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상담을 하다보면 '우리 아이 공부 좀 하게 해주세요.'와 같은 부탁을 종종 받곤 한다. 부모도 해주기 어려운 동기부여를 교사라고 별 수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교육 심리학에서 배웠던 자이가닉 효과-Zeigarnik Effect-를 떠올리면 또 못할 일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러시아 심리학자 자이가닉이 발견한 심리학적 현상으로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작업에 대한 목표나 정보가 우리 마음 속에 계속 남아있거나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오늘은 간만에 날씨 좋은 주말을 맞아 옛 정취가 한껏 느껴지는 감고당길에서 아이들과 함께 했다.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는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좋다. 아예 현대적이거나 아니면 옛스럽거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건물과 물건들이 가득한 그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꼬박 한나절을 보냈다.
조선 19대 왕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의 친정 감고당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하여 정독 도서관 인근 길을 감고당길이라고 한다. 한때 장희빈에게 밀려났던 인현왕후도 숙종과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며 감고당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이루지 못한 무언가는 항상 아쉬움과 더불어 강렬한 소유욕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최근 교육감이 사퇴한 후로 그가 추진했던 정책들 역시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었다. 불과 한달 전쯤, 100일 동안 책을 읽고 기록하는 북웨이브 챌린지가 끝나면 정독 도서관에서 완주 메달을 받아가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 문자를 믿고 먼 길을 찾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도서관 직원들은 메달이 준비가 안됐다며 난색을 표했다. 아이들에게 메달 받으러 가자고 데려온 부모로서도 난감했던 순간이다. 책을 좋아하는 편인 아이들인데도 도서관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자며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서관 일정 외에 딱히 큰 계획을 세우고 온 것은 아니어서 무작정 걷다 보니 국립민속박물관이 눈에 띄어 그곳으로 갔다. 절기와 명절, 과거 조상들의 생활상이 드러난 물건들이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고 예정에 없던 전통춤 공연도 볼 수 있어 유익했다.
어린이 박물관이 열려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공사로 인해 임시휴관중이라고 한다. 실내외로 이것 저것 구경하다보니 어린이 박물관 근처까지 오게 되었는데 휴관중인 어린이 박물관을 바라보는 두 아이의 눈이 그윽했다. 아쉬움이 가득한 그 눈빛이 조금은 안스럽기도, 한편으로 웃기기도 했다.
아쉬운 김에 근방에서 예술 체험이라도 해보자 싶어 야심차게 들러본 국립 현대 미술관(MMCA-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은 수, 토요일 6시 이후부터 무료로 개방된다고 한다. 우리가 방문한 시각은 5시 30분쯤, 애매한 시간이었다. 첫째 아이는 무료개방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시를 보고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매표소 직원의 말로는 여자의 나체가 많이 등장해서 아이들이 볼수는 있지만 아이에 따라 조금 부적절한 부분도 있을 것 같다는 뉘앙스로 안내를 해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되어서 보게 되면 보는거고 굳이 안 봐도 상관은 없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때마침 졸음이 찾아온 딸이 아빠품을 찾는 바람에 딸, 남편과는 헤어져 첫째와 둘이서 아트샵을 전전하며 무료개방을 기다렸다.
거의 6시가 다 되어갈때쯤, 이왕 볼거면 다같이 보고 싶어서 전화를 받지 않는 남편을 찾아 밖으로 나갔다. 풀밭 공터 너머로 막내가 탄 유모차를 끌고 있는 그가 보였다. 어려서부터 일찍 출근하는 아빠에게 약간의 분리불안이 있는 첫째 아이는 기다렸던 전시도 내팽개친 채 아빠를 따라 뛰어간다. 도서관 메달의 행방불명과 어린이 박물관 휴관에 이어 애써 기다린 미술관 입장까지, 총 세번째 허탕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차를 빼기 위해 마지막으로 들른 정독도서관은 유아 자료실이 닫혀있는 상태였다. 오전 중에는 도서관에 좀 더 머물다 가기를 권했어도 다른 곳에 가보고 싶다고 했던 아이들인데 막상 닫힌 도서관을 보니 무척 아쉬워했다. 이 어린이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것저것 책을 뽑아들고 졸린 눈을 비비며 읽어달라는 왕성한 독서욕을 보였다. 도서관이 닫혀있어 못 다 읽은 아쉬움을 그렇게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서 자이가닉이 보였다. 다음 달에 들어올거라는 메달을 손에 쥐게 된다면 이 아이들은 오늘 못 받아서 실망했던 것 이상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것이다. 어린이 박물관 임시 휴관이 끝나면 오늘 가지 못했던 한을 풀듯 즐겁게 그 곳을 누빌 것이 분명하다. 언젠가 자유롭게 미술관을 관람하게 되는 날이 오면 누구보다 더 진지한 자세로 작품에 심취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모든 것을 잘하지 못했어도 좋다. 인생은 언제나 미완을 채워가는 과정이 아니던가. 잠시 쉬어갈 때 되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솟구치기도 하고, 불완전하기에 오히려 애틋하게 아름다워지기도 하니 말이다.