평소 옷이나 화장품 따위에 돈을 거의 쓰지 않던 엄마였는데... 그 패딩의 가격은 거의 200만 원에 달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무척이나 더 큰돈이었다. 순간 브랜드 옷도 이 정도 가격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그때는 엄마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너구리 털이 목 주위에 달려있어 따가웠지만 나는 기꺼이 엄마가 사준 옷을 입고 집으로 향했다. 그전까지는 눈을 맞을 때면 늘 즐거웠지만 소복하게 눈이 내리던 그날은 기쁠 수도, 마냥 슬픔을 내비칠 수도 없는 묘한 날이었다. 그래도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우리 앞에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순간 한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과거를 회상하며 엄마를 그리는 요즘에서야, 왜 엄마가 그리 예쁘지도 않고 비싸게만 보이던 그 옷을 사주었는지 조금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엄마는 당신이 떠난 뒤에도 딸에게 가장 길고 가장 두터운 따뜻함을 남겨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엄마의 생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소비였을 수도 있겠다.     

롱패딩 유행이 지난 지도 한참이지만, 나는 눈 내리는 겨울이 올 때마다 한 번쯤은 옷장 속에서 그 롱패딩을 꺼내 입고 거리를 걸어보곤 한다. 눈을 감고 살갗에 닿는 눈을 느끼다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 차가움 때문에 롱패딩이 지닌 온기가 더 실감이 난다. 그럴 때면 마치 그날을 엄마와 함께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진단을 받고 엄마가 가장 먼저 내게 선물했던 그 옷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간직하게 될 것 같다. 롱패딩을 보며 엄마를 길게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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